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moonrightsea Jun 1. 2023
" 여보세요? 선배?"
" 아음. 헤헤.. 우리 귀여운 새내기.. 헤헤... 딸꾹. "
" 뭐예요? 술 마셨어요? 어딘데요?"
" 딸꾹 헤헤 아 ㄴ이ㅏㅎ히ㅏ히니... 회장단 술자리인데.. 딸꾹 여기가 보자 포장마차네. 보고 싶다. 뚝."
또 술 먹고 전화다. 한동안 술만 먹으면 전화였다. 잠깐 망설였을까. 아니면 머릿속에 복잡하게 드는 내일 일정이 걱정이 되기는 한 것일까. 나는 도대체 무슨 마음으로 그 자리에 간 것일까.
" 안... 녕하세요?"
" 아 왔다. 왔져.... 이리 와. 이리 와. 여기 여기 앉아. 우리 이쁜 새내기."
도로변 하천을 따라 이어진 길가에 제법 크게 지어진 포장마차에 들어서자, 테이블 위에 쓰러져 있던 영석은 벌떡 일어나 내게 달려와 와락 안았다. 그리고 등을 두드리고는 내 손목을 이끌며 자신의 옆자리로 데려가 나를 앉혔다.
" 오 이 친구가 새로 왔다던 자네가 이뻐한다던 친구인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테이블을 둘러앉은 사람들의 연령대는 다양했다.
1학년부터 30대 초입에 이르는 대학 4학년 학생회 선후배들. 오가며 인사를 나눴던 총학생회와 간부 몇 명, 그리고 못 보던 나이가 좀 있어 보이는 40대, 50대 중년의 남자들 4명, 10여 명이 둘러 앉은자리에 다들 몇 차에 걸쳐 이어진 술자린지는 알 수 없었지만 술이 취할 대로 취해 저마다 몸을 못 가누고 옆자리에 기댄 사람, 선배 무릎을 베고 자는 후배, 포장마차 밖에서 막 토를 하고 등을 두드려주다 같이 토를 하고 들어오는 사람. 그 옆에 다리 하천가로 가서 노상방뇨를 하는 사람.
그 와중에도 삐뚤어진 입에 연신 짠 거리며 술잔을 연거푸 털어 넣는 사람들까지.
술 취한 그들의 모습은 평소와 달리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냥 개판이었다. 뭐 술 마신 사람 정도가 아니라 술이 사람을 마신 다음의 모습이 아름다울 리 만무하니까. 그런데 유독 그 자리에 눈에 띄는 사람이 있었다.
문주.
그녀는 취한 듯 아닌 듯 알 수 없는 눈빛으로 화장실을 오가며 비틀거렸다가 또 아닌 듯했다가 하며 그렇게 영석과 두세 자리 떨어진 맞은편에서 초점이 풀린 채 그렇게 영석을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그런 그녀가 포장마차에 들어오는 나를 보며, 그 후 선배의 친근한 반응을 보며 더 놀라는 눈치였다. 때마침 지혜언니가 입을 틀어막고 포장마차밖으로 나갔고 나는 그런 언니를 따라 나왔다. 그러자, 문주가 따라 나왔다. 조금 비틀거리는 문주. 문주가 내게 말했다.
" 늦은 시각인데 진짜 왔네?"
지혜언니는 속이 안 좋은지 더 이상 나올 것도 없는데도 연신 우웩거렸고 그런 언니 등을 내가 두드렸다. 그러자, 옆에 문주가 와서는 언니의 머리를 쓱 귀 뒤로 올리며 말했다.
" 아. 전화해서. 넌 어쩐 일이야? 여기?"
" 아 영석선배가 같이 술 한잔 하자고 해서. 아는 사람들도 있고. "
" 학생회 멤버랑?"
" 응 작은 오빠가 대학 1학년때 총학생회였거든. 그래서 대학 오기 전부터 여기 있는 분들 우리 집에도 와서 자주 한잔하고 해서 잘 알아."
개강을 하고 줄곧 그녀는 수업이 빌 때면 온 학교에 나를 찾아다녔다. 학생회 실에 있거나 도서관에 있거나 실기실에 있을 때면 어김없이 그녀는 나타났다. 그리고는
" 여깄네. 안녕. 헤헤. 한참 찾았잖아. 근데 영석 선배는 어딨 어?"
시작은 내 안부지만 그녀의 목적은 영석선배의 안부였다. 학생회 일로 영석선배가 늘 붙어다니다 보니
" 오늘은 영석 선배 언제 만나?"
그렇게 내게 그의 안부를 묻거나 내 일정에 끼어 자리를 차지하고는 했다.
내가 경계하는 게 느껴질 만도 한데 아랑곳 않고 전혀 부담스러워하지 않고 항상 그렇게 아무렇지 않은 듯 친근하게 다가와 먼저 인사를 건네고는 내가 외로울까 봐 나를 챙겨야 한다고 말하며 나를 끌고 다녔다. 혼자 다니길 좋아하는 나는 그런 그녀의 이끌림에 이끌려 신입생 환영회 이후로 몇 번이나 그렇게 동기들 모임에 나갔고 그때마다 매번 그 자리에서 마치 추궁을 당하듯 이어진 이야기는 영석의 이야기였다.
" 말해봐. 영석 선배 애인 있어?"
" 사적인 건 제가 안 물어봐서 모르죠. "
" 아 왜. 만나는 여자나 전화하는 여자가 있을지도 모르잖아. 응?"
" 이상형이 어떻게 된데?"
" 선배는 선물 뭐 좋아한대?"
학생회 활동을 하며 저런 내용을 물어본 적도 관심을 가져 본 적도 없었기에 나를 앉혀 두고 그저 그런 질문을 퍼부어 대는 동기들도 그런 나를 데려가 물어보는 문주도 못마땅하기는 마찬가지였다.
" 왜 저한테 그래요. 궁금한 건 직접 물어보세요."
그럴 때면 넉살 좋게 문주는 내 팔짱을 끼며 다른 동기들에게 윙크를 날렸다. 그렇게 질문이 잦아들면,
" 야. 왜 화를 내고 그래. 물어볼 수도 있지. "
" 휴. 누가 선배 좋아하기라도 하는 거야?"
저돌적이고 직설적으로 내가 묻자,
쭈뼛, 쭈뼛 하나 둘 손을 들거나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는 사람이 족히 3~4명은 되었다.
" 아니 무슨 연예인도 아니고... "
" 야 그러지 말고 좀 말해줘. 같이 있을 때 주로 뭐 해? 무슨 이야기해?"
나는 그런 자리가 더더욱 불편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 서로에 대한 관심도 아니고 그렇다고 나에 대한 관심도 어떠한 애정도 없는 인간들이 단지 선배를 향한 호기심과 가십거리 그에 대한 관심으로 그렇게 나를 괴롭히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나는 그들의 호기심을 자극해 학생회에 데려올 수도 그들의 마음을 돌려 사상교육을 하려들 수도 있었을 것이다. 사상 교육이라야 봤자, 자신을 사랑하고 자아를 갖자 뭐 이딴 것이겠지만 적어도 남자에 목메어 그에게 잘 보이기 위해 하루종일 그가 다니는 길목을 지키고 그가 무슨 음악을 듣고 어떤 음식을 먹고 어디를 가는지 관심을 가지며 술을 먹고 그의 자취방 앞에 찾아 난동을 부리고 하는 일은 없도록 말이다.
그것도 일방적으로.
불편한 자리를 피하고자 화장실에 들어섰을 때, 세 면가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 미소 재수 없어. 맨날 왕따처럼 혼자 다녀서 착한 문주가 신경 써서 그렇게 챙겨주는데 그깟 선배 이야기 좀 해주면 어때. 그렇게 도도하게 구냐?"
" 걔 선배 좋아하는 거 아냐?"
" 그런 거면 벌써 소문 낫겠지. "
" 하긴 선배 눈이 얼마나 높은 데 그런 애랑 사귀겠어. 문주면 몰라도. "
" 맞아. 맨날 작업복에 앞치마에. 미대 망신은 다 시키고 다니지. 좀 우아하게 하고 다니면 어디 덧나?"
" 재수 없어. 고고한 척은 혼자 다하고."
자리로 돌아온 나는 문주에게 말했다.
" 문주야. 난 이런 자리 불편해. 학생회에 관심이 있거나 적어도 친구로서 동기로써 내게 관심을 가지고 나를 부르는 거면 얼마든지 올 수 있어. 100번이라도. 근데 적어도 이런 일로 나를 부르는 건 아닌 거 같아. "
그렇게 말하고 한동안 그녀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만난 건 포장마차.
" 여.. 여기 있던 우리 미소 못 봤어? 어디 갔지?"
안에서 영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급히 포장마차 안으로 목을 넣고는
" 여기 있어요. 잠시만 좀 있어봐요."
그렇게 말하고는 서둘러 지혜언니의 가방과 옷을 챙겨 택시를 불러 태워서는 집으로 보내주었다. 그리고 그렇게 몇몇을 더 보내고 난 뒤, 터널 터널 포장마차로 들어가자, 술이 조금 깬 영석이 곁에 문주를 앉혀 두고 어깨동무를 한 채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었다. 술이 약한 문주는 곧 만취되어 버렸고, 상황은 생각보다 쉽게 정리되었다.
" 어떻게 하지? 문주 집에 가는 차도 없는데..."
" 음 딸꾹. 일단 우리 집에서 재워. "
" 다 큰 여자를 어떻게 남자 자취방에서 재워요. "
" 그럼 네가 같이 자면 되잖아."
" 네?"
아무리 고민해 봐도 시간은 이미 새벽 2시가 넘었고 지금 집에 문주를 데려가기에는 집에 오랜만에 친정에 내려온 언니와 형부, 할머니, 할아버지.... 아 사실 데려가도 잘 방도 없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어 나는 언니에게 너무 늦어서 친구집에서 자고 간다고 문자를 남기고 그렇게 명민, 영석, 문주 이렇게 선배의 자취방으로 향했다.
늘 술이 곤드레 취한 선배를 집까지 데려다준 적은 몇 번 있었지만 이렇게 집안으로 들어온 것은 처음이었다.
잠깐만 들어왔다가라고 해도 나는 극구 사양해 왔었다. 계단을 올라 2층에 다다라, 문을 열자 주방이 나왔고 창이 넓은 방이 한눈에 들어왔다. 신발을 벗기고 질질 끌다시피 인사불성이 된 그녀를 벽 쪽으로 눕히고 그녀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내가 눕고 그 옆에 영석 선배가 눕고 명민선배가 누웠다.
막상 잠을 청한다고 누웠지만 잠은 하나도 오지 않았다. 두 손을 가슴에 얹은 채 말똥 말똥 천장을 바라보고 있는데 창문 너머로 달빛이 세어 들어왔다. 그리고 내 손 속으로 쓱 파고드는 커다란 손이 느껴졌다. 나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러자, 곧
" 나... 물.... 화장실..."
문주가 일어났다. 나는 급히 선배를 깨웠다. 내 곁에서 잠든 척하던 영석을 깨워 화장실 위치를 물어 그녀를 데리고 화장실로 가서 그녀가 먹은 걸 확인하도록 뒤에서 등을 두드리고 또 그렇게 한참을 쭈그리고 앉은 그녀의 등을 쓸어 넘긴 뒤 다시 방으로 향했다. 먼저 올라온 그녀는 비틀거렸고 내게 물을 달라고 했다.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다 멍하니 물 잔을 들여다봤다.
'내가 지금 뭐 하는 거지'
한동안 멍하니 서있다가, 화장실을 다녀오는 명민과 마주쳐 방으로 들어오자, 방 한가운데 대자로 누워 코를 고는 영석 옆에 그녀가 쌔근쌔근 숨소리를 내며 누워 있었고 어느새 벽면 옆자리가 비어 있었다. 나는 잠이 깨지 않도록 살며시 걸음을 옮겨 최대한 벽에 손발을 붙였다. 그러자 반대편 넓은 자리를 두고 명민이 나와 문주 사이에 끼어들었다.
" 뭐 하는 짓이에요. "
" ㅁㅇ나ㅣㅁㅎㅇㅎ;ㅁㄴ잏;ㄴㅇ"
술이 취해 뭐라고 말하는 지도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을 더는 귀에 대고 싶지 않아 그냥 포기를 하고 나는 있는 힘껏 선배와 이불을 발로 밀었다.
그리고 공간이 조금 나오자 겨우 바로 누울 수 있게 되었다. 잠이 막 드려고 할 때쯤 더듬더듬 명민이 내 배를 만지는가 싶더니 바지 속으로 손을 넣으려 했다. 나는 벌떡 일어나 다시 앉아 그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그는 기지개를 켜며 옆으로 돌아누었다. 방의 절반은 비어 있었고 그렇게 3명은 따닥따닥 붙다 시피해서 나는 온통 신경이 쓰여 제대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10분 정도 잠이 들었나 눈을 떠 보니 돌아누운 영석의 품에 문주는 안겨 있었고 내가 밀어버린 명민 선배는 만세를 한채 일자로 몸을 활처럼 펴고 잠들어 있었다. 결국 그렇게 새벽 5시 반이 되어 첫차가 오는 시각도 전에 나는 일어나 문주를 흔들었다.
" 집에 가자. 안 되겠다. 일어나. "
하지만 문주는 깊이 잠이 들었는지 미동도 하지 않았다.
" 아... 머리야... 미소 일어났어?"
잠이 깬 건 영석이었다. 영석은 쭈그리고 앉아 문를 흔드는 나를 끌어당겨 내 입을 막았다.
" 쉿 이리 와. "
그리고는 내 목에 팔을 휘감으려 들었고 나는 그런 선배를 뿌리쳤다.
" 선배 진짜. 알아서 해요. 문주한테 손끝이라도 대면 가만 안 있을 거야. "
그렇게 말하고 나는 휑하니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집에 들어가 샤워를 하고 식사를 하고 바로 짐을 챙겨 다시 나왔다.
" 야 이 언니가 오랜만에 왔는데 주말인데 어디를 가?"
" MT "
" 좋을 때다. 1학년 때 많이 다녀. 잘 다녀와."
가정 형편 때문에 지방에 오게 된 나는 한동안 그렇게 퉁퉁 부어 집에는 거의 잠만 자는 수준으로 드나들었고 가족 누구도 내게 참견을 하거나 말을 걸지 않았다.
버스는 학교로 향했다. 시각은 7시 반. 나는 학교 본부 입구에 세워진 버스에 올라 가운데 자리로 가서 앉았다. 그러자 총학생회 간부가 다가와 말했다.
" 오늘은 네가 너네 단대 대표네. 잘 부탁한다. "
같이 가기로 되어 있던 4.19 기념 광주행 순례버스에 결국 영석 선배는 오르지 않았고 나는 그렇게 몇 시간을 달려 광주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려 보니 어제 술자리에 택시를 태워 보내고 자취방에 비틀거리며 돌아간 인간들을 제외하고는 다들 보이지 않았다. 결국 국립묘지에서 간단한 묵념에서 시작된 순례길은 4.19 기념 의거탑을 거쳐 시청 앞에 이르는 순서로 진행되었고 간간히 버스에 역사적 의미에 대해 설명을 듣거나 장소마다 하차해서 주위를 둘러보는 것으로 코스는 마무리를 향해갔다. 그렇게 일정이 끝나고 다시 버스에 올라 학교에 도착해 내리자, 낯익은 두 사람이 다가왔다. 명민과 영석.
" 잘 다녀왔어?"
나는 둘의 물음에 대답도 하지 않은 채 교정을 내려왔고 그들은 내 뒤를 졸졸 따라오며 미안하다고 연신 사과를 했다. 그러다 나를 돌려 세운 건 영석이었다.
" 이야기라도 좀 하게 해 줘. 진짜 미안해. 내가 미쳤었나 봐. "
뜻밖에 말을 한 건 명민이었고 그런 명민을 바라본 영석은 이내 특유의 여유로운 웃음을 지며 내 팔을 잡고는 모래시계로 향했다.
" 할 이야기 없대도요."
" 진짜 사과할게. "
명민은 내게 계속 미안하다며 두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고 그런 우리를 의심의 눈초리로 보던 영석은 이내,
" 그래 뭐. 응? 좋아하는 마음에 그런 걸 어쩌겠어? 성추행이라고 총여에 가서 고소라도 할 거야?"
" 총여 가야죠. "
내가 이렇게 말하자, 명민은 의자에서 일어나 갑자기 무릎을 꿇었다. 그러더니 두 눈에 눈물을 흘리며,
" 내가 이렇게 사과할게. 진짜 미안해. 근데 제발 그것만은 한 번 더 생각해 줘. 너도 알잖아. 내가 너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고 있다. 이따금씩 영석이 학교 앞이라고 부른 술자리에는 어김없이 그가 있었고 그는 끊임없이 내게 농담인 듯 진담인 듯 정말 사랑하는데 정말 좋아하는데 왜 자기는 안되냐고 몇 번이고 물어왔었다. 그때마다 나는 매번
" 회장님 이러심 곤란해요. "
이렇게 말하며 농담으로 넘기기도 하고 때로는 매몰차게 째려보고 자리를 박차고 나가기도 하고 못 이긴 척 결국 술주정을 다 받아주고 그걸로 더 이상 조르지 않기로 다짐에 다짐을 받고 술이 곤드레만드레 취한 둘을 몇 번이고 집으로 데려다주었었다.
" 미소야. 이번 한 번만 봐줘. 명민이 시골에서 부모님 힘들게 농사지으며 뒷바라지하시는데 이번일 알려지면 학회장도 대학생활도 끝이야. "
생각해 보니 그랬다. 딱히 내게 어떤 행동을 하기 전에 나는 바로 반응을 했고 그는 또 내 거절의 의사를 정확히 알고 반응을 보였다. 그렇게 치면 영석도 마찬가지니 저 둘 다 같은 처벌을 받아야 했다. 나는 고민하다,
" 그럼 약속해요. 다시는 이런 일 안 만들기로. 다시는 여자후배들 집에서 안 재우기로. "
" 약속할게."
생각해 보면 난감한 상황을 만든 건 어쩌면 나였는지도 모르겠다. 잘 곳이 없는 문주를 선배집에 데려간 것도 나였고 그런 상황에서 문주를 지킨답시고 애초에 그 집에서 잠을 드려한 것도 내 잘못이었다. 내가 바보같이 느껴졌고 내 스스로가 경멸스러웠다. 너무 저들을 신뢰한 걸까. 이런 일을 겪은 것은 내가 어리석어서 였나. 아니면 영석에 대한 마음이 있는 것인가. 내 학생회에 대한 순수한 마음은 그 열정은 도대체 어디로 가는 것인가.
그 일 이후 한동안 나는 학생회에 가지 않았다.
선배가 전화를 하면 전화를 받기만 하고 이리저리 핑계를 대고 가지 않았다. 중간고사 기간이 다되어갈 무렵, 토요일 모처럼 도서관에 공부를 하러 학교에 갔다. 버스 정류장에 내렸는데 영석이 서 있었다.
평소와 달리 선배의 두 눈은 심하게 초조해하며 동공이 흔들리고 있었고 몸은 바들바들 떨며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그런 영석을 보자 그냥 지나칠 수 없었던 나는,
" 오랜만이에요. 이 아침에 어디 가요?"
" 아 그 그게... 너 나랑 같이 어디 좀 가자. "
" 어딜.. 요?"
그는 채 내 물음에 답도 하기 전에 내 손을 잡고는 아무 말도 없이 부산으로 가는 고속버스에 올랐다. 그렇게 부산에 도착해 지하철에 올라서야 그는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 지금 가는 곳은 부경청년대학생총궐기대회야. 우리는 연인처럼 위장해서 부산대에 잠입할 거고 거기서 시위대가 구호를 외치면 같이 시위를 할 거야. 이거 정말 위험해. 나는 이미 경찰 블랙리스트에 올라서 수사망에 있어 혼자 들어가면 바로 검문 검색당해. 그래서 네가 꼭 같이 옆에 있어야 해. 그러니 내 곁에서 떨어지지 말고 꼭 붙어 있어. 알았지?"
뭔지 모르지만 그저 선배들과의 술자리에서 들어왔던 대모, 시위현장을 이렇게 직접 오게 될 줄은 몰랐다. 그것도 2000년대를 코앞에 둔 지금. 다들 최첨단 시대에 민주주의가 자리를 잡고 민주대통령이라고 말하는 이 시대에 학회장이 경찰 블랙리스트에 이름 올라 군사 독재시절처럼 검열당하고 정보가 관리되고 있다는 말도 나는 마치 꿈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길게 이어진 도로를 따라 완전무장을 한 전투복을 입고 곤봉과 커다란 방패를 든 전경을 보자 점점 그 현실이 와닿았다. 도로 폭이 좁아질수록 영석은 내게 더 가까이 붙으며 다정한 연인인 척 행세하기 시작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 내 머리를 쓸어 넘기며, 내 귓가에 대고,
" 긴장하지 마. 괜찮아. 내가 곁에 있을게. "
라고 말하며 내 어깨에 손을 두르고는 그렇게 전경이 즐비한 좁은 도로를 지나 넓은 정문 중 단 한 칸 열려 있는 교문을 통과하였다. 그리고도 아무렇지 않은 듯 선배는 계속 다정하게 내 어깨에 팔을 두르고 연기를 했다. 그렇게 들어서서는 커다란 나무 아래로 몸을 숨겼을 때 영석은
" 휴~ 많이 놀랐지? 근데 너 아까부터 아니 처음 올 때부터 아무것도 왜 안 물어봐?"
" 아 버스 정류장에서 선배 보고 평소와 달라서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았어요. 걱정돼서."
" 역시"
그는 내 어깨에 한쪽 팔을 다정히 얹은 채 내 머리를 헝클어 틀렸다. 그리고 내 볼을 꼬집으며,
" 내가 이래서 네가 좋다니까. 든든해. "
" 지금 농담할 때 아닌 거 같은데요? 말해봐요. 그래서 오늘 여기서 어떻게 돼요? 설마 선배한테 무슨 일 생기는 건 아니죠?"
" 그건 나중에. 일단 총궐기하면 시위대 진압하러 전경들이 들이닥칠 거야. 그리고 전경들 목표는 우리 같은 간부급이라 너는 아마 괜찮을 거야. 중간에 내가 사라져도 너무 놀라지는 마. 곧 있음 총여랑 총학에서도 합류한다고 했으니 3시쯤 개인연락은 절대 하지 말고 저기 바로 저 등나무 아래서 기다리면 너 데리러 선배들 올 거야. 난 한 6시쯤 서편 도서관 앞에서 접선하기로 했으니까 상황보고 연락 줄게. 뭐 잘못되면 잡히기 밖에 더하겠어? "
" 원래 대학교는 못 들어오는 곳이잖아요. 전경이."
" 두고 봐야지. "
" 둥둥 둥둥"
어디선가 북소리가 들렸다. 그러더니 이어지며 함성소리가 들렸다. 어디에 있었는지 모를 학생들이 구름 때처럼 중앙광장으로 모여들었다. 그러더니 어디선가 마이크 소리가 들렸다.
" 이 땅에 잠들어 있는 민중의 외침을 따라 깨어있는 지성인으로 우리가 나아간다..."
학생회의 구호 아닌 구호가 들리며 어디선가 모여든 인파로 어느새 교정은 빼곡히 채워졌고 계단 위를 스탠드 삼아 오른 부경 총 연합회장은 마이크를 들고 연설을 이어갔다.
" 지금 시대는 민주주의란 미명아래 아직도 청산하지 못한 과거의 둘레로 노동자들은 고통받고..... 이런 현실에 분노하여 우리 전국 총학생연합은 총궐기..."
그 순간. 나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대학 정문 앞에서 전경과 시위대가 대치하며 있던 그 교문이 일순간 넘어지며, 전경들이 곤봉을 들고 쏟아져 들어왔다.
순간 좌중은 아수라장으로 뒤바뀌며 학생들은 혼비백산하며 비명을 지르고 이리저리 도망을 쳤다. 나도 모르게 잔디밭에 앉아 연설을 듣다 벌떡 일어나 달리기 시작했는데 눈앞에 갑자기 어깨 높이만큼 큰 조경이 눈에 들어왔다. 고개를 돌려 보니 어느새 옆에서 뛰고 있던 여학생은 전경에게 머리채를 잡혀 끌려가고 있었고 나는 그 자리에 앉아 부들부들 떨며 어찌할 줄 모르고 있었다. 그때,
" 뛰어!"
영석이 그런 내 손을 잡더니 그 높은 조경을 넘어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건물로 뛰어 들어갔다.
" 여기서 기다려."
도서관 건물이었다. 놀랍게도 밖은 그렇게 아수라장이 되었는데도 도서관에는 수많은 학생들이 귀에 이어폰을 끼거나 책을 보며 열심히 공부를 하고 있었다.
멀리서 선배가 음료를 빼서 내게 들어 보이더니 걸어오다가 갑자기 반대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고 어느새 두 남자가 선배를 따라 뛰었다. 나는 논란 토끼눈을 하고
" 선배!"
우리와 달리 도서관 안은 마치 다른 세계에 온 것 같은 느낌.
나는 순간 불안함에 숨어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으니 어디선가 학생들이 다시 점점 모여들기 시작했다.
눈물을 흘리며, 다리를 절룩거리며, 구호를 외치며 그들은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며 그렇게 삼삼오오 모여들기 시작하더니 언제부터 알고 지낸 사이인지도 모르게 그렇게 어깨동무를 하고 어느새 한 무리가 되어 운동장을 애워쌓다. 그런 그들의 손에 이끌려 나도 다시 대열에 끼어들었다.
그리고 다시 학생들이 대열을 정비해서 인간 벽을 형성하고 전경이 한발 물러나 뒤로 후퇴했다. 5열 종대로 모인 학생들은 오르막길을 막고 민중노래를 부르며 길바닥에 드러누었고 맞은편 아래 도로에는 방패를 든 전경이 대치하고 있었다. 이때, 어디선가 마이크 소리가 들렸다.
" 학생 여러분. 도서관에 계신 여러분. 저는 이 학교 총학회장 000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미래가 중요한 줄 너무 잘 압니다. 하지만 보십시오. 여러분이 그렇게 이루고자 하는 미래. 그 미래를 지키기 위해 지금도 우리 학우들은 저 교정에서 전경에 맞서 목에 피 터지게 노래를 부르며 민주주의를 노동자를 부르짖고 있습니다. 그저 외면한다고 그저 주는 대로 받는다고 지켜지는 자유였다면 여러분들이 지금 이 교정에 있을 수 있을까요? 정말 당신들에게 지성인으로서의 양심은 없습니까? 저 떼어 저 나간 교문이, 지켜져야 할 우리의 공간이, 짓밟히는데 우리가 진정한 이 시대의 지성인입니까?"
그러자, 어디선가 우우우우우 소리가 들리더니
" 밀어버려."
그 순간, 전경들은 방패를 들고 시위대 방향으로 달려들었고 어디선가, 임을 위한 행진곡이 교정 가득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도서관에 강의실에 어딘가에 들어 있던 그 많은 학생들이 교정으로 모여들기 시작하며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 민주 수호! 강압타도!"
" 탄압 경찰 물러가라!"
삽시간에 학교는 어디라 할 곳도 없이 학생들로 빼곡히 들어차며 전경은 밖으로 밀려났고 그렇게 한참을 민중의 노래와 구호들이 울려 퍼졌다.
여기저기서 흐느끼는 사람. 옆에 학우와 부둥켜안고 우는 사람. 어쩌면 치열한 경쟁으로 우리 마음속 응어리졌던 자유에 대한 갈망을 그곳에 있었던 이들은 모두 공유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삶에 대한 간절한 소망과 희망을 가슴에 불꽃처럼 품고.
시간이 되어 약속장소에 갔을 때 총 여부회장이 마중 나와 있었다. 옆에는 지혜선배와 ㅇㅇ 선배가 같이 나와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 어디 있었어? 선배는? "
지혜 선배가 내게 영석의 안부를 물었고
" 아까 어떤 사람들이 쫓아와서 달려 나갔어요."
" 일단 상황을 지켜보자. 연락하겠지. "
" 저희는 어떻게 해요?"
" 우선 대기하다가 움직이자. "
곧이어 전경부대가 구금하는 학생 없이 완전히 철수를 하는 조건으로 물러나고서야 학생들은 박수를 치고 해산을 하였다. 그리고 그 무리에 뒤섞여 돌아오는 버스에 올랐다. 그때,
" 집에 갔어?"
" 선배 어디예요? 걱정했잖아요. 지금 가고 있어요. "
영석의 전화였다.
" 음 지금 우리는 상황이 안 좋은데 여기 간부들만 토끼몰이 당해서 다른 대학 건물 6층에 다 모여 있어. 명민이가 잡혀갔다고 해서... 우리도 어떻게 할지 상황 회의 중이야."
" 어떻게 하려고 그래요? 인생 끝낼 거예요?"
" 이런다고 안 죽어. 나 알지? 풋. 걱정 마. 인마. 내가 잘 도망갈게. "
그렇게 영석과 연락이 끊긴 뒤 다시 그 모습을 보인 건 온 보름 만이었다.
한창 학교 축제준비로 분주할 무렵. 미대 학생회 홍보부스를 꾸미느라 다들 정신이 없었고 간간히 선배들이 영석과 통화를 하는지 나는 묻지 않았다. 잘 지내겠지. 연락할 때 되면 오겠지. 그렇게 마음먹고 있었는데 학생회실에 들어서자, 2학년에 재학 중인 영지 언니와 열심히 홍보물을 검토 중인 선배가 눈에 들어왔다.
" 뭐예요. 선배. 연락도 안 하고?'
" 오 우리 새내기 연락 기다린 거야? 잠시만. 이것 좀 마저 하고."
선배는 영지언니와 열심히 상의하며 무엇인가 말하더니 곧 영지언니는 밖으로 나갔다.
" 연락 왜 안 한 거예요? 얼마나 걱정한 줄 알아요?"
" 왜 죽기라도 했을까 봐?"
" 뭐야. 살이 쏙 빠져서는. 누가 보면 실연이라도 당한 줄 알겠어요. 선배. 밥은 먹고 다녀요? 얼굴이 이게 뭐야. "
속상한 마음에 나는 주절주절 대는데, 선배가 커피를 타서 내게 주며,
" 어떻게 알았어? 나 고백했다가 차였잖아."
커피를 마시다 나는 멈칫했다. 고개를 들어 그를 보자, 그는 아무렇지 않은 듯,
" 뭘 그렇게 놀라. 나도 남잔데. 시련의 아픔이 있을 수 있지. 한동안 일이 손에 안 잡히더라고. "
영석과 이렇게 사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 누구... 에요?"
" 방금 봤잖아? 영지. 남자 친구 생겼다고 차였어. 임자 있는 사람은 역시 안되네. 훗. "
영석은 커피를 마시며 생각에 잠긴 듯 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웃어 보였다.
" 같이 일하는 건... 괜찮아요?"
" 뭐 어때? 그래봐야 같은 학생회 일인데... 괜찮아. "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곁으로 갔다. 그리고 그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 주었다. 그러자 그가 고개를 숙이며 커피를 한잔 들이키더니 다시 훗 하고 웃는다. 왜 몰랐을까. 그렇게 같이 붙어 다니고 그렇게 거의 비는 시간마다 같이 있었는데 미친 듯 같이 학생회 일을 하면서도 정작 그에게서 이렇게 아련한 눈빛을 본 적은 없었다. 저런 게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워하는 눈빛이구나.
부스 준비가 거의 마무리되고 집으로 돌아갈 즘 문주에게서 전화가 왔다.
"우리 술 한잔 해야 할 것 같은데.. 할 이야기도 있고."
나는 그때 그녀를 혼자 두고 온 게 계속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문주가 영석 친구 동생이니 어떻게 했을까란 믿음도 있었다. 그래도 계속 신경은 쓰였고 차마 물어볼 수는 없었다. 그들이 내게 말해주기 전에는.
" 그날 잘 들어갔어?"
하지만 막상 얼굴을 보니 먼저 말을 꺼낸 건 나였다. 걱정이 앞섰다.
" 응"
" 그날 너 거기 두고 먼저 나와서 미안해. "
" 아냐. 잘했어. 덕분에 아침도 얻어먹고 잠도 잘 잤어. 선배가 너 추모행사인가.. 뭐 간다고 먼저 갔다더라고."
" 응"
" 그날 별일 없었던 거야?"
" 흠. 훗. 별일 있었으면 했는데 없더라. 안타깝게도. 그냥. 좀 속이 상해. 내 마음을 너무 몰라줘서. 사실."
그녀는 그렇게 지나온 이야기를 내게 했다.
그녀가 고등학교 시절부터 오빠의 친구로 알고 지낸 영석은 대학교 1학년때 친오빠와 농활활동으로 그녀가 사는 동네로 왔었다고 했다. 그곳에서 그는 너무나 멋있었고 그런 영석이 그녀에게는 첫사랑이었다.
친오빠가 대학교 2학년 시절 영석과 데모를 한다고 서울에 올라가 사고를 당해 다쳤고 집안의 장손이었던 친오빠는 큰 수술을 두 번 하고 그 길로 휴학을 하고 군대를 다녀왔고 그 일로 인해 학생회는 그 집에서는 금기시되었다고 했다. 그런 영석을 따라 학교도 왔고 그녀가 바라보는 유일한 희망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마음은 외면한 채 영석은 그저 친 여동생처럼 대하고 또 바라봤고 그게 더 마음이 아프고 자신을 괴롭게 만든다고 했다.
" 아무리 노력을 해도 안돼. 그러니 네가 나랑 선배 좀...."
" 네 마음 알겠는 데 있잖아. 사랑이 그래. 누군가 연결을 해주고 한다고 되는 건 아냐. 누군가를 이용하려 든다고 되는 것도 아냐. 넌 사실 솔직하지 못하잖아. 적어도 좋아하는 마음이 있으면 그냥 직접 말하는 게 맞다고 봐. 나를 통해서가 아닌. 네가 직접. "
그러자, 그녀가 물었다.
" 그런 넌? 넌 정말 선배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는 거야?"
나는 순간 멈칫하였다. 그리고 생각했다. 정말 아무 감정이 없을까. 그와 함께한 동안. 나는 어떠한 두근거림도 설렘도 없었을까. 또 내가 외면해 왔던 건 아닐까.
" 없어. "
" 어떻게 그렇게 장담해? 네 마음을?"
" 알아. 내 마음. "
" 너 참 편하다. 그렇게 발뺌하고."
" 좋을 대로 생각해. 하지만 이 관계에서 더는 나를 엮지 말아 줘. 난 둘 사이 빠질게. "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많은 생각이 들었다.
사랑 고백.
누군가가 누군가를 사랑하고
그리워하고
함께 있고 싶어 하는
애타는 마음.
그리고
곁에 있고 싶고 지켜주고 싶고
함께 나누고 싶은 마음.
하지만
내 것이고 싶고
나만의 것이어야 하고
나만 바라봐야 하는 마음.
누군가를 위해 희생하고
누군가를 위해 위해주고
누군가를 위해 기꺼이 양보할 수 있는 그 마음.
그들의 사랑은 저 들 중에 어디에 있을까. 내 마음은 어디에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