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배달해준다는 것을 급하다는 핑계를 대며 기어이 설득하여 용달까지 불러서 차에 실어 집에 들이고 설치도 혼자 20대 알바하면서 익혔던 솜씨를 발휘해서 대충 연결하고 핸드폰에 노트북으로 인터넷 연결까지 하고 미러링으로 거실 쇼파에 앉아 TV를 틀자, 그제야 갑자기 끌렸던 미국 이야기들이 화면에 채워졌다.
나는 궁금했다. 왜 그녀는 다른 때는 그래도 답은 하는데 유독 오늘 내 말은 일씹일까.
화면에서 겨우 잡은 CNN뉴스에서는 미국 위싱턴에서 있었던 테러 소식이 자막으로 전해지고 있었다.
" ...국방부 관계자 말에 따르면 인체에 내장된 것으로 의심되는 폭발물로 인하여 사상자가 발생하였으며 피해규모와 건물 내부는 정부주요기관인 관계로 파악중이며 테러로 의심되는 정황인지에 대하여는 보다 국가적인 차원에서 신중하고 면밀히 조사중이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
스치듯 잡힌 영상에서 폭발의심되는 남성의 얼굴은 주홍빛으로 붉게 물들며 핏줄이 선명히 드러나며 화면이 바뀌었고 곧이어 아수라장이 된 현장도 화면이 정지되며 넘어가고 촬영을 중단하라는 외침이 자막으로 동시에 번역되며 채 편집도 제대로 되지 못한 영상들이 그렇게 어지럽게 화면을 메우고 있었다.
' 젠장 미국 소식이나 들으려던 건데 하필 CNN 채널을 잡아서는... 미국에 뭔가 일이 생겼나보네. '
안그래도 속시끄러운 날 눈에도 들어오지 않는 영상을 보고는 화면을 꺼버리고 나는 리모컨을 멀리 던져 버렸다. 그래 수요일까지만 참자. 그때면 인터넷도 제대로 연결되고 다른 채널도 볼 수 있을 테니까.
침대에 누어서 물끄러미 핸드폰을 들어 서우의 톡을 보고 다시 페이스북에 혹시 그녀에 관한 이야기는 없는지 이리저리 뒤져봐도 그녀는 그 흔한 페이스북에 인스타그램조차 하지 않았다. 고대생물인건가. 요즘사람 같이 않은 그녀의 행보는 알려고 들 수록 미궁에 빠지는 것만 같았다.
월요일 점심.
김부장과 식사를 하며 이것저것 물어보는 김부장에게 몇가지 서우와 관련된 이야기를 대강 둘러대며 형의 병원에 다녀온 이야기를 하고 그렇게 그녀와 몇번 식사를 한 이야기와 키스를 한 이야기를 하고나자,
" 흠. 딱 보니 알겠던데. 이과장은 전혀 눈치 못챘어?"
" 뭘요?"
" 그 민경사. 좀처럼 틈이 없는 사람이잖아. 이과장 말대로 미국에서 왔다면 그 나이쯤이면 연애도 해봤을거고 자유로운 개방사회에 뭐 하나 빠질 것 없는 환경에서 지냈을 텐데. 구지 한국까지 와서 이런 촌구석에 박혀 지내는데 말이야. 안그래?"
" 뭘 눈치채요?"
" 허 참. 자 봐봐. 결혼을 하면 미국이 살기 좋을까. 우리나라가 살기 좋을까? 아니지. 반대로 여자 혼자 살기에 미국이 안전할까. 한국이 안전할까? "
" 거야. 미국요?"
" 허허. 이사람. 왜 그렇게 생각하는거야?"
" 아무래도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거기서 지냈고 이제껏 혼자서도 잘지냈으니까. 아니 그런데 그거랑 제 고백이랑 무슨 상관이에요. 도대체."
" 잘보라구. 미국은 결혼을 하면 우선은 국가에서 정책적으로 많은 지원이 되는 나라야. 아이를 나으면 더하지. 그래서 오히려 혼자 살기보다는 동거나 결혼을 해서 같이 사는 경우가 많아. 그래야 여러 사회보장시스템에 혜택을 누리니까. 그런데 서우씨는 그런 것도 없이 지냈다며. 그렇다는 건 그만큼 그런 혜택이 필요없는 고위 관계자일 가능성도 배제 못하지. 거기에 여자 혼자 살았다? 연애도 거의 안하고 일만 하고? 그게 말이 쉬워 그렇지. 주변에서 가만히 두겠어? 어디 몸매가 빠져. 인물이 빠져. 뭐 그렇다고 이과장이 못생겼다거나 그런건 아니지만. 뭐 이과장도 이정도 인물에 이정도 키에 재력에 뭐하나 빠지는 건 없지. 돌싱인거랑 네 좁아빠진 속 빼고."
" 김부장님..."
나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리자, 김부장은 슬그머니 입에 물었던 커피를 손에 움켜쥐고는
" 그러니 보라구. 그정도 혼자 생활해왔으면 자신의 생활패턴에 젖어서 어지간한 남자는 눈에도 안들어올거고 자네가 모든 걸 갖추고 모셔와도 쉽지 않을 상대란 말이야. 하물며 성격도 이미 어느정도 자신의 성향이 자리잡았을텐데. 어린 여자들에 비해 감당하기 힘들면 힘들지. 안그래? 자기 기준이 그렇게 확고한 사람한테 냅다 고백하고 마치 당장 결혼이라도 하자는 듯 바로 집에 데려오려한 건 너무 성급한 행동이었단 말이야. 내말은."
마치 내 무지를 깨부순 것 마냥 통쾌해 하는 김부장의 표정과 달리 나는 그녀에 대해 솔직하게 다 말하지 못해 생긴 오해들로 섯불리 김부장이 판단한 부분에서 단단히 착각한 것까지 대략 난감함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더는 자세히 말할 수 없는 마음에 그런 김부장의 생각에 동의 하는 것 마냥
" 아... 형님 말을 들으니 그런 것 같습니다. 제가 잘못했네요. "
" 그렇지? 암튼 뭐 이왕 그리 된거 열심히 두드려봐. 또 알아? 그러다 보면 열릴지. "
그렇게 말하며 김부장은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며 음흉한 눈빛으로 나를 스윽 내려다 본 뒤
" 그런 의미에서 내가 한동안은 이과장 야근 못하게 철통방어하겠어. "
그렇게 말하며 먼저 자리를 떴다.
어이 없는 해석이기는 해도 일정부분 내가 미쳐 생각지 못했던 그녀의 생활과 사고 방식의 차이는 어쩌면 김부장의 말과도 일맥상통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 나름의 확고한 신념이 있듯 그녀가 마음이 있음에도 나를 밀어내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테니까.
퇴근 무렵, 사무실에서 두문분출하던 허사원이 갑자기 내곁으로 다가와 내게
" 이과장님 오늘 저녁 사신다면서요?"
" 네? 제가 언제? "
나는 당황하며 그녀를 바라봤고 그녀는 의기양양하게 내게 고개를 숙여 귓속말을 하는가 싶더니, 내 컴퓨터에 USB를 꼽아 화면을 띄웠다. 그리고 잽싸게 내 귀에
' 이 영상 . 경찰에서 보면 몹시 궁금할텐데. 안그래요?'
화면에는 내가 박경장의 차에서 내려 박경장을 내동댕이 치고 달아나는 장면이 찍혀 있었고 내가 놀라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는 잽싸게 USB를 뽑아서 호주머니에 넣고는 짧은 미니스커트로 선명히 드러나는 엉덩이를 살랑 살랑 흔들며 걸어가다 뒤돌아보더니
" 그럼 주차장에서 기다릴게요."
그렇게 말하며 이내 사라져 버렸다.
내가 놀라서 주변을 두리번 거리자 그새 다들 퇴근을 하고 나만 덩그러니 사무실에 남아 있었다. 서둘러 사무실 문을 열고 나가는데 김대리가 후다닥 사무실로 달려 들어왔다.
" 김대리 퇴근한거 아니야?"
" 아 저 정대리 여행갔잖아요. 안그래도 바쁜데 구내식당에서 밥만 서둘러 먹고 올라왔습니다. 얼른 끝내고 저도 퇴근하려구요. 근데 그 사이 허은설씨는 퇴근했어요? 오늘 되게 섹시하게 꾸몄던데... 아 까비... 얼굴볼려고 서둘렀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