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피아니스트 백건우가 뉴욕 필하모닉과 함께 데이비드 게펜홀 무대에 섰다. 2009년 11월 카네기홀 리사이틀 이후 7년 만에 뉴욕을 다시 찾은 것이다. 수년 전 로린마젤과 투어를 하며 악단과 호흡을 맞춘 적이 있었지만 정기연주 시리즈의 독주자로 초청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야말로 빈자리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관객들이 모였다.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3번을 연주한 그는 ‘건반 위의 구도자’라는 그의 별명에 걸맞는 호연을 펼쳤다. 작곡가의 영감이 가장 활발하게 타올랐을 시기의 작품과 20대를 향해가던 피아니스트의 옛 추억이 절묘하게 만났다. 그는 시종일관 부드러운 언어를 선택했다. 돋보이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그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는지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10세가 되던 해에 국립교향악단과 그리그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했던 천재였다. 15살이 되던 1961년 미국에서 열린 미트로풀로스 콩쿠르에 출전한 그는 지휘자 번스타인의 도움으로 줄리어드 음대에 진학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스승 로지나 레빈을 만났다. 5년 동안의 뉴욕 유학을 마친 그는 유럽으로 건너가 거장 빌헬름 켐프의 사사를 받게 된다. 그리고 나움버그, 리벤트리트, 부조니 콩쿠르 등을 통해 자신의 이름을 알리며 피아니스트로서의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인터넷에서 ‘백건우’를 검색하면 따라오는 첫 번째 연관 검색어는 그의 아내이다. 배우 윤정희는 1972년 독일 뮌헨 올림픽 문화행사의 일환으로 열린 윤이상의 오페라 ‘심청’을 보기 위해 영화감독 신상옥과 음악회를 찾았다. 그녀는 당시 윤이상 곁에 함께 있었던 한국 청년이 바로 피아니스트 백건우였음을 알았다. 2년 후 파리 3대학으로 유학을 떠난 윤정희는 한 레스토랑에서 우연히 백건우와 재회한다. 윤이상과 함께 했었던 그와의 첫 만남은 말 없고 쑥스러워 하던 청년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마치 영화의 한 장면과 같은 재회 이후 만남을 이어갔고 3년간의 비밀 연애 끝에 결혼에 골인했다.
1977년에는 그의 일가족이 북한으로 납치될 뻔한 사건도 있었다. 스위스 부호가 그의 연주를 듣고 싶어 한다는 지인의 제안으로 취리히를 거쳐 당시 사회주의 국가였던 유고슬라비아의 자그레브까지 가게 되었다. 뭔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직감한 그는 납치 직전 미국 영사관으로 탈출하여 무사히 파리로 돌아올 수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를 유인했던 지인은 백건우 윤정희 부부의 결혼식의 주례를 섰던 재불 화가 이응노의 두 번째 부인이었다.
백건우는 이응노 화백은 물론 작곡가 윤이상과도 각별한 친분을 가지고 있었다. 둘은 ‘동백림사건’에 연루되었던 인물들이다. 1967년 중앙정보부는 문화예술계 인사 194여 명의 이름을 공개하며 이들이 동베를린 북한대사관을 왕내한 간첩 사건을 발표했는데 이것이 ‘동백림사건’이다. 2년간 이어진 재판을 통해 2명이 사형 판정 받은 것을 포함하여 30여 명이 형을 받았다. 재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던 윤이상을 비롯하여 사형이 확정되었던 2명을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형을 복역하던 중 독일과 프랑스 정부와의 외교마찰로 인해 모두 석방되었다.
40여 년이 흐른 지난 2006년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는 국정원에서 열린 공식 조사 결과 발표를 통해 ‘동백림사건’은 단순 접촉을 비롯한 동조행위까지 간첩죄를 무리하게 적용했고, 수사 과정에서 전기고문과 같은 가혹행위를 통해 허위진술을 하도록 유도한 일이 있었다고 밝혔다. 물론 그 시기는 안보적 위협으로 느껴질 수 있는 특별한 시기였지만 수사 과정에서 부적절한 행위가 있었고 해외 체류 인사들을 연행해 온 것은 외교적 마찰을 불러온 불법행위라고 규정하며 8만 페이지에 달하는 관련 자료를 공개했다.
요즘도 소위 문화계 ‘블랙리스트’로 시끄럽다. 최근 한 언론사를 통해 문건의 일부가 공개되었고 당시 장관까지 폭로를 쏟아내는 마당에 정작 관련자들은 납득할만한 설명을 하지 못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이 무슨 이유로 그 9473명의 리스트에 올랐는지를 검색해봤다. 특정 대선후보를 지지선언 했던 4000여 명의 이름과 세월호 관련 입장 표명을 했던 1300여 명이 포함되었다.
그런데 세월호 사건 100일을 맞아 그날 그들이 내려야 했던 제주항에서 세월호 추모 공연을 열었던 백건우의 이름이 누락되었다. 이런… 문체부는 대어를 놓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