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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규 Nov 24. 2019

황소 앞에서 얼어붙었다

미술관에 가면 경험하는 특이한 현상이 있다. 무심코 스치던 그림이나 조각 앞에서 일순간 얼어붙는 경험 말이다. 루브르 박물관 갔을 때가 첫 체험이었다. 들라크르와가 그린 <메두사호의 뗏목> 앞에서 십분 이상을 꼼짝 못하고 붙잡혔다. 마치 포충망에 걸린 잠자리처럼. 발을 떼어야 한다 생각하는데도 좀체 그럴 수가 없었던 게다.



왜 그런 순간이 오는지 심리적 근원은 잘 모르겠다. 어렴풋이 짐작되는 것은 있다. 그런 작품 속에는 한 인간이 살아온 인생, 그 무의식의 심연에서 울려나오는 알 수 없는 파장과 겹치는 무엇이 있지 않을까? 말굽쇠가 다른 말굽쇠를 울리듯 그런 파장들이 서로 겹치는 순간 영혼이 갑자기 얼어붙는게 아닌가 싶다.


오스틴 대학 블랜턴 미술관(Blanton Museum of art)에서 다시 한 번 그런 경험을 했다. 세계 최고의 대학 미술관 중 하나로 손꼽히는 이 곳에는 특히 르네상스 시대 회화의 수준이 높다. 하지만 오늘 내가 만난 것은 조형물이었다.


야차같은 얼굴의 카우보이가 도망치는 황소의 목에 밧줄을 던지고 있다. 충격적인 것은 앙상하게 갈비뼈가 드러난 황소(Texas long horn)의 모습이다. 다리가 녹아서 그대로 땅에 엉켜 붙어버린 것이다. 공포에 질려 달아나려 하지만, 몸이 녹은 채 대지에 사로잡혀버렸다. 비명을 지르는 고통스런 표정에 가슴이 섬찟하다.



이 조형물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소재다. 번쩍이는 파이버글래스를 주 재료로 썼다. 거기에다 자동차용 페인트, 불켜진 붉은 색 램프(황소와 말의 눈알)와 같은 산업용 자재를 대거 사용하고 있다. 반들거리는(ultraslick) 표면은 청동 혹은 대리석과 질감이 매우 다르다. 극단적으로 리얼리스틱하다.


간신히 작품에서 눈을 떼고 벽에 붙은 설명을 읽는다. 작가는 멕시코 혈통의 루이스 히메네즈(Luis Jimenez). 1940년에 텍사스주 엘파소에서 태어나 2006년에 세상을 떠났다. 미술관의 큐레이터는 히메네즈를 이렇게 설명한다. 미국의 서부개척 역사 경험을 스스로 체험의 렌즈를 통해 형상화시킨 조각가 겸 화가라고.


루이스 히메네즈


작품의 의미는? 포식자와 먹이 사이의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을 일련의 시리즈로 표현했단다. 동시에 진보를 향한 인류애의 행진을 비유했다고 적혀있다. 이게 무슨 호랑말코 같은 소리인가? 미술평론과는 담쌓은 나다. 하지만 내 눈에도 이 작품이 그렇게 고상한 추상을 다룬 것 같지는 않다.


나중에 구글을 찾아봤더니 히메네즈의 할아버지는 멕시코에서 살던 유리공이었다. 아버지 대에 미국으로 이주했단다. 예술가를 꿈꾸던 아버지는 1930년대 불어닥친 대공황으로 좌절했고, 생업으로 네온사인 제작을 택했다. 히메네즈는 6살부터 아버지를 도와 가게에서 일했는데, 어릴적부터 산업용 자재 사용에 익숙했고 결국 이것을 작품에 활용한 것이다. 즉 이 작품의 창조자는 전형적 멕시칸아메리칸(보통 치카노(Chicano)란 명칭이 통용되지만, 텍사스에서는 별도로 테하노(Tejano)라 부름)인 것이다.  


텍사스는 멕시코와의 오랜 전쟁을 거쳐 미국이 강제로 빼앗은 땅이다. 테하노가 총 인구의 30%를 넘어서는 이유다. 이 사람들이 자리잡고 잘 살고 있던 땅에 백인들이 이주해 오더니 갑자기 자기네 땅이라고 선포하고 반란을 일으킨 게다(그 뻔뻔함이 정말 미국답다). 그런 짓 하다가 반란군이 몽땅 죽은 유적지가 산 안토니오에 있는 그 유명한 알라모 요새다.  


알라모 요새 유적지


1836년 (원래 자기 땅 되찾겠다 나선) 멕시코군과의 전투에서 텍사스 시민군 189명이 건물 안에 갇힌 채 전사한 알라모 전투는, 텍사스 뿐 아니라 미국 정신을 상징하는 역사적 사건으로 통한다. 우리로 따지면 충무공 이순신의 노량대첩 정도 되는 셈이다. 백인 위주의 미국인들에게야 이 사건이 애국심을 용솟음치게 하는 비장한 역사적 이벤트일 게다. 하지만 멀쩡한 땅 빼앗기고 졸지에 남의 나라 지배 하에 들어간 멕시코 사람들 입장에서도 그럴까?


이런저런 사정을 알고 보면 큐레이터의 지금 저 해설은 상당히 황당한 것이다. 밧줄에 목이 걸려 숨이 넘어가는 황소한테서 무슨 인류애의 행진 나발(죄송^^)이란 말인가. 차라리 멕시코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나 유년기부터 가혹한 노동에 뛰어들었던 루이즈 히메네즈. 그가 강탈당한 조상의 땅에서 체험한 분노와 절망이 형상화된 것이라 하면 몰라도.  


이 작품에 담긴 정서는 분명히 진보나 승리의 휘황한 쾌감이 아니다. 오히려 죽어가는 자, 빼앗긴 자의 끝없는 고통이다. 미국 서부개척 저변을 맥맥히 흐르는 죽임과 수탈의 역사. 그 거대한 발굽에 짓밟힌 피해자들의 절망 말이다. 그런 어둡고 검붉은 감정들이 성난 카우보이 얼굴에 번들거리는 자동차용 페인트, 황소의 눈을 밝힌 주황색 램프 그리고 땅에 엉겨붙은 다리를 통해 분무기처럼 맹렬히 뿜어나오고 있는 것이다.  


히메네즈의 작품이 같은 미술관 로비에 또 하나 전시되어 있다. 리오그란데 강을 건너는 월경자의 모습이다. 제목은 “강을 넘는 사람들(Cruzando El Rio Bravo)”. 20세기 중반까지 이어진 멕시코 불법 이민의 방법이었다 한다. 코요테(Coyote)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장정이 사람을 짊어지고 깊은 강을 건네주는 것이다.



짊어진 남자도 어깨 위에 실린 모자(母子)도 목숨을 걸었다. 그렇게 강물을 건너는 불법 이민자의 차갑게 떨리는 두려움. 여민 옷 사이로 삐져나온 우는 아기의 손가락을 보라. 아마도 저 모습은 트럼프가 설치한 국경장벽을 넘어오는 2019년 현재 밀입국자의 모습이기도 할 게다.


두근거리는 엄마의 심장박동이 고스란히 전해져오는 것 같다. 공포와 뒤섞인 간절한 희망이 여인의 표정에 고스란히 새겨져있다. 칼에 베인 상처처럼 깊숙이.


살아오면서 이런 작품을 대할 때마다 한국에서는 느껴보지 못한 자각을 하곤 한다. 내가 "사회적 소수자(minority)"가 될 수 있다는 생각 말이다. 자기 본향에 살면서 우리는 주류 다수자로서 위치와 권리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오늘과 같은 전 지구적 교류 속에서 그건 참으로 무망한 생각 아닐까. 누구나 그리고 일순간에 역할이 뒤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의 다수자가 곧 내일의 소수자가 되는 것이다. 심지어 단 며칠 동안의 외국 여행을 통해서라도.


그렇게 히메네즈의 두 작품 사이를 시계추처럼 왔다 갔다 하는데, 더꺼머리 금발 총각이 다가온다. 미술관 문닫을 시간이 다 됐다는 거다. 다음에 다시 오리라 다짐한다. 오늘 내가 받은 충격의 정체가 무엇인지, 좀 더 자세히 확인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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