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만약에 우리>를 보고 난 소회
사실 원래 보려던 영화는 이게 아니었다. 포스터와 시놉시스를 보는 순간 어떤 결의 영화인지 바로 왔기 때문이다. 이런 류는 조금 오글거리고 불편하다. 한편으론 과몰입하고 먹먹해지는 그 느낌이 싫어서, 일부러 피하고 싶기도 했다.
아니나 다를까, 영화는 첫 장면부터 오래된 연인의 재회와 과거 회상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소심한 남자애, 은호의 플러팅이 시작되고 정원은 신경 안 쓰는 척하면서도 슬쩍 마음을 연다.
은호는 시종일관 과거의 내가 보여줬던 찌질함을 나열한다. 제대로 마음을 전하지도 못하면서, 경쟁자가 나타났을 때는 질투하고 못나게 군다. 정원은 그런 은호를 편하다, 친구다, 우정이다 같은 말로 정리해 버리고, 자기가 가지지 못한 학벌과 경험을 가진 다른 남자의 매력을 더 크게 본다. 그런데도 은호는 그 남자와 잘 되어 가도록 정원의 알바를 대신 뛰어준다. 해야 할 건 하지 못하고, 하지 말아야 할 건 끝까지 고집하던 찬란하게 미련했던 그 시절의 내 모습이 겹쳐져서, 볼 때마다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은호의 집에 정원이 들어오게 되면서, 둘이 사귀는 건 시간문제였다. 다만 계기가 필요할 뿐이다. 정원이 자기 고시원에 한 뼘도 안 되는 햇빛 이야기를 하자, 은호는 바로 커튼을 열어 방 안 가득 햇빛을 비추게 한다. 그리고 “이거 다 네 거 해”라고 말한다. 대부분 에바인 은호의 언행 중에서 몇 안 되는 ‘잘한 짓’이었다. 그때 은호는 정원의 마음을 같이 연 것이다.
이후 전개는 뻔하다. 상대 남자의 바람으로 정원은 은호와 하룻밤을 보내고, 피하지만 결국 다시 만난다. 사실 정원도 은호를 오래전부터 좋아했었다. 하지만 은호는 자신의 돌아갈 곳이었다. 은호와 깨지는 순간, 돌아갈 곳도 사라진다는 두려움이 있었던 거다. 정원이 망설이던 순간, 은호는 간만에 칭찬할 ‘입술박치기’로 말 대신 행동으로 설득한다.
둘은 오랜 기간 친구였기에, 같이 있을 때 더할 나위 없이 편하고 즐겁다. 서로에게 의지가 되어준다. 은호만 너무 못나게 그려졌다고 느껴질 수도 있지만, 그 나이대 연인들은 서로에게 대체로 바보같이 군다. 다만 여기서는 은호가 좀 더 심하다.
남자는 참 고달픈 생물이다. 끊임없이 자신의 유능함을 증명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심지어 상대가 요구하지도 않는데도, 혼자서 그렇게 몰아붙인다. 은호는 졸업도 못한 상태에서 직장도 다니고, 아버지의 병원비도 감당해야 하고, 정원의 뒷바라지도 해야 한다. 거기에 남들 못지않게 성공해야 한다는 압박까지 스스로 짊어진다. 그런데 그 나이대에는 이 모든 게 잘 안 된다. 그럴 때 남자는 자기에게 화가 난다. 하지만 어떻게 화를 풀어야 할지 모른다. 그리고 그 화는 하필이면 주변 사람, 그 중에서도 여자친구에게 풀리게 된다.
오죽하면 주변에 행패를 부리는 은호의 뺨을 올리며 정원은 말한다.
“그렇게 패고 싶으면 나를 패라.”
거기에 은호는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한다. 정원의 폰을 몰래 훔쳐봐서 알게 된 내용을 바탕으로 정원을 의심하는 듯한 말을 내뱉는다. 그 장면에서 정원을 맡은 문가영의 연기에 감탄했다. 그토록 세상이 무너질 것 같은 표정이라니. 은호도 그제야 아차 싶어 서둘러 달래지만, 우리는 안다. 이미 관계는 금이 가버렸다는 것을.
이후에도 계속 안 풀리는 은호는 사사건건 정원에게 짜증을 내는 게 일상이 되어버린다. 그러던 중 방구석에서 게임만 하던 은호 옆에 있던 창을 정원이 열어 환기한다. 그 답답한 마음을 알기에 숨이라도 쉬라고 열어준 그 창문을 은호는 짜증을 내며 커튼까지 닫아버린다. 처음 커튼을 열며 정원의 마음을 열었던 은호는, 그 손으로 커튼을 닫으며 정원의 마음도 닫아버렸다.
늦게나마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닫고 은호는 서둘러 쫓아간다. 그리고 지하철을 탄 정원을 발견한다. 문이 닫히기 전 충분히 그녀를 끌어내리거나, 같이 탈 수도 있었지만 은호는 오히려 움찔하며 살짝 뒷걸음친다. 그리고 지하철은 그대로 지나가 버린다. 그 순간 정원은 몰랐겠지만, 이미 눈으로 말하고 있었다. "우리는 끝났고, 이 이상 더 해봤자 되풀이될 뿐이라고!" 은호도 그것을 무의식적으로 읽었고, 그 순간 “그렇지 않아!”라고 자신할 수 없었기에 뒷걸음치듯 움찔했을 것이다.
남은 이야기는 다시 만난 은호와 정원이 “그때 이랬다면 어땠을까”를 되뇌며 눈물짓는 것, 그리고 아버지를 통한 신파가 전부다.
이 영화를 보는 내내 <건축학개론>의 미숙했던 남주가 떠올랐고, 동시에 <패스트 라이브즈>에서 ‘만약’을 붙잡고 끝없이 고민하던 여주도 겹쳐 보였다. 물론 치기 어린 내 어린 날도 주마등처럼 흘러갔다.
인연이란 도자기 같아서 이미 부서진 뒤에는 아무리 붙여도 틈이 생긴다. 더 무서운 건, 그 틈이 언젠가 다시 깨질 거라는 걸 둘 다 어렴풋이 알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만약’은 희망이 아니라, 결국은 되돌릴 수 없다는 걸 확인하는 질문이 된다.
우리 모두는 실패를 통해서만 깨닫고 배우는 멍충이들이다. 그래도 다음 사람에게는 조금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서로에 대해 끈을 놓치지 않을 만큼 성숙해졌을때, 아마도 우리는 평생을 함께 할 짝을 만나는 것 아닐까?
#만약에우리 #구교환 #문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