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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K Mar 15. 2016

INNER PEACE

사는 게 다 스포츠는 아니야.

나는 얼마나 화를 내며 살아가는 사람일까?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던 화두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여행 전 분명 지금 보다 많은 화와 짜증의 아우라를 거느리며 살았던 것 같다. 주관적인 판단이긴 하지만 화가 많은 사람도 아니었던 것 같고 주변 사람들보다는 화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타입으로 회사 내에선 평판이 좋은 축에 들었었다. 하지만 객관적으론 지금보다는 훨씬 많은 화를 품고 살고 있었고, 그 화는 출근길 지하철에서 운전 중 도로 위에서 가끔 분출되곤 하였다. 그렇지만, 2년 1개월간 여행을 하는 동안 거의 화를 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여행 중이라는 상황이 가져다주는 마음의 여유로움이 바탕이 되어서도 있겠지만 많은 것을 보고 많은 것을 경험하면서 스스로 겸허해져야 한다는 필요성을 마음의 바닥으로부터 느껴서일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기억에 남아 있는 겪한 화는 2번 정도였던 것 같다. 하나는 인도의 겪한 삐끼와의 만남이었고, 다른 하나는 볼리비아 숙소에서 만난 진정 무개념의 한국인과의 만남 이였다.


 시간이 흐르고 나서 다시 돌아보니 인도의 겪한 삐끼와의 사건(?)은 굳이 화를 낼 필요까지 없었는데, 여러 상황의 시너지로 애꿎은 삐끼에게 화를 발산한 것이 아닌가 싶어 부끄럽다. 어찌 보면 그 화의 진정한 대상은 아내였을지 모른다. 아니 솔직히 고백하자면 스스로에게 화가 난 것이었다. 그 화의 화풀이 대상이 아내로 전의 하였고, 그것을 스스로 인지하고 있었기에 차마 아내에게 화를 풀어내지 못하고, 의도치 않게 눈치 없이 상황 파악하지 못하고 끊질기게 들러붙어 날 괴롭히던 삐끼에게 터진 것이다.


 다른 하나의 사건은 볼리비아 참사(?)로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어이가 없고 개탄스러운 사건이었다. 여행자들 사이에서 가장 피해야 할 사람들을 물어보면 열에 아홉은 이스라엘인중국인을 꼽는다. 타인을 배려하지 않고 자신들만 생각하고 행동하는 이기적인 마인드를 소유하고 있어 모든 여행자들의 기피대상 1,2순위를 다투는 위엄을 달성했다. 심지어 어떤 투어는 이스라엘 사람들 혹은 중국인들이 대다수이면 할인까지 해주는 웃지 못할 상황도 벌어진다. 하지만, 개인적으론 그들보다 무서운 것이 무개념의 한국인이었다. 중국인들과 이스라엘인들에게는 잘못된 행동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 자신들의 잘못을 인지는 한다. 잘못을 이해 하지만 스스로 통제가 잘 안 된다는 것이 그들의 귀여운 반론이다. 하지만, 몇몇의 한국인들은 스스로 행동이 잘못되었다는 인지 자체가 없다. 부끄러움을 모른다.

 

 사건은 볼리비아의 한 여행자 호스텔에서 일어났다. 볼리비아의 저렴한 여행자 호스텔은 침대 가운데가 움푹하게 파져 있다. 그러한 숙소에서 방음 자체는 욕심이기에 다들 감안하여 저녁이 되면 조심스럽게 배려의 행동을 한다. 거기에다, 방문 앞에는 11시 이후에는 조용해 달라는 요청이 떡하니 적혀 있다. 하지만, 몇몇의 개념 없는 한국인들은 그 룰들은 중요하지 않다. 자신의 여행에서 느끼는 자유와 해방감에 떠들고 놀고 싶은 것이 더 중요한 것이다. 그 숙소에서 1주일을 보냈었다. 그동안 딱 한번 소란을 낸 것이 바로 그 몇몇의 한국인들이었다. 첫날 저녁 늦게까지 술 마시며 떠들다 지배인한테 지적을 받고 방으로 쫓겨났었다. 하지만, 다음날 보란 듯이 또 술을 마시고 떠든다. 안면도 있기에 12시가 넘어 조심스럽게 나가 웃으며 부탁을 해보았다. 그때까진 문제없이 좋았다. 서로 웃으며 미안하다며 조용히 하겠다며 그렇게 잘 마무리가 되는 것처럼 보였지만, 시간이 흘러 갈수록 알코올에 그들의 뇌를 마취시킬수록 목소리는 커져갔고 더욱 시끄러워졌다. 결국 1시간가량 참다 나가서 다시 한번 조용해 달라고 이야기를 했다. 거기서 문제가 발생하였다. 조용해 달라는 나의 표정이 마음에 안 든다는 것이다. 그리고, 조용하게 자고 싶은면 호텔을 가지 왜 호스텔에 와서 행패냐며 되레 언성을 높이고 화를 낸다. 적반하장.


 결국 순간 참지 못하고 뚜껑이 열리고 말았다. 언쟁이 오가며 목소리가 커지니 아내가 방에서 나왔다. 나의 손을 잡고 참으라는 아내의 모습을 보자 잠시 가출했던 이성이 다시 돌아왔다. ‘그래. 취해서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이다. 이해하고 내가 조금 참자.’ 속으로 다짐하고 욕설을 하며 덥비던 친구를 앉혀서 차근차근 이야기를 했다. 20여분의 이야기를 하며 그 친구를 달래서 자러 보냈다. 내일 아침에 맨 정신에 이야기를 하자며.

너무 억울하고 화가 나 잠이 잘 오지 않았지만, 스스로 잘했다며 다독이며 잠을 청했다. 다음날 아침 마주친 그 친구에게 웃으며 잘 잤냐며 인사를 건넸다. 먼가 삐쭉거리는 대답이 돌아왔지만, 다시 웃으며 간밤에 일을 가볍게 툭 던졌다. 돌아온 답은 퉁명스럽게 이어지는 ‘어제 하나도 안 취했는데, 어제 일 다 기억나요.’였다. 그 말과 동시에 싸늘하게 옆을 지나갔다. 묵직한 망치로 뒤통수를 맞은듯한 느낌과 동시에 어제의 그 친구를 이해하려고 노력했던 나의 모습이 참 어리석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후 여행을 하는 동안 한 달 여간을 그 기억은 쫒아 다녔고, 한번 튀어 버린 검은 기억은 쉽게 지지 않고 한동안 얼룩으로 따라다녔다. 하지만 시간은 모든 기억을 미화시켜 주기에, 얼마지 않아 그 검은 얼룩 역시 희미하게 색이 바래었다.


 하지만, 한국에서의 삶은 그 기억을 잊고 살아가게 허락하지 않았다. 며칠 전 아내와 함께 집 옆 마트에서 장을 보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였다. 전 지역이 금연 구역인 아파트에서 그것도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입구에서 떡하니 당당히 담배를 피우고 있는 것이다. 일주일간 휴가를 다녀왔다 독감에 걸려 앓아누워있다 겨우 움직일 수 있어 며칠 만에 처음으로 움직인 것이 아내와 마트를 다녀온 것이었다. 몸이 너무 좋지 않아 그냥 지나치려는 순간 코 속으로 들어오는 담배 연기는 발길을 돌리게 만들었고, 정신을 차려보니 금연구역에서 담배를 피우지 말아달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미안하다는 사과와 함께 당연히 담배를 끌 거라는 나의 예상을 비웃듯이 이번에도 예상은 빗나가고 말았다. 어쩌라는 식의 눈빛과 함께 돌아오는 답은 “아, 네 “였고, 담배는 여전히 그 사람의 손에 있었고, 쳐다보고 있는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담배를 다시 입에 물었다. 그냥 못 본 척하고 지나가면 됐을 것을 참지 못하고, 굳어진 얼굴에 힘이 들어간 목소리로 다시 제차 담배를 꺼줄 것을 요청했다. 이제 남은 것은 언쟁과 내 안의 짐승을 불러오는 일뿐이다. 그렇게 기억의 수면 아래 깊숙이 잠들어 있었 볼리비아의 기억이 다시 올라왔다. 경비아저씨의 출현과 중재를 통해 사건은 일달락 되었고, 그렇게 찝찝하고 더러운 기분을 않고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와서 천천히 시간을 두고 더욱 천천히 생각해 본다. 담배를 피우든 말든 상관을 하지 말았어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정중히 이야기를 하고 받아들이던 말던 내가 해야 할 선은 여기까지라고 스스로를 컨트롤했어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적어도 이런 일을 겪었으니 다시는 금연구역에서 담배를 피우지 않을 거란 위안으로 스스로를 다독여야 하는 것인가? 정말, 모르겠다.


 여행을 다녀오고 나서 불편한 사실 몇 가지를 느끼게 되었다. 그중 하나가 사람에 대한 매너와 배려이다. 한국 사회에서만 살땐 몰랐다. 타인에 대한 무례와 무시가 당연한 줄 알았으니.


얼마 전부터 무심히 보았던 스포츠 브랜드의 CF의 카피가 생각났다.

"사는 게 다 스포츠야"

일상생활에서 작은 부분까지 스포츠처럼 경쟁해서 이겨야 한다는 내용의 CF로 물론 웃자고 만든 개그성 광고였지만, 풍자의 기본은 사회 시대상을 반영하는 것이기에 마냥 웃기엔 마음이 너무 무거웠다. 한국에 돌아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보았던 광고가 "배려"에 대한 옥외 광고와 지면 광고였다. 이러한 것까지 공익광고로 해야 할 만큼 우리 사회에서 "배려"가 사라져가고 있다는 생각에 씁쓸한 웃음을 지었던 것이 생각난다.


 길을 걸으며 사람과 부딪혀도, 발을 밟아도, 먼저 가기 위해 밀쳐도 그것이 당연한 줄 알았다. 모두가 그렇게 하고 그 누구도 사과하지 않는다. 심지어 가해자도 피해자도 서로 쳐다보지도 않고 그냥 지나친다. 아무 일 없이 지나치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이. 여행을 다니며 어느 나라를 가도 우리보다 한참을 못 사는 후진국을 가도 지나가는 사람에게 부딪치고 모른 척하는 곳은 없다. 심지어 부딪치지 않더라도 가깝게 지나갈 땐 미안하다고 이야기하며 지나간다. 그 모습과 행동이 처음엔 새로웠지만, 머지않아 새로운 것이 아니라 당연한 행동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사람에 대한 기본적인 배려와 매너. 사람의 인격의 바탕이 되어야 하는 기본적 요소가 있다면 그것이 배려와 매너가 아닐까 생각된다. 그렇게 믿고 행동하며 당연스럽게 2년 이상을 보내다 돌아온 한국사회는 너무 이상했다. 타인에 대한 배려가 상실되어있고 매너는 남성이 여성을 유혹할 때 이외에는 보기 힘든 것이 되어 있었다. 분명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나의 반경 근처의 사람들은 대다수가 그러하였다. 지하철에서도 어르신들에게 절대 자리를 양보하지 않고, 임산부 배려석에 앉은 20대 청년은 핸드폰 만을 바라보며 앞에 서있는 만삭의 임산부를 모른척한다. 뒷사람이 담배연기를 마시던 말던 자신의 만족을 위해 걸어 다니며 거리낌 없이 담배 연기를 뿜어 낸다. 길거리에 아무렇게 침을 뱉고 손에 있는 쓰레기를 길거리에 버린다. 차선에서 기다리는 길게 늘어선 차들을 무시하고 앞으로 가 끼어들기를 한다. 자기만을 보고 자신만을 생각하며 자신의 실리에 의해서만 움직이고 살아간다. 과도한 경쟁사회에서 타인에 대한 배려와 매너는 사치이며 허점이라 생각되어지고, 사과를 하는 순간 루져로 전락되어 버린다고 생각한다. 타인에게 엄격하고 자신에게 끝없는 너그러움이 보편화가 된 한국 사회에서 배려와 매너를 지켜가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것인지 요즘 새삼 몸으로 겪하게 느끼고 있다.


 최근 들어 겪는 몇몇의 사건들에 점점 스스로 화가 차고 있음을 느낀다. 화가 차오름에 따라 그러면 안됨을 알면서도 나도 모르게 무 매너의 사람들에게 똑같이 행동하고 싶어 짐을 느낀다. 여기서 똑같이 행동한다면 나의 가치관은 무엇이 되어 버린단 말인가! 알지만, 너무나도 잘 알고 있지만 점점 내적 갈등은 심해지고 굳건했던 의지는 부식되기 시작했다.


“INNER PEACE” 지금 나에게 제일 필요한 것.

애니메이션 '쿵후팬더'에서 나왔던 절대 강자가 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이고 가장 궁극의 것이 바로 “INNER PEACE (내적 평화)”이다. 지금 이 격한 흔들림과 삐뚤어짐을 바로잡기 위해 내적 평화의 수련이 필요하다. 이 기회에 내적 평화의 수련을 쌓아 궁극의 고수가 되어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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