3-2. 나와는 다른 세계

by moonrightsea

나름 마음을 다잡고 머릿속에 드는 상념을 없애고 가능한 공부와 그림에 몰두하려고 계획을 꽤나 촘촘히 세웠다. 작심 3일이 반복되면 다시 3일을 세우고 그렇게 시간이 여념 없이 흘러 10월 무렵, 경윤이에게 전화가 왔다.


" 주말에 잠깐 시간 돼? 너 화실 끝나면 전해줄 게 있어서."

" 아. 화실에 온다고?"

" 응 우리 집 근처니까. 잠시 내려갈게. 몇 시에 끝나?"

" 음 한 8시쯤?"

" 그럼 그때쯤 화실 앞에서 기다릴게. "


시간이 흘러 약속도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어느새 주말이 되었다. 한창을 정신없이 화실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데 현욱이 정신없이 달려와,

" 대박. 나 1층에서 진짜 잘생긴 애 봤어. "


" 넌 아직도 인물 타령이야? 연예인이라도 봤어?"

" 아니 키도 엄청 큰데 와 그 짙은 쌍꺼풀, 짧은 스포츠머리, 오뚝한 콧날 우수에 젖은 눈빛 막 누군가를 기다리는 그 초조해 보이는 몸짓. 딱 봐도 고백하려는 거 같은데..."


순간 인상착의를 듣자 경윤이 떠올랐다.




뭐라고 형용할 수는 없지만 그랬다. 시계를 보자, 8시 10분. 나는 급히 현욱에게 먼저 간다고 인사를 하고는 달려 내려왔다. 경윤이 손을 들어 인사를 건넸다.


" 아 미안. 내가 깜박했어. 전화를 하지. "

" 아냐. 얼마 안 기다렸어. "


" 나한테 뭐 준다고 했지? 그게 뭐야?"

" 아 이거 지난번 모임 사진. "

" 응? 그건 정림이 한테 줬잖아. "

" 아 확인해 보니 니 사진도 좀 있어서."

" 응? 어디?"


내가 사진을 꺼내려 하자 그는 황급히 내 손을 막았다.

" 집에 가서 봐. 차도라 위험해."

" 아 그래. 고마워. 이렇게 챙겨줘서. 뭐 음료라도 마실래?"

" 아니 괜찮아. "


" 아냐. 내가 사줄게. 이렇게 직접 전해줬는데 이 정도야 뭐. "

편의점에서 음료를 사들고 나와 버스 정류장에 서자, 경윤이 말했다.

" 요새 너네는 왜 모임에 안 나와?"


" 아 미안. 사정을 이야기해야 했는데 늦었지? 사연이 좀 있었어. 그게."

" 미소야. 집에 가?"




나를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성현오빠가 현욱과 서 있었다.

" 아 네. 집에 가세요?"

" 응. 우리 이제 집에 가. 근데 누구?"


옆에서 경윤의 존재가 한껏 궁금해진 현욱이 물었고 그런 현욱을 내가 바라보자,

" 안녕하세요. 저 미소랑 같은 동아리 김경윤이라고 합니다. "


라고 말하며 경윤이 먼저 손을 내밀며 인사를 했다. 그러자,

" 안녕. 난 같은 화실 다니는 선배 성현이라고 해. "

어색한 분위기. 서로 인사를 할 사이들은 아닌데 이 이상한 긴장감들은 뭐지. 때마침 우리 집 방향으로 가는 버스가 왔다.

" 미소 저 버스 탈거지? 나도 오늘은 저거 탈거라. 같이 타자. "


나와 다른 방향인 성현오빠가 말했다. 나는 '왜'라는 표정으로 성현오빠를 올려다봤고 그런 우리를 바라보던 현욱이,


" 미소 오늘은 다이어트한다고 걸어온댔잖아. 형은 저랑 먼저 가시죠. 어서 타요. "


그렇게 말하며 성현을 버스로 밀어 올렸다.

그들이 버스 뒷좌석에 앉아 현욱이 손을 흔들며 돌아가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경윤이 말했다.


" 좀 걸을까?"

" 응"


어색한 발걸음이 익숙해질 무렵, 나는 말문을 열어 그간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동아리 활동을 갑작스레 접은 이유도. 한참을 듣고 있던 경윤은 멈칫 그 자리에 멈춰 서더니 잠시 머뭇거렸다.




" 좋다."

" 응?"

" 아 오랜만에 이렇게 걸으니 좋다고."

나는 경윤에게 다가가 팔짱을 끼며,


" 이야. 일팔 청춘. 갈길에 머네. 벌써 지치면 쓰나?"

그러며 앞으로 이끌었다. 그러자 그가

" 아까 그 성... 현인가 하는 선배 하고는 친해?"


" 아 뭐. 같은 화실이니까. 인사하는 정도지. 다른 애들은 잘 있어?"

" 권익이는 요즘 미친 듯 공부 중이야. 아버지께서 쓰러지셔서 많이 놀랐나 봐. "

" 권익이가? 그런 일이 있었구나. 그래서 연락이 없었구나."


" 정신 차린다고 하면서 요즘은 나랑도 잘 안 놀아줘. 자식. 철들었어. "

" 권익이 많이 놀랐겠다. 네가 잘 챙겨줘. 안 그래도 잘 지내는지 궁금했는데. "


" 그래서 말이야. 우리 학교 다음 주 축제거든. 거기 올래?"

" 음. 글쎄."

" 다들 궁금해해. 잘 지내는지. 이참에 바람도 좀 쐬고. 오랜만에 인사도 하고 그래도 모임에 마무리 인사정도는 해야지."


" 야 네가 웬일이야. 이렇게 말도 많이 하고. 너 많이 변했다?"

" 그래?"


그는 멋쩍은 듯 머리를 글적이며 웃어 보였다.

" 알았어. 그럼 정림이랑 이야기해서 갈게. "




경원고 축제는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1부에서는 반별 합창대회를 예선을 하고 2부에서는 장기자랑에 3부에서는 합창대회 결승에 게스트 공연까지 그야말로 역사가 있는 곳이라 규모도 성대했다.

학교 내부는 온통 나무마다 트리 조명이 밝혀져 길을 비췄고 그 길마다 길게 시화전, 그림전, 모빌전 등이 길게 이어져 볼거리가 풍성했다. 전시 입구로 들어서자, 선도부에서 종이꽃과 포스트잇, 펜을 나눠주었는데 넉살 좋은 선도부 학생이,


" 오늘을 기념하여 고백하시죠. 예쁜 숙녀분."

이렇게 닧살그런 멘트를 날렸다. 나는 정림의 팔짱을 끼며,


" 야. 재들은 어디서 저렇게 넉살 좋은 멘트를 배운대?"

" 경원고야 우리 고장에서는 명문으로 소문났으니 이 지역 유지들이며 유명한 사람들은 다 이 학교 출신이잖아. 시인이며, 교수님이며 의사며 뭐 하다 하다 서울에도 이름 알만한 사람은 이곳 출신이 한둘이 아니라 잖아. 그러니 자부심이 대단한 거지. "


" 으. 징그러. 그래도 잰 좀 오버다. "

정림은 나름 흡족한 표정으로


" 뭐 난 좋기만 하던데? 나도 저런 로맨티시스트 남자 친구 있으면 좋기만 하겠다. "


그렇게 웃으며 전시장으로 들어왔다. 두리번거리며 구경을 하다 보니 어느새 정림이 사라졌고 어딘가 구경하다 오겠지 생각에 나는 그림 전시장을 천천히 보고 있는데 낯익은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두 손을 머리에 받쳐 들고 앞머리를 핀을 꼽아 올리고 비를 피하는 모습. 그 옆으로 바라보는 시선. 그 위에 올려진 돗자리. 어디서 많이 본모습인데. 닮은 듯 아닌 듯 어색하지만 정성과 공을 많이 들인 수채화.


비록 전문가 솜씨는 아니지만 떨어지는 빗방울이 살아있는 것처럼 느껴지듯 흐트러지고 생기 있는 그림. '어디서 봤더라. ' 나는 손에 쥔 색종이와 포스트잇을 들어 그 그림에 붙였다. 그리고 포스트잇에,


' 그림의 장면이 너무 인상적이에요. 아름다웠던 순간의 그 추억이 너무 생생히 전해지네요. 좋은 인연 되시길. M'

이렇게 메모를 남겼다.


"뭐 해? 올 너도 메시지 남겼구나? 뭐야. 왜 전화번호는 안 적었어?"

" 응? 그걸 왜 적어?"

" 그러라고 준거잖아. 아님 이름이라도 알아보게 남기던가. "

" 야 그런 게 어딨냐. 그냥 그야말로 감상평은 감상평인거지. "


" 정림아."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정림은 고개를 돌려 다시 그쪽으로 향했고 나는 잠시 그 자리에 머물다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 미소야."




경윤이 앞에서 나를 불렀다.

" 한참 찾았는데 겨우 찾았네. 구경 잘하고 있어?"

" 아 너 바쁠까 봐 연락 안 했는데 축제 준비로 바쁘지?"


" 아냐. 나야 뭐."

" 너 임원이잖아. "

" 괜찮아. 바쁜 건 거의 해결했어. 더 구경할래?"

" 아 안 그래도 천천히 구경 중이었어. "


" 걸을까?"

경윤은 손에 쥔 커피캔을 내게 건넸고 나는 두 손으로 꼭 쥔 채, 천천히 불빛을 따라 걸었다. 얼마 채 걷지도 않아, 무학여고 애들이 보였다.

" 경윤아. 한참 찾았잖아. 어 미소도 같이 있었네. "


" 어 왔어?"

경윤이 인사도 채 끝나지 않고 내가 손을 들고 인사를 하려고 하는데 마치 낚아채듯 경윤의 팔짱을 낀 채 무학여고 애들은 경윤을 데려갔다. 그러며 그 학교애들에게 경윤을 소개했다. 뒤에서 물끄러미 바라보고 서있자, 정림이 다가왔다.

" 미소야. 이쪽이야. 가자."

" 응?"

" 다들 기다려."




정림이 이끈 곳으로 향하니 동아리 회원들이 모여 있었고 우리는 그렇게 간단히 인사를 건넸다. 그간 못 봤던 3학년 선배들도 그날은 웬일인지 모두 모여 있었고 반갑게 인사를 하고 담소를 나눴다. 곧이어 방송에서

" 교내 모여 계신 내빈 여러분께 안내드립니다. 지금 곧 교내 합창대회가 진행될 예정이니 내빈께서는 자리에 착석하여 주시고 합창대회에 참여하는 학급에서는 대기실로 모여주시기 바랍니다."


방송과 함께 일사불란하게 주변은 정리가 되며 그 넓은 운동장을 가득 메운 인근 시민들과 학생들로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학교의 규모도 규모지만 지역의 명문답게 학교축제는 곧 지역의 축제였다. 학급별로 준비한 곡으로 단상에 오르며 가요부터 팝송, 가곡까지 다양한 곡들이 무대에 올랐고 운동장 끝자락이라 가물하게 보이지만 무대에는 반짝거리는 불빛과 함께 합창을 하는 아이들이 빛나고 있었다. 더없이 행복해 보였다.


" 정림아. 나 이제 그만 가야 해."

" 왜? 더 안 있고? 끝나고 애들 뒤풀이도 할 건데? 권익이가 오랜만에 얼굴 본다고 기다리라고 했는데 같이 가자고. 다들 아는 얼굴이래. "

" 난 이런 시끌벅적한 게 좀 낯설어. 집까지 멀기도 하고. 잘 놀다가. "


정림에게 인사를 하고 그렇게 돌아서 집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전화가 왔다. 경윤이었다.

" 벌써 간 거야? 이제 무대 끝났는데."

" 아 그게 집이 멀기도 하고 피곤해서."


" 아. 제대로 인사도 못했는데..."

" 담에 기회 되겠지. 마무리 잘하고 오늘 멋졌어. "


" 아 너도 봤어? 우리 반이 합창 1등 한 거?"

" 아 응. 축하해. "

" 고마워. 암튼 못 봐서 아쉽지만 잘 들어가. 또 연락할게."

" 응. 안녕."




사실 난 시상식을 보지 않았다. 이미 그전에 버스에 올랐다.


하지만 그렇게 좋아하며 말하는데 못 봤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다만 왠지 기분이 씁쓸하고 뭔가 허전하게 느껴졌다. 왠지 모를 그리움, 외로움. 불안함. 아쉬움. 이 숱한 감정들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걸까.


집에 와 생각해 보니 그곳에는 수많은 꿈들이 모여 있었다.


부모님, 선배들, 친구들. 무대를 만든 사람들, 전시를 만들고 준비한 사람들. 그 숱한 사람들이 만든 꿈 속에 그 간절함 속에 노력이 모여 오늘과 같은 멋진 하루가 만들어진 게 아닐까.

그 꿈 속에 온전히 들어가 순수한 마음으로 즐기기에는 나는 너무 준비된 게 없고 나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내년이면 고3이고 마음먹은대로 공부가 되는 것도 아니고 성적이 많이 오르지 않는 것은 왜 일까.


내게 시간은 어떻게 흐르고 있는 걸까.


같은 공간에 같은 시간을 쓰는데 왜 그토록 그들은 빛나고 멋진데 내 모습은 초라하고 못나 보일까. 책상에 앉아 이리저리 학습지를 뒤져 보다 문득 그 때 들었던 국어 선생님 말이 떠올랐다.


' 네 스스로 사랑해야 다른 사람에게 사랑받고 존중받는다.'

나를 사랑하라고? 어떻게? 어떻게 하면 나를 사랑할 수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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