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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kny Mar 09. 2017

조성진에게 거는 기대

조성진 카네기홀 데뷔 리사이틀

클래식 음악은 종종 수 백 년 된 고리타분하고 지루하기 그지없는 음악으로 취급당한다. 다른 음악에 비해 길이도 긴 편이니 어쩌면 인내를 필수 덕목으로 하는 장르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인지 친구들 가운데 클래식 음악을 공부한 후 상업음악 쪽으로 관심을 기울이고 광고나 뮤지컬, 혹은 팝음악 쪽으로 옮겨가는 경우도 꽤 많다. 


클래식 음악계에서는 변화하는 시대에 맞춰 모멘텀을 이어가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다. 음악회장에 대형 스크린이 사용된 지 오래고, 가상현실 콘서트홀도 등장했다. 스마트폰 버튼 하나로 누구나 꽤 훌륭한 품질의 인터넷 생중계를 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젊고 새로운 인재를 발굴하기 위한 새로운 콩쿠르들이 끊임없이 생겨나고 또 없어지기를 반복한다. 이 과정을 통해 엄청난 수의 신인들이 세계 무대로 쏟아져 나온다. 


1990년대 한국에서 유명세를 탔던 금발의 여성 첼리스트가 있다. 클래식 라디오 채널에서는 하루 걸러 그녀가 연주한 소품이 전파를 탔다. CD를 구입하러 레코드 가게에 가면 사람들이 제일 많이 오가는 길목에 늘 그녀의 음반이 자리 잡고 있었다. 비록 그녀의 연주가 독보적 수준이라고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듣기에 무난한 정도의 편안한 연주라 방송을 많이 탈 수도 있겠다고 막연하게 생각했다.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화려한 외모 덕이 컸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녀의 연주를 듣게 되었을 때의 실망감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테크닉은 둔했고 소리는 밋밋해서 커다란 홀을 채워나가기 역부족이었다. 시간이 흐른 뒤 그녀의 연주는 더 이상 라디오에서 들을 수 없었고 지금은 어디서도 그녀의 이름을 찾을 수가 없다. 


프리젠터(presenter)들이 자기 무대에 세울 음악가를 찾을 때 고려하는 몇 가지가 있다. 출중한 연주력은 기본이다. 큰 비용을 들여 당장 유명세가 있는 사람을 세우기도 한다. 관객 유치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늘 그런 전략을 사용하는 것만은 아니다. 매번 랑랑이나 요요마 같은 사람들을 불러오기에는 재정적 부담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대신 주목받는 젊은 신인들을 등용시킨다. 막 주목받기 시작한 신성들을 소개하고 알리는 것은 화제성으로 보나 비용적인 측면에서 일거양득이다. 대중적 인지도가 낮더라도 실력을 갖춘 젊은 아티스트들이 데뷔하는 경우는 유명 연주자들을 보유한 매니지먼트사의 일종의 ‘끼워 팔기’ 같은 거래를 통해 이루어지기도 한다. 


조성진은 요즘 화제의 중심에 있는 젊은 아티스트 군에 빠질 수 없는 음악가 중 한 사람이다. 그는 지난 2월 22일 카네기홀 리사이틀 데뷔 무대를 가졌다. 커다란 화제였지만 기대와는 달리 이날 연주에 대한 미국 주요 언론의 리뷰는 없었다. 카네기홀이 직접 기획한 콘서트였음에도 불구하고 리뷰가 없었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조성진의 리사이틀은 카네기홀이 기획한 ‘건반의 거장’ 피아노 독주회 시리즈 중 하나였다. 이 시리즈에 초청을 받은 다른 피아니스트는 마우리치오 폴리니, 미츠고 우치다, 레이프 오베 안스네스와 같이 이미 대가에 반열에 있는 인물들이다. 클래식 음악계가 조성진에게 걸고 있는 기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성진 카네기홀 데뷔 리사이틀 ©carnegiehall


주목받는 젊은 음악가들을 대할 때마다 밝은 미래만 그려지는 것은 아니다. 언젠가 사그러들 수 도 있는 관심을 뒤로하고 묵묵히 자기 길을 걸어갈 아티스트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의구심이 크기 때문이다. 음악계는 화제의 인물에 늘 굶주려 있다. 실력 있는 아티스트들을 배출해 낼 전통의 등용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개최된다. 그리고 사람들의 관심은 늘 화제를 따라 다른 쪽으로 옮겨간다. 


인터넷으로만 들었던 조성진의 실제 연주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꾸밈없음’이다. 시시했다거나 무미건조했다는 의미로 해석한다면 오산이다. 사람들은 여전히 그의 촌철살인 연주력을 높이 평가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한 음, 혹은 한 마디에만 얽매이지 않고 오히려 멀리 보았다. 다른 연주자들과 ‘다르게’ 연주하려 애쓰지도 않았다. 그 대신 자기 자신을 작품 속으로 끊임없이 투영했고, 그 시도는 꽤나 설득력이 있게 들렸다. 이제 막 내디딘 ‘피아니스트 조성진’의 길이 다른 연주자들의 그것과는 분명 다르게 보였다. 그의 이런 행보가 계속 이어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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