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올 계집애. 드디어 그날이 된 거야? 야. 나 완전 설레서 잠도 못잤다구 이리 와봐. "
" 희경아. 잠시만. 나 아직 신발도 안 벗었거든?"
" 야 지금 그게 문제야?"
희경의 손에 이끌려 채 신발 한쪽을 벗기도 전 바닥에 넘어졌고 툴툴 털고 일어나며,
" 나 너무 피곤해. 좀 쉬어야겠어."
" 누군데 누군데?"
희경은 넘어졌던 나를 아랑곳 않고 따라다니며 귀찮게 했다. 옷방으로 들어가 옷을 벗어서 화장실입구 바구니에 툭 하니 던져두고는 화장실에 들어가 세안을 하고 양치를 하는데, 팔짱을 낀 희경은 그래도 미련을 못 버리고 화장실 입구에서 잔소리를 이어갔다.
" 야. 너는 어제 나간 애가 지금 들어와서는 생전 안 하던 외박에 어? 그것도 오래간만에 동아리 모임 간다고 한 애가 응?..."
" 쾅"
" 쏴아아 아아"
그런 희경을 문밖으로 밀어내고는 샤워기 물을 틀어 둔 채, 입에 문 칫솔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리고 다시 이내 양치를 하고는 그렇게 샤워를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 뭐야? 너 지금까지 호텔에 있다 온 거 아니야? 집에서 샤워는 왜 해. 물 아깝게."
" 산책 갔다 왔어. "
" 어디 어디? "
희경의 눈동자는 반짝반짝 빛이 나며 거울 앞에서 기초로션을 바르는 나를 보고 있었고 그런 희경을 나는 잠시 빙긋 웃으며 물끄러미 바라봤다가, 다시 고개를 돌리고 대답했다.
" 연우오빠랑"
" 에이 난 또 누구라고. 야. 너 인제 그 인간이 오라고 하면 나가지 마. 뭐야 그 새끼는."
나는 화장 솜으로 얼굴을 정돈하다 문득 그녀를 한번 힐끔 봤다. 그녀가 걱정하는 마음이 보인다. 그런 그녀를 보며 나는 빙긋 웃어 보였다. 그러자,
" 넌 웃음이 나오냐? 지가 잘가나가는 의사면 다야? 아니 버젓이 애인이 있으면서 너한테 다른 사람 소개는 못 시켜줄 망정, 맨날 지 여자 친구랑 일만 있음 불러내서는 어디다 민폐질이야. 민폐질을. "
" 미란 언니 결혼한대."
" 뭐? 언제? 그럼 그 연우새끼 놔두고?"
" 응."
" 내 그럴 줄 알았다. 조짐이 안 좋더라니. 언제 누구랑?"
" 모르지. 나야. 오늘 벌써 했어. 신혼여행 갔겠네. 나 피곤해. 희경아. 온종일 걸었더니 다리도 아파. 응? 좀 쉬어도 될까? 먼저 잘게. "
" 야. 그래서 그래서 넌 어제 어디서 잔 건데. 응? 어제 누구랑 있었던 건데?"
희경의 물음에도 나는 더 이상 대답도 않고 그렇게 이불을 뒤집어쓴 채 돌아 누었다. 머릿속 떠오른 것은 연우의 집에서 잔 건 이번이 두 번째지만 그와 관계를 가진 건 한번뿐이라는 말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이라는 것과 본의 아니게 남의 연애사 일대기를 보게 되었다는 것. 그 정도.
연우가 거의 울먹이며 전화가 왔을 때는 올해 초였다.
아마도 강원도 오빠 네에 다녀온 직후부터 자주 싸우기 시작한 쯤이겠지.
연우가 미란 언니를 작년 말 쯤 내게 결혼할 사람이라고 소개해 줬었다. 하지만 그날은 연락이 안 된다고 걱정하며 내 전화는 받을지 모른다며 대신 전화를 해달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연우에게 가는 길에 전화를 걸었고 그녀는 곤드레 취해 내게 말했었다. 평생 페이닥터 와이프는 아무리 생각해도 못해 먹겠다고. 그를 아무리 사랑해도 견딜 수 있는 한계란 게 있으니 그냥 나 보고도 혹여 마음 있으면 잘 생각해 보라고 아끼는 동생 같은 애라 말해주는 거라며 그렇게 전화를 끊어버렸다.
어디에 누구랑 있는지 말도 않은 채. 그런 통화를 그에게 차마 전할 수 없어서 나는 연우에게 그냥 언니가 지금 많이 취해서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고 말하며 그를 자취방에 데려다 주러 갔고 그의 자취방 가까이 도착했는데 연우의 전화가 울렸다.
" 오빠... 나 좀 데려다줘. 여기 00 호텔 00호."
미란의 전화.
" 오빠 차도 없는데 어떻게 데리러 간다고 그래. 술도 이미 먹었는데."
" 아냐. 가야 해. 호텔이라잖아. 가야지. 집에 간다잖아. "
" 누구랑 있는지 알고. 거길 가. 가서 어떻게 하려고."
" 오라잖아. 가야 한다고. 이거 좀 놔봐. "
그의 힘은 너무 셌고 술을 먹어서 그런지 너무나 완강했다. 도무지 꺾일 것 같지 않은 기세에 결국,
" 그럼 나랑 같이 가. 가는 동안 정신 좀 차리고. "
택시를 타고 가는 동안에도 나는 도무지 이해가 안 갔다. 가끔 언니가 내게 농담처럼 호텔이라고 놀러 오라고 할 때도, 같이 거기서 운동을 다니자고 할 때도 나는 이해가 안 갔는데 왜 멀쩡한 집을 두고 거기서 그렇게 있는지 누구랑 있는지 게다가 그게 남자 친구와 싸우고 갈 곳인지 그러고도 데리러 오라고 연락을 한 건 더더욱 이해가 안 되었던 것이다.
" 가자. "
가운을 걸치고 늘어진 그녀에게 내가 옷을 입히고는 그렇게 연우가 부축을 하자,
" 아 우리 오빠 왔네. 쪽쪽. 올 줄 알았어. 오빠면. "
그렇게 말하면서
" 어머 우리 동생도 왔네? 오빠 동생? 우리 이뿐이 쪽쪽."
그러고 늘어졌다. 우리 둘의 부축을 받고 급히 택시에 올라 내가 오빠의 집 방향으로 가자고 하니,
" 안가. 거기 절대 안 돼. 거기서 안 잘 거야."
그렇게 고집을 피웠다. 그러자,
" 00 오피스텔로 가주세요. "
오빠는 그녀의 오피스텔로 안내했고 그녀의 오피스텔 입구에 도착했을 때 술이 깬 그는,
" 벌써 지하철 끊겼겠다. 미안해. 택시 타고 가. 내일 통화하자. 진짜 미안."
그렇게 말하며 내게 택시비를 쥐어 주었다.
나는 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왠지 과연 저들이 사랑은 하고 있는지 의심이 들었다.
몇 달 뒤,
이번에는 그였다. 술이 곤드레만드레 취해서는 다 꼬부라져 가는 말투로 내게,
" 미란이집에 가자. 나 우리 집 안 갈 거야."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끝까지 바득바득 우겨서 결국 택시를 타고 미란 언니집으로 향했고 언니에게 전화를 걸자,
" 미안. 또 술이 떡이 되었나 보네. 내가 곧 갈 테니까. 집안에만 좀..."
덕분에 미란 언니 집안에 그를 데려다 눕히고 나는 멍하니 문밖에 서 있었다.
이내 정신을 차리고 나와 입구에서 차를 잡는데 주말이라 그런지 택시도 잘 안 잡혔다.
' 하아. 택시 잡기도 애매하고 지금 시간이면 여간 곤란한 게 아닌데...'
고민하고 있던 차에 언니가 도착해서 오피스텔 입구 나를 바라보더니,
" 어떡하니 늦어서? 좀 그렇긴 한데. 괜찮으면 그냥 오빠 집에서 자고 가. 비번 알려줄게."
시계를 보니 벌써 3시가 다되어 갔다. 여기서 걸으면 한 40분, 빠르게 걸으면 30분 뛰면 15분? 음.... 20분은 걸리겠네. 딱히 그렇다고 여기 강남에서 희경의 집이 있는 성수역까지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언니의 말을 듣고 택시를 타고 왔던 길을 떠올리며 그렇게 뛰기 시작하자 생각보다 가까운 거리에 연우의 집이 위치해 있었다.
강남역 뒤편으로 조금만 더 들어가면 도로면 번잡하고 화려한 수많은 건물들과 달리 이곳은 수많은 고시원과 원룸들이 즐비한 곳.
언니가 머무는 그 오피스텔이라는 곳은 그냥 딱 봐도 아파트처럼 넓고 대로변에 위치한 곳이지만 그 뒤편으로 몇 골목 올라가 더 뒤로 가면 그의 집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왜 택시 기사는 나와 그를 태우고 동네를 이 잡듯 뒤지고 다닌 건지. 덕분에 나는 예상과 다르게 20분 안에 그의 집 앞에 도착해 있었다. 그것도 전속력으로 달리지 않고 말이다. 소싯적 육상 실력이 이리 엉뚱하게 발휘될 줄이야. 후아.
불이 꺼진 방안에 들어가 불도 켜지 않고 그렇게 처음에는 침대 아래 우두커니 앉았다가 냉장고 앞에 가서 물을 먹을까 고민하다가 남의 집에 허락도 없이 들어온 터라, 고민하다 그냥 그대로 바닥에 누웠다가 나는 다시 침대로 올라가 잠이 들었다.
채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도 안 가는데 누군가 나를 흔들어 깨웠다. 시계를 보니 아침 7시 반.
" 야. 미소야. 너 알바 가야지. 일어나. "
눈을 떠보니 연우가 어느새 와서는 멀쩡한 얼굴로 옷까지 말끔히 갈아입고 그렇게 서 있었다. 나는 당황해서 아무 말도 못 하고 벌떡 일어나 주섬주섬, 내 옷을 확인하고 다시 후다닥 화장실로 가서 연거푸 얼굴을 씻고는
" 와. 오빠.... 이건. 정말 민폐인 거 알죠?"
" 아 어제는 진짜 미안. 일단 내가 설명할 시간이 없으니. 가면서 이야기하자. 응?"
" 와 진짜. 어제 나빴어. "
나는 연신 씩씩 댔고,
" 가자. 가자. "
손이 발이 되도록 빌며 나를 끄는 그의 손에 이끌려 지하철 역에 다다랐을 때,
" 내가 이 빚 꼭 갚을게. 응? 뭐 원하는 거 다 말해. 다 들어줄게. "
" 아 됐고, 그렇게 할 거면 그냥 그 방 나한테 내놔요. 오빠는 그 방 쓸 자격이 없어. 자격이. 그냥 숙소에서 살아요. "
못내 혼자만의 방이 그런 공간이 그리웠던 나는 그 방이 탐이 났다. 그는 마음만 먹으면 숙소든 그녀의 오피스텔이든 호텔이든 자기 자취방이든 어디든 머물 수 있었지만, 나는 아니었다.
" 미소야. 미안. 오늘은 좀 어떻게 안될까? 응?"
" 알았어. 걱정하지 마. 얹혀사는 주제에 주인이 방 빼라면 나가야지 뭐. "
" 야. 넌 뭘 그렇게 또 매몰차게 말하냐? 오늘 하루만. 응?"
한창 썸을 타던 남자 친구와의 하룻밤을 위해 이벤트를 준비한다는 희경에게 차마 내가 버젓이 서울에 있는 언니집을 두고 그 집에 얹혀사는 것도 미안한데 그 시간마저 방해하는 건 더 안되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언니집에 들어가기에 언니집은... 이미 남동생이 들어가 있어서 더 안되었다. 그러지 않기로 하고 나는 상경한 것이고 그래서 절대 서울에서는 언니들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기로 다짐과 약속을 하고 겨우 편입을 하고 온 터라, 그 이후 나는 아예 발길을 끊었다.
가족이란 것이 눈에 보이면 마음이 아프고 마음이 아프면 챙겨야 하고 신경 써야 함을 알기에 우리 남매들은 그렇게 남보다 못하게 대면대면하게 지냈다. 비록 나만 이지만.
하지만 나는 오히려 이 생활이 더 편했다. 사사건건 참견하는 사람도 없었고 늦게 들어온다고 누구를 만난다고 잔소리하는 사람도 없었고 돈을 많이 쓴다고 그렇다고 집에 있다고 구박하는 사람도 없었다.
물론 내 공간은 없었지만 말이다. 그래서 나는 결론적으로 희경이 남자 친구를 데려오는 날에는 어느 날에는 찜질방을 어느 날에는 피시방을 가서 날을 새웠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집에 들어가 그녀가 인기척을 내기 전에 후다닥 씻고 나와 아침 먹을거리를 챙겨두고는 서둘러 알바를 하러 편의점으로 향했다.
대학을 다닐 때는 낮에 구내 편의점에서 알바를 하고 저녁이면 고깃집에서 서빙을 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편의점을 더 뛰기도 하고 어떤 때는 미술학원에서 알바를 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일일 도우미로도 일을 하며 닥치는 대로 돈을 모았다. 그렇게 등록금을 모으고 그걸로 모자라 학자금 대출도 받고 그렇게 학교를 다니며 내게 하루는 눈코 뜰 새도 없이 흘러간 것이다.
가끔은 그런 내게 쉬고 싶고 혼자 있고 싶은 공간이 필요할 때가 있었다.
그저 마음 편이 누워 누구도 신경 쓰지 않고 편하게 속옷차림으로 때로는 그 속옷조차 입지 않고 이불에 칭칭 감겨 며칠을 머리도 안 감아도 되고 때로는 폐인처럼 있어도 모르는 공간. 그런 공간.
여자에게 그런 공간은 쉽사리 존재하지 않지만 마음만 먹으면 고시원도 가능하지만 나는 그 월세조차 아껴야 했고 다행히 먼저 올라온 희경이 이모네와 분가하는 조건으로 이모가 임대하고 있는 이 건물 투룸에 정착을 하면서 나도 자연스레 빈대 붙게 되었다.
도대체 이모를 뭐라 구워삶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아마도 내 생각에 나중에는 급기야 이 투룸마저 희경이 것이 되겠지. 그러고도 남을 희경이니까.
자려고 누었는데 희경은 옆에서 세근 세근 잠이 들었는데 나도 잠이 든 줄 알았는데 눈을 떠보니 새벽 2시였다. 문자가 와 있었다. 시각이 새벽 1시 45분.
" 잘 들어갔어? 내방 필요하면 말해. "
그의 답은 의외로 심플했다. 그와의 하룻밤을 보내며 어떤 기대를 한 것도 어떤 마음이 있었던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에게 무엇인가 기대를 한 것도 아니지만 그의 문자를 보자 머릿속에 답이 떠올랐다. 하지만 나는 답장을 하지 않았다.
내 머릿속 답은
" 방만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