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너 정말 엉뚱해. 한참 수능 준비해도 모자를 시간에... 데일 카네기가 뭐야. "
정림이 말했다.
도통 수험서가 눈에 들어오지 않던 나는 닥치는 대로 심리학에서 자기 계발서를 찾아 읽었고 어느새 그 없는 시간을 쪼개어 일주일에 책 두세 권은 훌쩍 읽어버렸다. 그렇게 만화방에 안 간 지도 한참, 가끔 멍 때리며 보던 TV도, 아침마다 돕던 집안 일도 뒤로 한 채 그렇게 하루하루를 차곡차곡 나를 만들어갔다.
그러다 어느새 내 손에 교과서가 들려 있었고 그 교과서를 3번은 반복해서 보고 또 봤다. 원래 한번 읽은 책은 다시는 읽지 않는 나인데, 머릿속에 줄하나 문장하나까지 남아 절대 다시 보지 않는 책인데 말이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보니 어느새 3학년이 되고 또 5월이 되어 있었다. 그사이 반도 바뀌고 절친이었던 정림은 다른 반이 되고 나는 1학년 때부터 같은 반이었던 신애와 짝이 되어 벌써 2달이 지났었다. 신애와는 통하는 게 많았다. 둘이 만화를 좋아했고 조금 엉뚱했고 서로 적당히 거리도 뒀다.
가끔 내가 잘 때면 알아서 담요도 덮어줬다. 어느새 익숙하게 짝에게 영어공부를 과외받고 수업에 집중하며 하루하루 시간을 버텨 꽤나 무더웠던 여름이었다. 희경이 전화가 왔다.
" 나 지금 서울 가는 버스 안이야."
" 뭐라고? 너 학교는?"
" 어제 자퇴했어."
" 야. 말도 없이."
" 그렇게 되었어. 서울에 이모네에 한동안 가게 돼서 아마도 거기서 검정고시 준비할 거야."
" 너 몇 달만 버티면 되는데 희경아."
" 곧 여름이잖아. 나 거기 있음 미칠지도 몰라. "
" 희경아."
" 알지? 나 미친년이잖아. 하고 싶은 거 하며 살잖아. 나 보러 올 거지?"
" 어딘지는 연락처는 알려주고 가 미친년아."
" 훗. 많이 컸네. 욕도 하고. "
" 미친년. "
한동안 잘 다니던 화실도 드문 불출하던 학교도 결국에는 그렇게 때려치우고 희경은 서울로 떠나버렸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는데 그 여름은 희경에게 가을이 다가올수록 견디기 힘든 계절이었나 보다.
희경이 떠나고 화실에 제일 늦게까지 남는 건 나와 현욱이었다.
밤마다 11시 반까지 남아서 그림을 그렸고 막차를 타고 집으로 향하는 일상이 반복되었다. 그런 나를 붙잡고 어머니는
" 네가 이렇게 공부를 했음 서울대를 가. 진작에 좀 하지. "
그렇게 말하셨다.
하지만 삶이란 어찌 아는가. 이것 또한 나의 운명인 것을. 늦은 밤 버스에 오를 때 제일 뒷자리에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너무 피곤에 찌들고 앉아서 공부만 해온 터라 살도 있는 대로 찐 터고 이런 상황에 누군가를 만나고 싶지 않은데 그래서 외면하려 드는 순간 누군가 나를 불렀다.
" 미소야. 오랜만이야. "
" 어. 안녕. "
" 야. 진짜 이렇게 볼 줄 몰랐네. 잘 지냈어?"
경수였다.
젠장. 하필. 그는 초등학교 동창이었다.
초등학교 때 한창 유행하던 영심이에 나오던 왕경태와 똑같이 얼굴에 주근깨투성이에 네모난 뿔테안경을 끼고 바가지 앞머리에 체크무늬 남방을 입었던 아이. 어느 날엔가 내게 편지를 주며 사귀자고 고백했던 아이. 나는 몇 번의 편지에도 답장을 안 하다 마지막에 긴 장문의 편지를 적어 보냈다.
결론은 나는 너에게 조금의 마음도 없고 우리는 너무 어리고 철이 없으니 네가 나중에 어른이 되어도 내게 마음이 남아 있다면 그때 보자고 정말 그 당시로는 멋들어지게 거절의 편지를 적어주었는데 경수는 꼴사납게 그 편지를 반 아이들에게 다 돌려 보여주었고 온 반 아이들이 내가 경수를 찼다고 놀려 대고 그 아이는 한참을 펑펑 울었었다. 그런 그 모습에 나는 내심 다행이다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런 그를 다시 그것도 몇 년 만에 버스에서 만나다니 그것도 이 꼴로.
경수는 그때와 달리 훤칠하게 키가 크고 제법 교복이 잘 어울리게 자랐다. 여전히 안경을 썼지만 가느다란 무테에 알도 얇아져 훨씬 보기 좋았다. 그런 그와 눈이 마주치자 나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그 순간 눈에 들어오는 내 발.
삼선 슬리퍼에 흰 양말 그위로 치마아래 한쪽은 겉어 올린 체육복바지에 그 위로 교복 스커트, 한참을 앉아 있어 잔뜩 구겨진 교복 조끼. 여름 더위에 풀어헤친 셔츠, 팔목 위로 잔뜩 올려 접은 소매, 잘 그려지지 않아 쥐어뜯어 헝클어진 머리, 그리고 더위에 송골송골 맺힌 땀. 어쩌면 이 늦은 시간에 그 많은 버스 안에 하필 누군가 아는 사람이 하필이면 나 좋다고 따라다녔던 놈이란 게 믿기지 않았다.
" 누구야? "
눈치 없는 현욱은 오늘도 여전히 물어본다.
" 아는 친구."
" 야 넌 친구가 다 남자야?"
그런 현욱을 나는 잠시 눈을 지그시 내려 깔고 바라봤다. 나와 눈높이가 같은 현욱은 눈을 아래로 깔고는
" 물론 나 같은 우아한 사람도 있지만. 몰랐네. 저렇게 범생이도 친군지."
" 현욱아. 아는 사이야?"
경수가 현욱이에게 말을 걸었다.
아뿔싸. 절대 서로 알면 알 될 인간들이 아는 사이야?
" 응 절친인데. 너도 미소 알아?"
" 응 동창이야. "
" 이야. 이런 우연이. "
그러고 보니 둘이 교복이 같구나. 미쳐. 내가 깜박하고 있었다. 현욱이 워낙 존재감 없는 아이라 경원고 다닌다는 사실을. 하지만 14반이나 되는 학급에 같은 반이 될 리가... 있긴 하구나.
" 미소야. 어떻게 지냈어?"
" 잘 지냈지. 근데 너 아는 척 안 했으면 좋겠는데?"
내 말에 당황한 경수가 동그란 눈을 뜨고 바라봤다. 그리고 나는 경수옆에 앉아 전부터 상황을 지켜보며 팔짱을 끼고 있던 무학여고 여학생을 턱으로 가리켰다.
" 아 얘. 인사해. 인사가 늦었지? 내 여자친구..."
" 나 간다. "
그 길로 나는 버스에서 내렸다. 얼결에 현욱도 버스에서 따라 내렸다.
" 야 너 막찬데 왜 내려."
" 그거야. 네가 내리니까. 얼결에 내가 잘못한 줄 알고 놀라서..."
" 네가 잘못한 게 뭐 있어. 그냥 난 뭐 쪽팔려서 내린 건데."
" 야. 천하의 미소가 쪽팔림도 알아?"
" 나도 몰랐는데 그릴 때도 있네? 근데 넌 경수랑 어떻게 아는 사이야?"
" 아 1학년 때 같은 반. 근데 신기하네. 내 이름을 기억하네. 한 번도 말도 건 적 없는데."
" 그래? 그럼 앞으로도 말 걸지 마. 아는 척하면 죽여버릴 거야."
" 올 미소 오늘 무섭다. 살다 살다 이런 날이 올 줄이야. 꺄르르르르"
" 웃지 마. "
" 내일 학교 가면 물어봐야지. 너 초등학교 때 어땠는지."
" 너 이리 와. 혼난다."
꿈 많고 뭐든 하면 이쁘던 그 시절.
뭐든 하면 제일 잘하던 시절. 그때는 그랬다. 초등학교시절은 뭐든 남들보다 뛰어나 소리를 듣고 뭐든 잘한다고 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부러움을 한 몸에 샀고 그런 현실과 달리 나는 집에서는 구박덩어리였다. 그래서 더 열심히 학교 생활을 하고 더 잘하려 잘 보이려 애를 썼다. 그래서 예뻐 보였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시간이 지나도 그때와 지금과 다를 바가 없는데 뭐든 열심히 하고 최선을 다하고 뭐든 진심으로 하려 하는데 말이다. 세상은 참 뜻대로 되지 않는다.
그건 아마도 좋은 날이 아직 안 와서겠지? 오고는 있는 거겠지?
무덥던 한 여름도 잠시 어느새 낙엽이 지는 가을이 지나 제법 쌀쌀한 바람이 부는 겨울이 왔고 우리는 수능이 코앞에 다다랐다.
2주 가까이를 수능준비로 화실을 찾지 않다가 막바지 수능 전전날 화실 근처 독서실에서 공부를 하다 나는 벌떡 일어나 화실로 향했다. 그리고는 미친 듯 그림을 그렸다. 다행히 손이 아직 굳지는 않았다. 그림을 하루도 빠지지 않고 그리다 보면 하루라도 그림을 그리지 않으면 손의 감각이 떨어져 그림 실력이 뒤쳐짐을 나날이 느끼는 날이 온다. 미세한 선의 움직임, 연필의 사각거림, 눈의 각도가, 1mm의 오차가 생기는 그 순간은 슬럼프가 오기 마련이다.
하지만 간간히 스트레스가 쌓일 때마다 나는 어김없이 화실로 달려가 그림을 그렸다. 습관처럼 베인 것들은 몸의 감각을 순식간에 깨우기 마련이다. 그런 긴장감을 넘어가다 보면 자연히 시험에 대한 공포도 눈 녹듯 사라졌다. 할 수 있다. 아자.
성적표를 받아 들자 다들 놀란 눈치였다.
그도 그럴 것이 공부한답시고 한 달에서 많게는 두 달을 쉬었던 아이들의 성적은 떨어졌는데 되려 거의 시험직전까지 나왔던 나는 성적이 눈에 띄게 올랐다. 학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원장선생님은 실기 성적도 잘 나오고 수능성적도 잘 나왔다며 엄청 좋아하셨다. 그리고 나와 몇몇 아이들은 바로 서울에 있는 연계된 미술학원으로 실기 준비를 하러 갔다.
막상 서울로 상경하여 보니 그곳 학생들의 실력은 만만치 않았다.
화실에서 탑순위에 속하던 내 실력은 거기서 중 상위권에 속했고 성적은 거의 내가 희망하는 1 지망의 턱걸이 수준이었다.
내가 원하는 곳에 가려면 나는 반드시 실기 시험에서 최상위 성적을 받아야 했다. 그곳에서 2달을 정신없이 보내며, 나는 1 지망과 2 지망을 시험을 쳤고 3 지망은 집 근처 대학으로 적었다. 형편이 어려워 모두 국립대로 적고 1 지망만 사립대를 적었는데 그곳은 경쟁이 제일 치열한 우리나라에서 제일 잘 나가던 미대였다.
몇 층의 건물마다 들어선 실기실에서 실기시험을 치르는데 확률로 따지면 그 건물의 전체 중에 내가 5명에 속해야 붙을 수 있었다. 하지만 내 성적은 그 정도가 되지 못했다. 집에 돌아와 발표를 기다리는데 2 지망이 붙었다고 연락이 왔다. 서울에 위치한 국립대였다.
하지만 나는 또다시 좌절했다.
" 미소야. 네가 올라가도 방을 구할 돈도 없고 너 거기 지금 기숙사도 조건이 안돼서 넌 못 들어간대. 알아보니. 곧 있음 네 동생 서울에 학교도 가야 하는데 둘이나 어떻게 서울에 학교를 보내. 그냥. 너 어차피 전액 장학금이니 그냥 엄마 옆에서 다니자. "
"....."
평소와 달리는 나는 아무 말 없이 정말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토록 미친 듯 공부를 한 것도 그토록 미친 듯 애를 쓴 것도 결국에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내게 희망이란 없는 것인가. 한동안 방구석에 틀어박혀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