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위성 같은 아이

by moonrightsea

" 저녁 먹었어? 아직 안 먹었으면 식사나 한 끼 할까?"

" 아 미안. 나 저녁 알바 있어서... 지금은 곤란한데 다음에 하면 안 될까?"

" 나 서울 올라왔는데 권익이 만나기로 했거든. 한잔 할래?"

" 미안. 약속 있어."

" 미소야. 오늘 우리 만나자. 진짜 진짜 이 언니가 이렇게 부탁할게. 응?"

" 미안. 나 할 일이 아직 남아서.. 미안 다음에 봐. "


얼마나 많은 약속을 숱하게 거절했는지 모른다. 때로는 이유도 없이 때로는 온갖 핑계를 대고 피할 수 있는 만큼 최대한 할 수 있는 대로 요리조리 정말 요령껏 나름은 잘 피해왔다고 자부해 왔다. 하지만 이번 만큼은 정말 피할 수 없었다.


" 나. 생일인데. 너 올 때까지 기다릴게. 부담은 안 주고 싶은데. 근데 네가 꼭 왔으면 해. "




아직도 미련인지 아니면 바보인지 경윤은 그렇게 줄기 차게 천천히 느리게 내게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늘 맴도는 위성처럼 내가 정신이 없어질 때면, 내게 다가와 툭 하고 나를 건딘다.


벌써 연우와 그 일이 있은 후 몇 주가 흘렀고, 그럼에도 내게는 마치 발 끝 어딘가 빼지 못한 작은 가시처럼 그렇게 발에 배기고 나를 쿡쿡 쑤셔대는 통에 마음이 심란한 터였다. 술이 고팠고 또 그렇게 피해왔건만 오늘따라 유독 사람이 그리운 날이기도 했다.


하지만 경윤은 아니었다.


아니 아니었으면 했다. 그를 만나 그와 보내온 숱한 시간은 돌이켜 보면 참으로 짧고 찰나 같은 순간들이었지만 강렬했고 또 아름다웠다. 그렇기에 경윤을 만날 때면 좋은 기억만 간직하고 싶었고 그에 대한 추억만 간직하고 싶었다. 하지만 때로는 피할 수 없는 운명도 있는 법.


" 어디로 가면 되는데?"

" 홍대 입구에서 보자."




그렇게 경윤을 만나러 갔다.

생일이라는 그에게 딱히 할 선물이 생각나지 않아 나는 오기 전 백화점에 들러 넥타이 하나를 샀다.


그는 이제 경기도에 있는 회사에 취업이 확정된 상태였다. 축하도 할 겸. 원하지 않아도 정림에게서 항상 꼬박꼬박 일간지 속보처럼 전화통화 때마다 그렇게 그의 안부를 전해 듣다 보니 자연히 그가 뭘 하는지 어디 있는지 언제쯤 서울에 오는지 정도는 알고 싶지 않아도 알 수밖에 없었고 그가 서울에 오면 누굴 만나고 무얼 했는지는 권익이 알려주니 굳이 묻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들의 전화도 수시로 피하고 안 만나왔는데 그러다 보니 결국 제 발로 찾아왔다.

경윤이가.


" 오늘은 기분이 별로 인가 봐? 괜히 불렀나?"

" 아냐. 무슨 오늘 너 생일이잖아. 내가 중요한 게 아닌데 뭐. 뭐 사줄까?"


" 아냐. 오늘은 내가 취업기념으로 한턱 쏠게. 가자. 뭐 먹고 싶어?"

" 음 난... 치맥?"

" 응? 저녁 안 먹고?"


" 뭐. 그냥 오늘은 술이 좀 당기네. 사람들도."


그냥 왁자지껄한 사람들 틈에 끼어 별 시답잖은 이야기들로 내 이야기는 묻어둔 채 그냥 자리만 채울 수 있다면 그냥 존재하다 사라져도 아무렇지 않은 자리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언제 자리를 떠도 표가 안나는 자리.


누구도 의심치 않고 자연스레 그의 옆을 메울 수 있는 자리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안내한 곳은 그 많은 서울 시내 중 그 붐비는 홍대 앞 점포들 중 한참을 더 뒷골목으로 들어가 주택을 개조해 만든 곳으로 선술집에서나 쓸만한 둥근 테이블이 있는 꽤나 오래된 치킨집이었고 높은 천장아래 하얀 백색 조명, 테이블마다 소주병을 두고 먹는 중년 이상 되어 보이는 어른들이 띄엄띄엄 앉는 그런 곳이었다.


" 홍대 뒤에 이런 곳도 있구나."

" 응 가끔 서울 오면 여기 오거든. 치킨이 맛있어. 꼭 뭐랄까. 초등학교 때 체육대회할 때 먹던 맛이랄까?"

" 훗. 감성적이긴. "

" 저 여기 주문요. "


경윤이 주문을 하고 잠시 기다렸을까.

둥근 쟁반에 수북이 쌓인 약간의 카레 향이 나는 바삭하게 구워진 치킨과 냉동실에 얼려두었던 잔에 담긴 맥주, 그리고 소주가 나왔다. 음~ 향을 맡아보고 나는


" 내가 케이크는 준비 못했네. 자 생일 축하해."

" 오 선물인 거야? 고마워. 뭐지?"

" 넥타이."

" 어 나 아직 선물 안 풀었는데."

" 기대하지 말라고. 그냥 그런 선물이니까. 좋은 것도 아니고 아직은 난 백수라서. "


" 왜 너 알바도 하고 있잖아. "

" 직장이 없으면 백수지. 뭐. 그저 간간히 입에 풀칠하는 정도 가지고야 이 서울바닥에서 돈 번다고 말할 수도 없고 말이야. "


" 그래도 너도 축하해. 합격했다며?"

" 아.. 응. 고마워. "

" 어떻게 하지? 난 준비한 게 없는데."

" 아 아서라 아서. 받는 게 난 더 부담스러워. 마음만 응? 마음만 받을게. 고마워. 자."




잔을 들어 그에게 권했고 그는 짠 하고 잔을 쳤다.

" 그래서 백수 애인은 잘 있고?"

" 뭐. 취업이 되어야 백수가 떨어져 나가지. "


" 이제 대학원생이니 백수애인은 떨어져 나간 거 아냐?"

그는 이렇게 말하며 갑자기 내 손을 잡았다. 또 다시 심쿵. 그가 잡은 손을 쓱 빼서는 맥주잔을 들어 소주를 왈칵 부었다. 그리고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 나 잠시 밖에 나갔다 올게. 잠시만 있어봐."


그는 나를 또다시 흔들고 있었다. 내가 그렇게 도망치고 외면하려 했는데 그는 다시 나를 시험대에 올려둔다.


나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슈퍼로 향했고 가서 담배와 라이터를 샀다. 그리고 버젓이 그 치킨집 앞으로 가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 콜록콜록...."

기침을 헤대며 그렇게 피우는 담배.


왜 이게 그렇게 못 끊고 순간순간 이야기가 끊기는 순간마다 때로는 누군가 떠오는 순간마다 연우가 피어대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나는 기억했다. 그가 다르게 보이고 낯설게 느껴지고 왠지... 멀리하고 싶었던 그 순간. 그 냄새.


" 피지도 못하는 담배를... 이리 줘. "




어느새 곁에 온 경윤은 내게 뺏은 담배를 입에 물고는 예상과 달리 멋들어지게 연기를 내뿜으며 피고 있었다. 내가 저런 그의 모습을 본 적이 있었나. 내 기억 속 그는 항상 순수함이 두 눈에 우수처럼 맺혔던 소년 그대로였는데...


" 많이 힘들었나 보네. "

담배를 끄고 그는 내게 다가와 내 등을 토닥토닥 두드린다. 언제나 그렇듯 그의 품은 따스하고 두근거리고 그립기만 했다. 그런 경윤의 품에서 한발 물러나 나는 바닥을 바라봤다. 그리고 크게 한 숨을 쉬었다.


" 후우~~ 들어가자. 다 식겠다."

느닷없이 경윤은 자리에 앉자 마자 내게 물어온다.


" 그래서 그 투명인간은 언제쯤 보여줄 건데?"

" 응? 누구?"

" 피식. 그 니 등 뒤에 그 백수애인 말이야. "


이미 그는 알고 있는듯 했다. 그 백수애인이 허구라는 사실을. 이제는 더 감춘다고 내가 뭐라 해도 안 믿을 거면서. 그는 능청스러움도 스킬이 늘었다. 그런 그를 나는 물끄러미 올려다보며 닭다리를 물었다.


" 어흥. 너 그러다 투명인간한테 잡혀가는 수가 있다?"

" 뭐 물어가라지 뭐. 그럼 내가 너 잡고 튀어야지. "


" 피식 뭐래니. 술이나 먹어."

그렇게 말하며 나는 그에게 잔을 들었고 그는 잔도 채 치지 않고 연신 술을 마셨다.


" 어쭈 이제 술도 제법 잘 마시네?"

" 당연하지. 사회생활 몇 년인데. 적어도 너보다는 먼저 뻗으면 안 되지 않겠어?"








이전 03화5-3. 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