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커덕철커덕, 댈러스로 달려가는 암트랙 열차. 6시간이 걸리기는 했지만 나무랄 데 없이 멋진 여행. 제가 탄 기차 이름은 Texas Eagle입니다. 정말 멋진 이름 아닙니까? 차창 밖으로 텍사스 평원이 누워있네요. 철길 옆에 드문드문 원유시추기가 서있고, 광활한 목장에서 움메~ 소떼가 웁니다(사진 1).
아침 7시에 일어나 대활극을 벌였으니 배가 고프지 않을 리 있나요. 느릿느릿 식당칸으로 건너가 봅니다. 생각보다는 메뉴판이 다양하네요. 미국에서 경험하는 첫 번째 여행이니 폼생폼사입니다. 그 중 가장 비싸고 멋진 이름의 음식을 시킵니다. 바로 이글모닝 스페셜(Eagle morning special). 맛은 어땠냐구요? 이름과는 상당히 달랐다는 것만 말씀드립니다. 푸석푸석 들쩍지근, 전형적 아메리칸 스타일(사진 2)^^.
철도가 지나는 웬만한 시골역마다 기차가 모두 섭니다. 역에는 출입문도 제대로 없는 경우가 태반이군요. 플랫폼에 주루루 나와 가족과 친구를 맞이하는 시골 사람들. 환하게 웃고 포옹하는 모습 지켜보노라니 저까지 기분이 좋아집니다. 텍사스 이글의 걸물은 차장 아저씨. 정차하는 시골역 역무원들과 빠짐없이 다정한 대화를 나눕니다(사진 3). 다음 역에 도착하기 직전에 매번 마이크를 들고 걸쭉하고 구성진 목소리로 동네 소개를 합니다. 옛날옛적 텍사스 카우보이들이 소 몰고 다닐 때 이랬을까요. 컨트리송 부르듯 리듬감 가득한 억양, 듣는 사람들을 괜시리 흥겹게 만드는 목소리입니다(그 소리를 들려드릴 수 없는 게 원통하네요^^).
<모자 쓴 이가 차장>
템플(Temple)인가 하는 작은 도시에 정차하는데, 차장 아저씨가 이 읍내에서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의 아내 로라 부시(Laura Bush)가 태어났다고 방송합니다. 나중에 위키피디아를 확인해보니 그녀의 고향이 텍사스이긴 하지만 서쪽으로 훌쩍 떨어진 미드랜드(Midland)라는데. 학교는 댈러스에 있는 남감리교대학(Southern Methodist University)을 나왔고. 차장 아저씨가 뭔가 착각을 한 걸까요. 아니면 위키피디아가 실수를 한 걸까요. 로오오라 부우우쉬~♬ 라면서 한껏 구성지게 그녀 이야기를 들려줬는데 말이지요.
열차 승객들은 그냥 평범한 미국 서민들. 웬만한 거리는 승용차를 타고 아주 먼 거리는 비행기를 이용하는 이 나라 풍습으로 봤을 때 경제적으로 그리 여유 있는 계층은 아닙니다(특별히 기차여행 매니아가 아니라면). 우리로 따지면 무궁화호 승객들과 비슷하다고나 할까요. 처음 만난 옆 자리 사람과 활달하게 인사말(small talk)을 나눕니다. 장거리 여행이니 그렇겠지요. 금방 친해져서 고향을 묻고 부모님 이야기를 주고 받네요. 이 나라 사람들 특유의 활달함이 묻어납니다. 금발의 여자아이들이 깔깔대며 좌석 사이 뛰어다니며 장난을 칩니다.
재미있는 것은 차창 밖 풍경을 구경할 수 있도록, 열차칸 하나를 통째로 비워 진행 방향과 맞춘 관람좌석을 마련했다는 것(사진 4). 텍사스 이글은 텍사스주 샌 안토니오에서 출발해서 일리노이주 시카고까지 무려 2,102킬로미터를 달리는 열차. 출발지에서 도착지까지 자그마치 서른 두 시간 10분이 걸립니다. 좌석번호 없이 자유로이 앉을 수 있는 이 칸은 그렇게 기차에서 먹고 자며 기나긴 여행하는 장거리 승객들을 위한 배려가 아닌가 합니다.
<기차 안 관람석 칸>
드디어 댈러스에 도착했습니다. 이 기차역, 일명 유니언스테이션(Dallas Union Station)은 과거 철도 전성시대를 연상시키는 건물입니다. 대리석으로 마감한 건물이 웅장하군요(사진 5). 하지만 외형만 그럴 뿐 주위 풍경이나, 특히 건물 안은 쇠락한 기운이 역력해요. 구석배기에 있는 남자 화장실은 소변기가 꼴랑 하나뿐. 그것도 오랫동안 청소를 안 해서 고약한 냄새가 진동을 합니다.
<댈러스 암트랙 역>
문을 열고 나오니 멋진 신사가 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올백으로 빗어 넘긴 반백의 머리. 키가 훌쩍하니 크군요. 짙은 회색 줄무늬 양복에 코디를 맞춘 하와이안 풍 넥타이. 전화에서 듣던 중후한 바리톤 목소리가 입에서 흘러나오네요. 저와 거래할 한인 자동차딜러입니다.
최고급 차종인 대배기량 아큐라(Acura) SUV를 몰고 왔습니다. 마천루 사이를 뚫고 댈러스 시내를 관통해 올라갑니다. 도시 북쪽 한인타운에 사무실이 있다는군요. 처음 만나니 서먹서먹해서 그런 걸까, 이 남자 생긴 것과 다르게 쓸 데 없는 말이 많습니다. 10여 년 전에 불법이민을 왔답니다. 그리고 댈러스 한인들 가운데 90%가 자기 같은 처지라고 천연덕스레 덧붙입니다. 설마 그럴 리가?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좋은 거래를 위해 그냥 입을 다물 수밖에.^^
도시 고속도로를 이십여 분이나 달려 도착한 중고자동차 매매사무실. 근데 첫인상이 수상합니다. 미국의 중고차 판매장들은 주요 도시의 간선도로 옆에 위치한 것이 보통이지요. 차를 타고 지나가다 쉽게 눈에 띄고 또 쉽게 접근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 장소에 최소한 수십대에서 많게는 수백대가 넘는 차를 번쩍번쩍 광을 내고 전시해놓습니다.
근데 이곳은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요. 좁은 길을 구불구불 돌아간 한인타운 한 구석. 낡고 허름한 단층 건물의 자그마한 뒷마당에 열 대도 안 되는 중고차가 오도카니 주차되어 있는 겁니다. 건물 안에는 자그맣게 분할된 사무실 문패들이 다닥다닥 붙어있구요.
그 중 한 곳의 문을 열고 들어섭니다. 어두컴컴 스무평 남짓한 실내. 공기 속에 쾌쾌한 담배냄새가 배어있습니다. 비슷한 처지의 한인 중고자동차 딜러들이 돈을 모아서 얻은 공간인 듯 보이네요. 출입문 바로 앞에 한 중년남자가 책상 위에 구두 발을 턱 올린 채 고스톱 컴퓨터 게임을 하고 있습니다. 근데 이 친구, 사람이 들어서는데 어~ 고개만 까닥하고 발도 안 내리고 게임을 계속하는게 아닙니까.(뭐 저런 게 다 있노?)
구입하려는 차를 상봉하기 전에 카팩스(CARFAX : 차량의 수리, 소유자변경, 사고 여부를 기록한 공인증명서. 미국에서 중고차 거래 때 필수 확인사항이다)를 보여달라고 했습니다. “예? 카팩스요?” 처음 듣는다는 듯, 미적미적대며 서랍을 뒤적입니다. 마지못해 서류철에 끼인 문서를 찾아 보여주는데 프린트된 글자가 흐릿한데다, 서류 모퉁이가 크게 잘려나갔습니다. 거기까지는 좋아요.
딜러가 부디 발견하지 않았으면 하는 내용을 저의 ‘매의 눈’이 찾아내 버렸습니다(그때까지도 시차를 극복 못해 어리버리했는데 어찌 그랬는지 참 용합니다). 작년의 차량 정기검사에서 두 번이나 불합격을 받았다가 재검사에서 겨우 통과된 걸 발견한 겁니다! 묘하게 꼬여가는 분위기. 이유를 묻자 말도 안 되는 소리로 둘러댑니다. “문제가 있었어도 일단 통과가 되었으니 문제가 없지 않아요?”(뭐 이런 게 다 있노?)
일단 마당으로 나가서 차를 보기로 했습니다. 하얀 색 구형 토요타 캠리. 후드를 열어봅니다. 나름대로 청소를 해서 겉으로 봤을 때 오일이 새는 곳은 없네요. 근데 배터리가 이상해요. 위 아래로 허연 액이 스며나와 무슨 소금결정 같은 것이 잔뜩 묻어있습니다. 한국에서도 이런 건 한번도 본적이 없었지요. 매우 노후화되었거나 관리를 전혀 안했다는 뜻입니다. 차가 왜 이러냐고 물어봅니다. 답변이 걸작이에요. “배터리는 시동만 걸리면 되는 거에요!”
시운전을 해보기로 했습니다. 키를 돌립니다. 부르릉 털털… 시동이 걸리기는 하는데 무슨 소리가 이러냐? 60년대 시발택시도 아닌데 차체가 와당탕탕 요동을 칩니다. 전진 기어를 넣어봅니다. 달구지가 구르듯 차가 덜거덕거립니다. 엑셀 반응도 매우 느리구요. 꾸욱 밟은 지 한참만에야 엔진이 반응을 보이는 거 아닙니까.
더구나 브레이크를 밟으니 그냥 주욱~ 밀려버려요. 깜짝 놀라서 “브레이크가 밀리는데요?” 물었더니 다시 멋진 답변이 돌아옵니다. “제가 보기엔 너무 잘 멈춰서 문제인데요?”(아니 이 자식이?)
그래 좋다 좋아, 길로 한번 나서보자. 시내 길을 슬슬 달리다가 고속도로로 나가보자 요청했습니다. 시큰둥한 반응이 돌아옵니다. “하이웨이요? 지금까지 그런 분은 없었는데….” 젠장, 없기는 뭐가 없어. 오스틴 코스트코(Costco) 매장 전단지에도 딱 나와있는데. 중고차 살 때는 반드시 고속도로에 나가 힘껏 엑셀을 밟아보라고.
고속도로에 접어듭니다. 차가 불안하게 흐느적댑니다. 핸들도 유격이 매우 심해요. 직선주행성을 시험해보려 슬쩍 핸들을 놓아보니 급속히 오른쪽으로 쏠립니다. 시험주행 최고의 클라이막스는 속도를 높여 시속 60마일(100킬로 정도)을 넘어선 순간. 갑자기 핸들이 우두두두~ 떨리기 시작하는 겁니다! 진도 9의 지진이 난 듯 상하좌우로 엄청나게 요동을 치는 핸들. 너무 놀라서 속도를 급히 줄입니다. “이거 왜 이렇죠!?”
세 번째의 환상적 답변이 날아옵니다. “저도 잘 모르겠는데요” 아니, 차를 파는 니가 모르면 누가 안단 말이니? 떨리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고 일부러 속도를 더 높여봅니다. 시속 70마일(120킬로 정도). 핸들이 완전히 사시나무처럼 떠는군요. 제 심장까지 덜덜 떨립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냐구요? 아무 말 없이 ‘하꼬방’같은 딜러 사무실로 돌아와 가방을 챙겼습니다. 그리고 정중히, 픽업해준 댈러스 역으로 데려다달라고 부탁합니다. 자기도 뭔가 상황을 파악했는지, (이 남자는 진짜로 차의 상태를 몰랐던 걸까요? 아니면 설마 고속도로로 나가자 하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던 걸까요? 어느 쪽이든 둘 다 최악임에는 다를 바가 없지만) 별 반대 없이 “그러시지요”라고 합니다. 기차역으로 향하는 20분간 차 안은 완벽한 침묵모드. 도착할 즈음 딜러가 한마디 합니다. “차를 잘 아시는 모양이에요.” 그래 최소한 니보다는 잘 안다.
역 앞에 차를 내려주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나버립니다.
오스틴에 돌아와 조카에게 들은 이야기로는, 몇 달 전에 허리케인이 텍사스를 덮쳤답니다. 그때 차량들이 대거 침수되거나 반파되었다는 거예요(이런 차들을 salvage 혹은 rebuilt라 부르더군요). 그런데 이런 형편무지 상태의 차를 인수받아 겉만 번지르르 닦아 정상적인 차인 것처럼 속여 파는 악덕딜러들이 있다는 겁니다. 운 나쁘게 제가 그런 케이스에 걸린 것이고.
그러니 300달러 택시비에다 1,500달러 디스카운트까지 해서라도 팔겠다고 무리수를 둔 것이겠지요. 그래서 하루에 열 두 번도 더 전화를 해서 알랑방귀를 뀌어댄 거겠지요 그나저나 ‘텍사스에서 제일 전문적인’ 이 한인딜러는 그놈의 달구지를 대체 얼마 주고 구입한 것일까요?
텍사스 중고차 구입 대사건이 여기에서 끝나느냐구요? 천만의 말씀. 고난의 행군은 이제 막 그 문을 열었을 뿐입니다. 그러니 다음 편을 기대해주세요.(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