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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onrightsea Nov 05. 2023

#1-34. 다섯 번째 별

전환

" 정신이 들어요? 일어났으면 출근해요. 더 늘어지면 늦어요."


나를 흔들어 깨우는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호텔방이었다. 시계를 보자 오전 5시. 창밖으로 아직 어둠이 내린 어두컴컴한 바다가 하늘과 맡닿아 보일랑 말랑한 곳. 하지만 꽤나 눈에 익은 곳.

강릉이었다. 서우와 전에 왔었던 그곳.

나는 여기 어찌 온 것인가.


고개를 돌려보니 나를 깨운 건 서우가 아니라 은설이었다. 그녀는 이내 벌거벗었던 몸뚱이에 실크가운을 걸친 채 천천히 내 곁에서 일어나 주섬주섬 화장실로 향했다.

침대에 앉아 끊어진 기억을 되돌리려 노력을 해도 도통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내가 어찌 이곳에 오게 된 것일까. 그날의 기억은... 도대체 며칠 전인가. 아니면 꿈속의 기억인가. 그곳은 어딘가...


내가 머리를 부여잡고 있자, 물기도 채 닦지 않은 채 물을 온몸에서 뚝뚝 떨어뜨리며 수건으로 머리만 겨우 돌돌 말고 나온 은설이 내 팔을 잡아 이끌었다.

" 정신 차리려면 샤워를 해야 해요. 어서. "


그렇게 말하고는 나를 밀어 화장실 샤워부스로 데려갔고 그녀는 천천히 내게 뿌려대는 물줄기 사이로 내 몸에 바디클렌저를 바른 뒤 내 몸을 씻어내고 있었다. 내가 정신을 차리고 이내 밀려드는 부끄러움에 그녀를 샤워부스밖으로 밀어내고 머리로 물줄기를 맞고 있자 그녀는 웃으며

" 이미 다 봤는데 어제 온종일 그렇게 맨살로 같이 있었는데 뭘 이제와 부끄러워해요?"


그녀의 말에 잔뜩 화가 난 나는


" 거짓말하지 말아요. 내가 그랬다고? 아니 절대 그럴 리 없어. "


내가 그렇게 말하며 샤워를 하고 나오자 그녀는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 뭔가 기억이라도 난 거예요?"


" 아니. 난 다른 건 몰라도 내가 그랬을 리 없다는 건 알아. 그건 확신해. "


내가 그렇게 말하며 화장실에서 나와 냉장고 위에 올려진 물을 한잔 마시자 그제야 은설은 웃으며 내게 양복을 내어주었다.

" 참 특이해. 이렇게 재미없는 남자가 어디가 좋다는 거야. 서우는. 이거 입어요. 출근하려면."






은설을 따라 체크아웃을 하고 나와 주차장으로 향하자 그때 보았던 스포츠 대신 경차가 있었다. 그녀가 평소 회사에서 타고 다니던 차.


" 당신 정체가 뭐야?"


" 뭐 같이 일하면서 그걸 물어보는 건 너무 늦은 거 같은데..."


내가 그녀를 빤히 바라보자 그녀는 못 본 척 음악을 크게 틀고는 운전을 했다.

회사 주차장에 도착하자 이른 시각이라 그런지 아직 출근한 사람이 없었다. 내가 차에서 내리자 웬일인지 은설은 내리지 않고 창문을 연채 내게 말했다.


" 전 아직 이른 시각이라 집에 갔다 올게요. 이러고 가기에는 너무 옷도 그렇고... 스타일이 아니라서."


그렇게 말한 은설은 이내 차를 몰아 주차장을 빠져나갔고 나는 입구로 가서 담배 한 대를 피며 멍하니 어제의 기억을 되네이며 끊어진 필름 속 기억을 되찾으려 애를 썼다. 물끄러미 바라본 휴대폰에는 서우에게 걸었던 통화내역만 있을 뿐. 서우에게 걸려온 전화는 없었다.


사무실로 들어서려는데 이른 아침부터 김 부장이 도착해서는

" 출근했네? 안 그래도 전화하려던 참인데 오늘 아침에 긴급회의가 소집돼서 아침부터 비상이야. 일단 간부급 회의인 걸로 아는데 웬일인지 나도 나오라고 해서 가는 참인데 이렇게 일찍 어쩐 일이야?"


" 아 일이 있어서 일찍 출근했어요. 지난주는 감사했어요. "

" 일은 잘 마무리된 거야? 아직 병가 며칠 더 남았는데. 좀 쉬다 오지 그랬어?"


" 아. 쉬어봐야 별일 없을 것 같아서요. 그냥 나왔어요. "


김 부장과 이야기를 하며 사무실로 들어서자, 이내 김 부장은 커피 한잔을 내게 가져다준 뒤 바로 회의실로 향했다.




바쁘게 돌아가는 회사일을 미쳐 정신 줄을 놓고 지내며 놓친 일들을 처리하고 보니 어느새 점심때가 가까워져 있었다. 아침 8시도 전에 회의에 참석했던 김 부장의 자리를 보니 아직도 회의가 끝나지 않은 것 같았다. 웬일인지 30분도 안돼서 끝나는 회의가 몇 시간에 걸쳐 진행되는 걸 보니 오랜만에 옛날 생각이 났다.


 처음 입사를 하고 김 부장을 따라 회의에 참석했을 때 김 부장은 불같이 화를 내며 부서원으로 입사 수석이 아닌 내가 배치받아서 몹시도 화가 난 상태였다. 보통 입사를 하면 수석으로 성적이 좋은 직원이 뽑혔으면 전략실이나 경영지원부에 배치받는 게 우선인데 웬일인지 그해는 입사 수석에게 배치받을 부서를 자율로 정하도록 기회를 주었고 오리엔테이션까지 거치며 부서를 열렬히 홍보해서 나름은 입사 수석과 긍정적인 관계를 맺었다고 생각해 기대해 왔던 김 부장은 입사 수석이 돌연 퇴사를 해버리고 본의 아니게 그 빈자리에 내가 배정되어 오자 나름 실망이 컸던 것이다.


한참을 자신이 한 노력을 열심히 설명하던 김 부장은 끝내 화를 내며 회의장을 나가버렸고 나는 본의 아니게 미운털이 박히면서 한동안은 한참 일을 배울 신입시절 아무도 일을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어서 꽤나 곤욕을 치렀었다. 그랬던 게 엊그제 같은데 김 부장은 그런 내가 안쓰러워 어느새 미안한 마음이 들었는지 회식자리마다 나를 챙기며 데려 다녔고 그러면서 친분이 생겨 어느새 가까워졌었다.


멍하니 책상에 앉아 과거 기억에 사로 잡혀 있을 때 느닷없이 회의를 끝내고 나온 김 부장이 나를 불러 회의실로 향했다.





" 도대체 해외 파견은 언제 신청한 거야?"

" 네?"

" 여기 봐. 네가 해외 파견 신청을 했었는데... 진짜야?"

" 아... 네. "

" 헐. 진짜였네? 이거 일 났네. 일 났어. 자네 해외 파견 되었어. 느닷없이 이게 무슨 경우야?"

" 아 그건... 이미 3년 전에 한 건데..."


아내와 이혼을 하고 더는 이곳에 머물기 힘들어 나는 해외 파견 신청을 했었고 그 후 이혼 조정기간을 거치며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그런데 하필 이 타이밍에 해외 파견이라니.


" 회의 들어가서 아무리 지금은 본인이 그런 의사가 없다고 말해도 도통 말이 먹혀야지. 어찌 된 일인지 다른 직원들 신청한 사람 다 놔두고 네가 우선순위라나 뭐라나. 암튼 무를 수가 없어. 내가 아무리 말해도."


김 부장은 미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본인의 잘못도 아닌데 말이다.

" 김 부장님 그렇게 미안해하실 필요는 없어요. 제가 가족이 있는 것도 아니고 가라면 가야죠."


" 아냐. 이 과장 이게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냐. 뭐 듣도 보도 못한 해외전략 기획 팀이라는데 내가 오래 봐와서 알지만 이렇게 처음 생긴 부서는 언제 사라질지도 모르고 가서 어떤 일이 생길지 알고 거기를 냅다 가?"


"..."

김 부장은 그러고도 한동안 한참을 그 새로 생긴 부서가 의문이라는 둥 온갖 의구심을 가지고 나에게 한참을 이야기했다. 하지만 나는 속으로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이렇게 내 주변이 혼란스러운데 오히려 해외 파견을 가면 예전처럼 그저 평범한 삶을 살 수도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


모든 것을 다 잊고 그저 일만 하던 시절로 되돌아간다면 오히려 더 마음이 편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머릿속에 스치듯 지나갔다.


자리로 돌아와 보니 책상 위에는 사직서가 놓여 있었고 안을 보자 허사원의 사직서 였다.


' 개인 일신상의 이유로 사직합니다.'


나는 허사원을 불렀다.

" 왜 갑자기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둔다는 거요?"

" 더는 다닐 이유가 없어져서요. "


내가 의아해 하며 허사원을 올려다 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 정말 그게 다예요?"

" 네."

" 알겠습니다. 그럼 사표 수리 하겠습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허사원은 짐을 챙기더니 웃으며 인사를 건네고는 사무실을 나가버렸고 김대리와 정대리 옆 부서 허과장까지 내게 와서는 왜 그만둔 것인지 꼬치꼬치 물었지만 나는 별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녀의 행동이 별달리 이상해 보이지 조차 않았다. 되려 왠지 이제야 그만두는게 이상하게 느껴질 뿐.

 

' 회사야 뭐 개인 사정이 생기면 언제든지 그만 두면 되는 곳이긴 하니까.'




출장을 내고 본사에 가 안내 받은 회의실로 들어서자 제법 많은 인원이 모여 있었고 나는 출입구 근처 구석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한참을 앞에서 설명을 하고 질문을 받으며 해외 파견과 관련된 내용을 브리핑하던 본사 직원에게 밖에서 누군가 들어와 귓속말을 하는 듯 하더니 나를 불렀다.

" 이휘우 과장님이시죠? 과장님은 나가서 5층 회의실로 가시면 됩니다. "


" 저만요?"

" 네. 지금 이동부탁드립니다. "


나는 이내 고개를 갸우뚱 거리며 5층으로 이동을 했고 그 곳에는 5명 정도의 직원이 모여 있었다. 나를 제외하고는 다들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사람들. 그들 틈에 낀 나는 괜히 더 나이가 들어보여 어색하게 느껴졌다.


어색한 분위기에 물잔의 물을 마시고 긴장한 채 앉아 있자, 한 사람이 들어와서 인사를 건넸다.

" 반갑습니다. 이렇게 만나뵙게 되어 영광이군요. 여기 모분들은 모두 해외전략 기획실에서 근무하시게 될 분들로 오늘 이자리는 특별한 분이 오셔서 설명을 드릴 예정입니다. 자리는 이곳에서 설명을 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서 나가서 따로 마련된 장소로 이동해 이어질 예정입니다. 다들 짐 챙기시죠."


어리둥절한 나와 달리 다른 사람들은 일사분란하게 짐을 챙겨 밖으로 향했고 로비를 벗어나 건물 입구로 나오자 검은 색 벤이 준비 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게 차에 올랐고 나도 얼떨결에 그 차에 오르자 차량은 빠른 속도로 서울 시내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 도대체 어디를 가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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