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드득후드득'
창밖으로 빗소리가 거세지고 있었다. 요란스레 신입생 환영회를 하고 몇 주 지난 뒤, 선배는 내게 숙제를 내주었다. '4.19를 맞이하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세대'.
" 이거 너 꼭 해야 해. 대학 내 단대별로 새내기 전부 발표하니까 빠지면 안 된다고. 알겠지? 잘하든 못하든 상관은 없는데 안 하면 진짜 안돼. 알았지?"
막상 알겠다고 대답은 했지만, 대학을 들어오며 한동안 책은 집어던진 터라 머릿속이 하얗게 바뀌어 있었다. 고등학교 때 배운 역사와 대학에 와서 책을 읽고 또 학생회 활동을 하며 배운 역사는 너무나 차이가 났다. 그래서 한동안 관련 서적을 도서관에 드나들며 열심히 찾아봤지만 도통 감이 오지 않았다. 그래서 그날도 그렇게 멍 때리며 도서관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아 내리는 비를 바라보고 있었다.
' 서두를 뭐로 잡지?'
그때 내 얼굴 앞으로 얼굴하나가 쓱하고 들어온다. 영석이었다. 그는 맞은편 의자에 앉아 몸을 쭈욱 뺀 채로 내 얼굴에 얼굴을 바짝 가져다 대놓고 내 귀에 손가락을 '탁'하고 튕기며,
" 매직 썬"
이렇게 외쳤다.
내가 놀란 토끼 눈으로 바라보자, 그가 내 앞에 있는 책을 주섬 주섬 모으더니 고개를 옆으로 까닥이며 나오라고 했다. 나는 종종걸음으로 밖으로 나왔고 복도는 소란 스레 내리는 빗소리가 안 들릴 만큼 더 시끄럽게 웅성거리고 있었다.
" 뭘 그렇게 고민까지 하고 그래. 새내기답게 쓰면 되지. "
" 아직 한 줄도 못 적었어요. 내일 발표인데."
" 가자. 앉아 있는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니야. "
" 가긴 어딜 가요. 마음의 짐이 한 짐인데."
" 나가재도?"
급기야 버티는 내 손을 잡아 이끌고는 그는 도서관 4층을 내려와 구내식당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라면 식권을 주며,
" 먹어야 버틴다? 비 올 때는 라면이지. "
이렇게 말하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때,
" 너도 라면 먹으려고?"
경윤이었다. 참 같은 학교 다닌 지 한 달이 다되어 가는데 이렇게 밥 먹으러 구내식당에 와야 만나는 사이라니 우리도 참.
" 너도? 오랜만이네. 살아 있네?"
곁에 선 선배를 전혀 의식하지도 못한 듯 그는 반가운 얼굴로 내게 웃으며,
" 신입생 환영회한다고 많이 바빴나 봐? 연락도 없고?"
" 넌 손도 없냐? 같은 학교 왔으면 네가 이 누님한테 먼저 연락해야지. 응?"
" 피식"
" 음. 미소야. 창가로 갈까? 저기가 전망 좋은데."
옆에서 영석선배가 말하자 그제야 선배가 있었다는 사실이 기억이 났다. 급히
" 아 선배, 여기 전에 봤던 경윤이 기억나죠?"
" 안녕하세요. 선배님"
" 응. 잘 지냈어? 못 보던 새에 얼굴이 피폐해졌네? 술독인가? 가자. 미소야. "
선배는 짓궂은 농담을 건네고는 내 팔을 이끌고 창가 자리로 갔다. 그러자, 경윤이 옆으로 따라와,
" 혼자 왔는데 같이 먹어도 되지?"
나는 선배를 바라보며,
" 괜찮죠?"
" 응. 뭐 나야 상관없어. "
" 경윤아. 니네과 어때? 분위기 좋아? 좀 괜찮은 애들 없어?"
" 소개팅하게?"
" 아니 나 말고. "
" 그럼?"
" 너 말이야. 너 군대 가기 전에 여자 친구 사귀어 보고 가야지. 순수한 마음이 남아 있을 때. "
내가 이렇게 말하자 경윤이 라면을 들다 멈칫하더니 나를 빤히 쳐다봤다. 그리고
"풉"
하고 웃고는
" 사실 나 좋아하는 애 생겼어. "
" 어떤 앤 데? 이뻐?"
" 우리 과 퀸카야. 엄청 이뻐. 몸매도 죽여줘. "
고개를 숙여 라면을 먹으며 담담히 이렇게 말했다. 그런 경윤을 바라보다 내가
" 아무튼 남자들이란 야 사람은 자고로 그 사람의 내면의 아름다움을 봐야지. 이쁜 게 뭐 대수라고."
평소면 이렇게 말하지는 않지만 그날따라 내 대답이 좀 이상하긴 했다. 그러다 문득 경윤을 보니 경윤은 먹던 라면을 멈춘 채 어디론가 빤히 쳐다보고 있었고 그런 그의 시선을 따라 가자, 한 여학생이 눈에 들어왔다.
165cm 정도의 키. 단발 파마에 외이브진 앞머리, 귀옆으로 살짝 넘긴 옆머리에 가늘게 찢어진 눈. 오뚝 솟은 콧날 따라 날렵하게 올라선 턱선, 가늘고 길게 내려오는 목선, 얇은 팔뚝을 따라 비에 젖어 약간은 비치듯 보이는 흰 블라우스, 그 안에 받쳐 입은 둥근 라운드 티, 큰 골반 선이 잘 드러나는 골반청바지. 식판을 받쳐 들고 홀 중앙으로 친구들과 이야기하며 종종걸음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 순간.
" 재야?"
나는 잽싸게 물었고, 경윤은 나를 보지도 않고 시선을 고정한 채,
" 응. 예쁘지? 나 우리 과 애들이랑 먹으러 간다. 담에 봐. "
라고 말하며 급히 식판을 들고 그곳으로 향했다. 단 두 젓가락을 남긴 라면을 들고 말이다. 이 황당함은 뭐지?
" 예쁘네. 반할 만 해."
전혀 보는 것 같지 않던 선배는 무심한 듯 툭 내뱉었다.
" 헐 어딜 봐서요? "
" 안 보여? 딱 봐도 남자들이 좋아하는 몸매이잖아?"
" 아니 몸매가 그 사람을 대변하는 건 아니잖아요."
" 할 수도 있지. 남자는 이성에 움직이는 동물인데 본능적으로 끌리는 걸 어떻게 막아?"
" 본성이겠죠."
" 머 암튼. 본성이나, 이성이나 그게 그거지 꼴리는 대로 움직이는 거지."
나는 선배를 째려봤다.
" 라면 다 분다. 어서 먹어. 오늘따라 라면이 왜 이렇게 맛이 없냐. 에잇 입만 배렸네."
다시 도서관으로 향해 천천히 걸어가다 하늘을 보니 거칠게 내리던 빗방울이 슬슬 줄어 들어 있었다.
나는 펼쳤던 우산을 접고 걷기 시작했다. 한 손에는 우산을 들고 한 손에는 빗방울을 받으며. 묘한 이 기분. 이 이상 야릇한 느낌. 감정이 없는데 감정이 있는 것도 같고 그렇다고 싫지도 않고 화도 나지 않고 그렇다고 신경이 쓰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고 그렇다고 경윤만 생각이 나면 모르지만 토라져 돌아가는 선배의 뒷모습도 계속 신경이 쓰였다. 이 감정들은 도대체 정체가 뭐지?
도서관 책상에 앉아한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나도 모르게 볼펜을 딸깍 딸깍 거리며 멍 때리고 있었다.
그러자, 불쑥 내 앞으로 손가락이 보이며 탁자를 탁탁 두드리고 있었다. 고개를 드니 맞은편 안경을 쓰고 열심히 공부하던 남학생이 거들떠도 보지 않고 열심히 공부를 하고 있었다.
아 내가 볼펜을 딱딱 거려 신경이 쓰였구나. 괜스레 미안해졌다. 그래서 이번에는 나름 다시 주제로 돌아가 고민을 하며 잡생각을 않기 위해 다시 한 손으로 입을 막고 턱을 괜 채 한 손은 허벅지에 가져다 댔다. 다른 짓 못하도록. 그러자 또다시 누군가 책상 위를 탁탁 두드렸다.
이번에는 안 두드렸는데 우 씨. 살짝 눈을 부라리며 앞을 째려보자, 윙크를 했다. 나는 반사적으로 탁자에 두 손을 올리며 앞으로 얼굴을 쭉 빼고는 조용히 얼굴을 들여다보며 속삭였다.
" 누구... 세요?"
황당한 표정의 그는 안경을 한 손가락으로 올리며,
" 정말 몰라서 물어? 나 사대학회장"
" 아! 그!"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소리를 크게 내자 급히 그가 몸을 날려 내 입을 가렸다. 그리고는
" 조용히 해. 도서관이야. 커피?"
그렇게 말하고는 그는 찡긋 웃어 보이고는 밖으로 나갔다.
" 여긴 어쩐 일이에요?"
" 어쩐 일이긴 자리 잡고 보니 네가 오던데?"
" 제가 먼저 왔는데요?"
" 그래? 뭐 그렇다 치자. 근데 무슨 생각을 그리하길래 사람을 앞에 두고도 못 알아봐?"
" 아 제가 뭔가 몰두하면 좀 그래요. "
" 뭐 숨겨둔 애인이라도 생각해?"
" 왜 남자들은 멍 때리면 다 남자생각하는 줄 알지?"
" 아니면 말고. 밥은?"
" 먹었죠. 시간이 몇 신데."
" 난 안 물어봐?"
" 드셨겠죠 시간이 몇 신데."
" 너 화법이 정말 독특해. 내가 국문과를 복수 전공하는데 말이야."
" 아 되꼬, 저 선배 선배과에서 내일 발표한다는 애 발표 내용 다 적었어요?"
" 당연히 다 적었지. 내가 검수까지 완료했는데 그건 왜?"
" 아 아뇨. 그냥 궁금해서요. "
" 왜 커닝이라도 하게?"
" 커닝할게 뭐 있어요. 어차피 자기 의견 적는 건데."
" 그야 그렇지. 그렇기는 한데 우리 사학과가 또 한 문장에 한 필력 하잖아. 너 내일 듣고 울지 마라. "
" 부럽네. 부러워. 검수해 주는 선배도 있고. 누구는 그냥 대강 써서 발표만 꼭 하라는데. 아직 첫 문장도 못 적었는데."
" 아 그럼 그거 고민한 거였어? 쳇. 난 또. 그까짓 게 뭐라고. 그렇게 공을 들여. 그냥 한 3~5분 쪽 팔면 끝인데."
" 선배는 참 알다가도 모르겠어요. 뭔가 복잡해 보이는데 의외로 단순하네요. "
" 뭐가 복잡해? 보면 몰라? 딱 답이 나오잖아. 이렇게. 나 관심 있음."
" 네?"
" 못 들었어?"
" 뭘요?"
" 다시 말해줘? 나 관심 있음. 너한테. "
" 뭐래. 선배는"
나는 그냥 농담처럼 생각하고 가볍게 웃으며 다시 도서관으로 들어왔다. 그리고는 그 길로 가방을 싸서 바로 미술대 학생회로 갔다.
오락가락하던 비는 그칠 줄을 몰랐다. 비를 피해 들어선 공대 대 회의실은 제법 규모가 크고 넓었고 제발 안 왔으면 좋겠다는 내 바람과 달리 좌석은 거의 다 차 있었다.
' 아니 토요일 오전에 9시인데 특강 잡힌 것도 아닌데, 주말인데 놀러도 안가나? 웬 학생회 활동하는 애들이 이렇게나 많아. 쪽 팔리게. '
발표도 안 했는데 벌써부터 쪽이 팔려왔다. 떨지 말자. 떨지 말자.
" 다들 모였으면 주제 발표 하겠습니다. 학생회 여러분들은 곧 식이 거행될 예정이니 자리에 착석해 주십시오."
그냥 동아리나 강의처럼 빙 둘러앉아 간단하게 발표만 하는 자리인 줄 알았다.
그렇게 간단한 자리인 줄 알고 정말 고민고민하다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정말 솔직한 심정으로 그 숱하게 본 수많은 4.19 관련 자료며 내용들은 참고자료로 넣지도 않은 채 그냥 편지처럼 달랑 A4 한 장을 적어왔다.
그런데 그런 나와 달리 다른 단대 학생들은 컴퓨터에 노트북에 장비를 챙겨 준비를 해왔던 것이다.
시간이 지나고 슬라이드가 내려오고 영상자료가 올라오고 배경음악이 막 깔리고 4.19 관련 내가 보았던 그 많은 아픈 자료들이 화면에 다양한 효과들과 최첨단 프로그램들로 장식되어 가고 있을 때 내 몸은, 내 사지는 사시나무가 되어 덜덜 덜 덜덜 떨려왔다. 아 나 진짜 어디 가도 무얼 해도 좀처럼 안 떠는 사람인데. 그런 내가 왜 이런담.
이때, 부들부들 떨며 주먹을 움켜쥔 내 손등을 포근히 감싸 쥐는 큰 손. 짧고 뭉툭한 엄지손가락에 길고 마디가 두드러진 손. 영석 선배였다. 선배는 특유의 여유로운 포근 한 미소로 빙긋 웃어 보이며,
" 많이 기다렸지? 어제 내가 술을 좀... 잘할 수 있어. 나만 보고 하면 되지. 다른 사람 볼 필요 없잖아. "
선배 얼굴을 보자 갑자기 왈칵 눈물이 쏟아질 듯 눈가에 눈물이 맺쳤다. 아 읽기도 전에 이럼 안되는데 절대 감정적으로 읽으면 안 되는데. 그냥 담담히 읽어야 하는데...
그런 나를 본 선배는 머리를 옆으로 쓱 넘기며, 주먹을 불끈 쥐고는 '힘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 80년 4년 19일. 광주.
우리는 광주 민주항쟁이라 부릅니다. 저는 그때 태어나지도 않아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도 모르죠.
단지 역사시간 책을 통해 배운 내용으로는 민주항쟁이 일어났다는 정도였고 그 후, 조금 더 알아본 내용으로 잘못된 정권의 계략으로 광주에서 무장 군인들이 무자비하고 잔인하게 외부와는 철저히 고립시킨 채 그렇게 수많은 시민과 학생들을 폭도세력으로 내몰아 학살을 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수많은 광주시민들은 집과 삶의 터전을 잃고 가족과 이웃, 친지를 잃은 채 20년이 다 된 지금까지도 깊은 상처를 가슴에 품은 채 이 시대를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최근 대학에 와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철저히 언론이 통제되고 민주주의의 정의가 외면되었을 때 우리 시민들이 어떻게 깊은 아픔을 겪는지 광주 민주항쟁이라는 역사가 그것을 증명해 주었습니다.
미안하고 또 고맙게도 그들의 희생 덕분에 우리는 지금 이 풍요로운 환경에서 자유롭게 대학도 다니고 직장도 다니고 원하는 것들을 누리며 삶을 영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이곳 대학에 오지 않았다면, 만약 제가 아직도 그때의 광주에 대한 내용을 알지 못하거나, 과거의 광주 민주항쟁이 없었다면 지금 우리의 평화로운 일상은 지속될 수 있었을까요?
저는 반문해 보았습니다.
과연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나는, 우리 세대는 역사의 과업으로 기록된 그들의 희생과 그들이 물려준 유산을 위해 그들이 준비한 미래를 위해 무엇을 하고 또 할 수 있는지.
그래서 저 나름은 광주항쟁에 대하여 조사도 해보고 역사공부도 해보고 제 자리에서 열심히 생활도 해보았습니다. 제 삶을 열심히 살아가고 주어진 일을 하는 것이 진정 남겨진 이 세대의 역할일지요.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삶은 그리 단순하지만 않았습니다.
학생회 가입을 권유받을 때 누군가 제게 말했습니다. 제가 태어나 자라며 보고 느낀 것만이 진리고 전부가 아니며 세상은 그 이상의 것을 느끼고 보고 듣고 경험해야 보인다고요. 그리고 그 기회가 학생회에 있다고요.
그래서 저는 학생회활동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도 잘 압니다. 저는 아직도 잘 모르고 많이 부족하다는 것을요.
하지만 역사란 이런 우리의 젊음이 모이고 올바른 역사관이 모이고 그런 우리의 생각이 모여 새로운 역사를 이루고 민주주의를 위해 달려가고 쟁취해 갈 때 진정 밝은 미래가 온다는 것을요. 그렇기에 이 시간이 이 자리가 아깝지 않고 오늘의 삶이 보람됨을요. 그리고 이런 자리를 마련해 주시고 함께 해주는 여기 모인 수많은 학생회 여러분이 큰 힘이 되고 많은 응원이 된다는 것을요. 감사합니다. "
발표를 끝냈을 때,
나도 모르게 울컥하는 감정이 들었다. 고요한 정적이 일시적으로 주변을 감돌다, 어디선가 터진 박수소리는 삽시간에 높은 천장을 타고 벽면을 울리며 온 회의장으로 울려 퍼졌다. 갑자기 가슴에 통증이 찾아왔다. 나는 가슴을 움켜주고 몸을 구부린 채 뒤로 나갔고,
" 예술대 새내기 이미소학생의 발표문이었습니다. 정말 감동적이네요. 우리 다시 한번 큰 박수 부탁드립니다."
등뒤로 사회자의 멘트에 문 앞까지 이어지며 따라오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복도를 내달려 출구로 향했다.
"쏴아아 아"
시원하게 내리는 빗줄기는 그간 고민하던 머릿 속을 시원하게 씻어주듯 그렇게 쏟아지고 있었다.
" 잘 들었어. "
깜짝 놀라 돌아보니 옆에서 따뜻한 커피를 건넨 건 선배가 아닌 경윤이었다.
" 어떻게 네가 거기에..."
" 아 연구실에서 어제 날 샜었거든. 소란스럽길래 보니 마침 네가 단상에 올라가더라고. 너한테 이런 면이 있었구나."
순간 부끄러웠다.
나는 진정 내가 말한 것과 같은 삶을 살고 있는 것이긴 한 건가? 말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또다시 머릿속이 복잡해 지려하고 있었다. 그때, 경윤은 손을 쓱 들어 내 머리 위로 올렸다.
" 다 젖겠다. 감기 걸려. 넌 비를 너무 좋아해. "
나는 고개를 숙이고 들 수 없었다.
그가 내가 비를 좋아하는 건 어떻게 알았는지 내가 비만 오면 맞고 다녔는지 어떻게 알고 있는지 물을 길이 없었지만 왠지 그는 알고 있는 것만 같아서 내 마음을 이해하는 그가 신기해서 마치 내 마음을 들킨 것만 같아서 붉어진 얼굴마저 들킬 수는 없었다.
회의실 문 앞에서 그렇게 경윤과 서 있는 나를 본 선배는 한참을 경윤이 들어갈 때까지 바라보다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 두 팔을 뻗어 내 어깨를 움켜쥐고는
" 네가 해낼 줄 알았어. 최고다. "
이렇게 말하며 나를 흔들어 댔다.
" 선배 그만. 저 너무 흔들어서 어지러워요. "
" 자 이제 슬슬 무릉도원으로 가볼까?"
" 오늘 같은 날도 해요?"
" 그럼. 얼마나 운치 있는데."
회의실로 들어가 마지막 발표가 끝나는 걸 본 뒤, 사회대학회장과 셋이 무원으로 향했다. 비닐하우스 안에서 듣는 빗방울 소리는 마치 음악소리처럼 느껴졌다.
퐁퐁퐁퐁.
" 짠~~"
" 저 근데 왜 명민선배는 새내기랑 같이 안 왔어요?"
" 아 오늘 갑자기 배가 아파서 못 오겠다고 연락이 와서."
" 그래서 아까 명민선배가 발표한 거예요?"
내 질문에 답 대신 막걸리를 한사발 들이 킨 명민선배는,
" 영석아. 내가 진짜 웬만하면 이런 말 안 하려고 했는데 말이야. 정말 안 하려고 했는데 우리 바꾸자."
" 뭘?"
" 새내기 체인지"
이렇게 말하며 명민선배는 나를 슬며시 자신의 옆으로 끌어당겼고, 나는 그 손을 뿌리치며 막걸리잔을 들었다. 그러자 영석이 어이없다는 듯,
" 지랄하네. 안돼. "
그렇게 말하며 나를 영석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내 손에 마시려 손에 들고 있던 막걸리 잔이 출렁였고 때마침 입었던 흰 블라우스 위에 쏟아져 내렸다. 하필이면 가슴골 사이로 선명한 얼룩을 남긴 채.
순간 술잔을 들고 있던 명민은 '풉'하며 입안의 막걸리를 뿜어냈고 그런 명민을 본 영석은
" 내 거다. 접근 금지다. "
그러면서 내 몸을 비튼 뒤 급하게 위에 입고 있던 야구 점퍼를 내 위로 덮었다. 그러면서
" 조심 좀 하지."
" 휴. 도대체 이 사단을 만든게 누군데 그러시는지 원. 선배도 접근 금지라고 했죠?"
이렇게 말하며 나는 먹다만 막걸리를 시원하게 들이켜고는 한손으로 머리카락을 잡은 채 고개를 숙여 칼국수를 먹기 시작했다. 그러자, 영석이
" 야 너 옷 흘러내려. 조심하래도. 그러다 찌찌 보인다. "
이렇게 말하며 내게 주었던 야구점퍼 팔을 뒤로 둘러 등뒤에 묶어버렸다.
" 어이없네. 찌찌가 뭐야. 초등학생도 아니고. "
한치의 동요도 없이 칼국수를 먹는 나와 달리 둘은 젓가락을 휘이휘이 저으며 있더니,
" 에라 먹고 죽자. "
이렇게 말하고는 막걸리를 연신 들이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