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힘듦은 나의 힘듦과 다르다.

영화 tick, tick... BOOM! 에 대한 소회

by 미스터델루나

나는 원래 이 영화를 고르지 않았다. 포스터와 시놉시스만 봐도 어떤 종류인지 알 것 같았다. 청춘, 고생, 꿈, 그럼에도 불구하고—그 조합은 대체로 내 마음을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과하게 건드린다. 그 먹먹함이 싫어서 피하고 싶었다. 그런데도 보게 됐고, 보고 나서 이상하게 집에 오는 내내 마음이 껄끄러웠다. 감상이 아니라, 감정이 남았다.

Tick, Tick…Boom! 이 건드리는 건 “성공”이 아니라 “시간”이다. 서른이라는 숫자가 목덜미에 붙은 태그처럼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시간. 작품이 안 풀리는 날, 돈이 없는 날, 주변이 앞서가는 것 같은 날, 그리고 무엇보다 나만 제자리인 것 같은 날. 영화는 그 압박을 ‘창작자의 불안’이라는 이름으로 내내 밀고 간다. 1990년대 초 뉴욕에서, 라슨은 작품을 쓰고, 연습을 하고, 사람을 만나고, 자꾸 흔들린다. 그리고 그 흔들림이 오히려 영화의 중심을 잡는다.

그런데 나는 그 “흔들림”이 달갑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건 내게 너무 익숙한 감각이기 때문이다. 내가 뉴욕으로 유학을 갔을 때 난 이미 서른을 넘겼다. 내 주변의 열 명 중 여덟은 나보다 어렸고, 그들은 내게 없는 무기—젊음, 언어의 속도, 그리고 이상하게도 꺾이지 않는 밝음을—이미 갖고 있었다. 나는 밝지 못했다. 재능이 출중하지도 않았다. “버티는 법”만 알았지, “즐기는 법”을 모르고 살았다. 밤을 새우고, 안 되는 영어를 붙잡고, 하루에 세 시간도 못 자며 작업을 해도, 내가 누군가의 ‘사람’으로 남는 느낌은 없었다. 그때의 나는 한 번만 넘어지면 끝이라는 방식으로 살았다. 그래서 넘어졌다.

영화 속 라슨은 힘들어도 곁에 사람이 있다. 그게 내게는 제일 부러웠다. 창작자의 불안은 혼자서도 견딜 수 있다. 그런데 ‘혼자 견딜 수 있다’는 말은, 사실은 ‘혼자 견딜 수밖에 없다’는 말과 가깝다. 내게는 후자였다. 그래서 영화의 노래와 에너지가 어느 순간부터는 응원이 아니라, 잔인한 대비처럼 느껴졌다. “봐, 너는 이걸 못 했잖아.” 같은.

여기서 영화가 흥미로운 건, 그 대비를 일부러 숨기지 않는다는 점이다. 미란다의 연출은 과장된 영웅 서사를 크게 만들기보다, 라슨의 시간을 가까이에서 붙잡는다. 그래서 이 영화는 “위대해지는 이야기”라기보다 “버텨내는 이야기”처럼 보인다. "그 버텨냄의 기록이 결국 라슨이라는 사람을 설명한다"라고 평론이 말하는 ‘겸손하고 친밀한 톤’이 바로 그 지점이다.

그런데도, 아니 그래서 더, 나는 질투를 했다. 영화 속 인물이 힘들어하는데 왜 질투를 하냐면, 힘듦의 질이 달라 보였기 때문이다. 라슨의 힘듦은 “지금 이 시간을 통과하면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전제가 깔린 힘듦이다. 반면 내가 겪었던 힘듦은, “통과해도 아무것도 안 될 수 있다”는 공포가 밑바닥에 있었다. 그러니까 같은 ‘고생’이어도, 한쪽은 희망을 품고 있고, 다른 한쪽은 희망을 경계해야 한다. 희망을 품고 살기에는 나는 너무 늦게 출발했고, 너무 많이 다쳤다.

그래서 영화 모임에서 다들 활발하게 이야기할 때, 나는 한마디가 안 나왔다. 영화가 재미없어서가 아니라, 내 마음이 내 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밝음이 부러웠고, 그 부러움을 인정하는 순간 내가 더 초라해질까 봐 입을 다물었다. 부러움은 이상하게도 자존심과 같이 온다. 슬픔은 위로받고 싶어도, 부러움은 들키고 싶지 않다.

그날 내가 느낀 감정의 정체는 결국 이것이었다: “나는 아직도 그 시절에서 완전히 빠져나오지 못했구나.”
유학 시절의 나는 ‘사람이 없는 밤’을 너무 많이 견뎠고, 그래서 사람을 가진 누군가의 고생담을 보면, 그 고생보다 그 ‘사람’이 먼저 보인다. 영화가 라슨의 불안을 노래할 때, 나는 내 불안을 다시 떠올렸고, 내 불안은 대부분 사람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같이 웃어줄 사람이 없는 불안, 같이 망해줄 사람이 없는 불안, 같이 늙어갈 사람이 없는 불안...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 영화가 내게 남긴 게 그것만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만드는 사람”의 얼굴이 남았다. 성공이든 실패든, 결국 창작자는 시간을 재료로 쓴다. 시간을 깎아 먹고, 잠을 바치고, 관계를 흔들어가면서도 끝내 무언가를 만든다. 그게 아름답다기보다, 무섭게 정직하다. 그리고 그 정직함이 나를 불편하게 했다. 왜냐하면 나도 안다. 내가 아직도 무언가를 만들고 싶은 사람이라는 걸.

그러니까 그 밤의 껄끄러움은, 단순히 영화가 남긴 여운이 아니라 내가 내게서 확인한 사실이었다. 나는 아직도 부러워할 줄 아는 사람이고, 아직도 만들고 싶은 사람이며, 아직도 내 시간을 되돌려보고 싶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부러움은 보기 싫은 감정이지만, 동시에 “아직 욕망이 살아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게 되면, 부러움도 사라진다.

그날 나는 영화가 아니라 내 과거를 보고 온 것 같았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건 나쁘기만 한 경험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나는 그 과거에서 살아남았고, 지금은 적어도 “그때의 나”를 재료로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라슨의 이야기를 보며 내가 불편했던 이유는, 내가 실패와 상실을 너무 많이 겪어서가 아니라, 아직도 내 안에 ‘가능했을지도 모르는 나’가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결론은 단순하다.
나는 그 영화를 좋아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 영화가 내 마음 어딘가를 정확히 건드렸다는 건 인정해야 한다. Tick, Tick…Boom! 은 누군가에겐 청춘의 찬가일 수 있고, 누군가에겐 “그 시절을 놓쳤다”는 통증일 수 있다. 나에게는 후자였다.

그리고 그 후자는, 생각보다 오래 남는다. 하지만 오래 남는다고 해서, 반드시 나쁜 건 아니다. 오래 남는 감정은 대개 내가 아직 끝내지 못한 질문과 연결되어 있으니까.

“나는 내 시간을 어떻게 쓰고 있는가.”
“나는 누구와 함께 버틸 것인가.”
“나는 무엇을 만들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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