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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규 Nov 08. 2019

페흐 라쉐즈에서 세월호 리본을 만나다 (1)


낯선 도시에 가면 유명인이 묻힌 묘지를 즐겨 찾습니다. 특별한 연고가 있을 리 없으니 거기 묻힌 누군가의 인생을 만나러 가는 거지요. 묘지만큼 특정인이 살다간 흔적을 압축하여 보여주는 장소가 없으니까요.

일본이든 미국이든 유럽이든 문화와 국가를 막론하고 모든 묘지는 일상의 번요를 떠나있습니다. 그저 말없이 고요합니다. 흔들리는 나뭇잎 사이로 햇살이 그림자 춤을 추는 곳. 묘석과 흉상 사이를 천천히 걷노라면 치열하게 자기 시대를 살다 간 사람들이 말없는 말을 건넵니다. 제가 찾아간 페흐 라쉐즈 묘지 또한 그러했습니다(사진 1).



19세기 초에 만들어진 이 묘지에는 7만기가 넘는 가족 및 개인 묘가 있습니다. 7월 25일 일요일 오전 11시. 파리 지하철 2, 3호선이 겹쳐 지나는 <페흐 라쉐즈> 역에서 내려 벽을 따라 300미터 쯤 걸어가니 정문이 나옵니다. 입구 안내소에서 지도를 받아야 할 정도로 묘역이 넓습니다(일요일에는 지도 배부가 없어 폰 사진으로 안내판을 찍은 후 일일이 화면을 확대해가면서 찾아다녔지요^^ (사진 2).



총 97개 구역으로 나눠진 페흐 라쉐즈에는 프랑스(와 유럽) 근현대사를 대표하는 유명인들의 묘가 가득합니다. 세계 각국에서 찾아온 여성 팬들이 묘비에 수많은 립스틱 자국을 남기는 것으로 유명한 오스카 와일드의 무덤, 그 밖에도 발자크(48번 구역), 쇼팽(12번 구역), 에디트 피아프(97번 구역)와 한때 그의 남편이었던 이브 몽땅(44번 구역) 등이 영원의 잠을 자고 있습니다.    

저에게 있어 페흐 라쉐즈는 이미 십년 전에 다녀가야 했던 곳입니다. 그 해 국제광고제 때문에 칸느 갔다가 파리를 거쳐 귀국했는데 이상하게 일정이 꼬였지요. 마음만 간절했을 뿐 도저히 찾아갈 도리가 없었지요. 이번 여행에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방문하리라 출발 전 단단히 결심을 했습니다. 이유는 한 가지, 묘지 북동쪽에 있는 <파리 코뮌 전사들의 벽(Mur des Federes)>을 찾기 위해서였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파리코뮌(Pari Commune)은 세계 최초의 노동자 자치정부. 1871년 보불 전쟁패배 후 부패 무능한 정부군 대신 파리 시민들과 노동자들이 자체 무장을 했지요. 그리고 선거를 통해 시 전역을 통괄하는 민중 주도의 새로운 입법, 행정 정부를 구성하고 당시로는 혁명적인 정치, 사회, 경제, 문화적 개혁 정책을 실시했던 게지요. 이 비운의 정부가 존속한 시기는 1871년 3월 28일부터 같은 해 5월 28일까지 고작 2달이었습니다.  

5월 21일 파리코뮌의 급진성과 대외적 영향력에 공포심과 증오를 품은 정부군과 프로이센 연합군이 파리를 침공합니다. 튈르리 궁전 공원(루브르 박물관 뒤에 위치. 지금은 커다란 관람차가 돌아가는 시민공원으로 유명합니다. 사진 3)에서 열린 “코뮌전사자 가족을 위한 음악회”를 틈탄 기습 공격이었습니다.



방어선을 돌파한 2만 정부군(다음날 7만명 증파)은 눈앞에 보이는 모든 코뮌군과 시민들을 잔인하게 죽입니다. 그리고 파리 서쪽에서 동쪽으로 대대적 추격전을 벌입니다. ‘피의 1주일’이라 불리는 대학살이 시작된 것이지요(지난 시절 많은 사람들이 광주민주화항쟁 이 사건에 비유했던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대혁명 시기에 나타났고 1830년, 1848년 혁명에도 다시 등장했던 바리케이트가 시내 곳곳의 도로에 설치됩니다(사진 4). 압도적인 인원과 무력을 행사하는 정부군과의  싸움은 애초부터 상대가 되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전투라기보다는 차라리 학살에 가까운 시가전을 통해 수많은 코뮌군과 비무장 시민들이 무차별 살해됩니다.



지금은 무명화가들의 이젤 행렬로 유명한 몽마르트 지역의 경우, 바리케이트를 친 코뮌군 전부가(여성 100명 포함) 잔인하게 죽임을 당합니다. 당시 정부 공식 통계만 하더라도 총살 후 매장비용이 지불된 희생자가 1만 7천명이었으니, 비공식적으로는 얼마나 많은 이들이 희생되었는지 아무도 모릅니(사진 5).



전투 중에 3만명에 가까운 코뮌전사와 시민들이 죽임을 당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전투 종결 후에는 코뮌 가담자 및 지지자 4만명이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그 중 1만명이 사형을 받았고 7000명 이상이 국외 추방을 당합니다(예를 들어 사실주의 회화의 선구자였던 쿠르베는 상상을 초월하는 벌금에 파산을 한 후 스위스에서 비참하게 숨을 거둡니다).

코뮌 소멸 이후에도 정부군과 그 주구들의 백색테러가 끊임없이 이어졌습니다. 세느강에 푸른 강물 대신 코뮌나르(코뮌 지지자)들의 시체가 흐른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답니다.  

피의 일주일의 엿새 째, 5월 27일에는 파리 전역에 비가 내렸습니다. 퇴로를 완전히 차단당한 코뮌군은 도시 동쪽의 페흐 라쉐즈 묘지까지 밀리게 됩니다. 그리고 곳곳에 산재한 묘석을 방패 삼아 치열한 총격전이 벌어집니다(그때의 흔적일까요, 검은색 이끼가 낀 아주 오래된 몇몇 묘석들에는 아직 탄흔이 남아있습니다. (사진 6)



마지막 총알까지 소진된 코뮌군은 정부군과 피의 백병전을 벌입니다. 그리고 중과부적으로 남은 147명이 생포되고, 사로잡힌 전사들은 현장에서 즉결처분을 받습니다. 묘지와 시민 거주지를 구획하는 벽 앞에 일렬로 쭉 세워져 총살을 당한 거지요. 그 장소가 바로 제가 찾아가는 페흐 라쉐즈 북동쪽 77번 구역 뒤 벽돌 벽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벽은 파리코뮌이라는 거대한 역사적 사건 혹은 비극을 상징하는 애절한 기념비인 것이지요. 제가 이곳을 꼭 찾아야겠다 생각한 것은 그들의 열망과 좌절과 그리고 죽음에 어떤 형태로든 예를 표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 2편에서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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