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핍의 결여가 만들어낸 치명적 나태함과 쓸모없는 여유로움의 결정체,슬럼프
나른하게 늘어지는 오후에 뜨거운 햇살, 코 끝을 간지럽히는 향긋한 커피, 귀를 흥겹게 하는 음악, 그리고 사람 소리, 자동차 소리, 모든 소리가 정겹게 어우러지며 무엇이라 말하기 어려운 편안함을 선사한다.
이곳, 멕시코. 한국과 15시간의 시차가 나는 지구 정반대의 이곳.
문화도 음식도 모든 것이 생경하건만, 이곳의 가을은 내가 살았던 대한민국 하늘 아래와 크게 다르지도 생소하지도 않다.
사랑하는 이와 함께이고, 나 역시 그때와 다르지 않으며, 우리의 시간은 여전히 다르지 않게 흘러간다. 우리는 떠나왔지만, 변화한 것은 우리가 머무르고 있는 이곳, 우리가 밟고 있는 땅뿐이지, 그 무엇도 변하지 않았다.
2014년 11월 4일 – 멕시코 '산크리스토발 데 까사'에서
여행을 시작한 지 반이 훌쩍 지나 여행 슬럼프에 빠져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멕시코에 방을 얻어 한 달을 보낸 적이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 동네 카페로 출근을 하고, 늦은 점심시간에 숙소로 돌아와 밥을 해 먹고, 동네 한 바퀴 돌며 산책을 하고 아내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계획 없이 하는 것 없이 아무 걱정 없이 발길 닿는 데로 보냈던 산크리에서의 한 달이었다.
“이렇게 아무것도 안 하고 있을 거면 뭐하러 지구 반대편인 이곳까지 온 걸까?"
그때는 슬럼프로 인해 한꺼번에 밀려오는 자조감과 자괴감에 시달리며 무기력함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시간이 흘러가는 데로 그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까운 여행의 시간을 소모하는 시절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남은 중남미 여행을 위해 추스름이 필요한 시기라 생각했기에 아까운 시간이지만 기꺼이 투자하기로 결정을 했다.
하지만, 여행이 끝난 뒤 가끔 산크리의 카페가, 골목의 한 귀퉁이가, 따갑게 내리쬐던 햇살이 예고 없이 불쑥불쑥 일상에서 불현듯 떠오른다. 아무런 연관도 없이 아무런 개연성 없이 아련함을 잔뜩 머금은 체 생뚱맞게 ‘훅’하고 그렇게 치고 들어온다. 별빛이 쏟아지던 우유니의 소금 사막과 세상의 풍경이라 생각하기 힘든 모레노 빙하의 풍경, 끝없이 펼쳐지던 사하라 사막, 돌고래 때들과 함께 한 다이빙, 사람보다 큰 바다거북이와 상어 때, 가오리 때 등 수많은 진귀하고 멋진 경험을 하였지만 이상하게도 한 번도 일상에서 불현듯 떠올랐던 적이 없었다. 좋았고 소중한 기억이었지만 아련하고 그리운 기억은 아닌 것이다. 아련하고 그리운 기억들은 어디인지 모를 어느 동네의 골목 모퉁이와 바람 내음과 청명했던 공기, 그리고 정적으로 흐르던 그 시간과 시간들 사이의 공간이 만들어낸 순간이었다. 그 당시엔 슬럼프로 힘겨웠고 스스로 방향성을 상실하고 견디어냈던 그 시간이 아이러니하게도 시간이 지난 지금은 가장 소중하고 아련하게 가슴에 새겨져 있다.
얼마 전부터 일상에서도 약간의 슬럼프의 조짐이 보였다. 한없이 늘어지기만 하고 무언가 행동보다는 생각만이 넘쳐나고 그 생각이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고 ‘다음에’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발생하곤 하였다. 그리고 무엇을 해야 하는 명분을 찾기보다는 그것을 하지 않을 핑계를 먼저 찾는 스스로의 모습을 발견하곤 "아..."라는 짧은 탄식과 함께 슬럼프를 감지하였다. 처음엔 스스로를 다 잡으며 계획을 세우고 어떻게든 무엇이든 행동을 하기 위해 애썼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처음에는 반짝 결과물이 나와 성과가 있는 듯 보이지만 얼마 가지 않아 이내 다시 정체를 겪고 마는 것이다. 그 사이클을 몇 번 반복하다 지칠 때쯤 산크리의 기억이 치고 들어왔다. 25개월간 여행에서 배웠던 것들을 잊고 지내다 그제야 생각이 난 것이다. 무언가를 억지로 바꾸려 하지 말고 흐름 자체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말이다. 올라감이 있으면 내려감이 있고 내려감이 있으면 올라감이 있기에, 올라갈 때는 힘을 내고 더욱 집중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끝을, 내려갈 때는 내려가는 시간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인내하며 내적인 단단함을, 이러한 속성과 특성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경험상 내려감의 시간에 조바심을 내고 그 흐름을 인위적으로 바꾸려 노력한다고 쉽사리 바뀌지 않고 스스로만 더욱 지쳐가기 마련이다. 어떻게 본다면 내려감의 시간을 버텨가는 것만으로도 크나큰 배움이자 성장의 시간일 수 있다. 더 나아가 내려감의 시간을 즐긴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내려감의 시간 동안 내면을 잘 다지며 쉼의 시간을 얼마나 잘 보내는가가 올라감의 시간이 왔을 때 높이 올라갈 수 있는 힘의 원동력이 될 수도 있다. 그러니 내려감의 시간이 왔다고 너무 조급해하거나 불안해하지 말고 이 시간이 주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내려감의 시간임을 인정하자.
물론 쉽지 않다는 것은 안다. 스스로는 이미 몇 번을 경험해 봤고 잘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매번 내려감의 시간 위에 서있음을 감지했을 때 막상 실천으로 옮기려면 쉽지가 않음을 느낀다. 모두가 인지하고 있듯이 알고 있는 것과 실천하는 것의 간극은 끝과 끝에 위치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끝과 끝이 맞닿아 있기에 종이 한 장처럼의 가벼움으로 치부해 버리지만, 그 한 장의 무게가 이 세상 그 무엇보다 무겁다는 걸 경험해본 사람이라면 동감할 것이다. 또한, 역설적이지만 그 한 장을 넘어본 사람 역시 그 한 장이 넘어서고 보면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것을 알 것이다. 슬럼프는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마음의 감기와 같다. 아무리 조심하고 피하려고 해도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걸려 있다. 감기에 걸렸을 때 가장 좋은 처방전은 마음 편하게 먹고 집에서 푹 쉬는 것이다. 쉬지 않고 아픈 몸을 혹사시킨다면 감기는 합병증을 불러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병으로 발전할 수도 있다. 슬럼프도 인생의 과정이고 그 속의 배움이라는 것을 스스로 인지하고 받아들이며, 그 순간을 받아들인다면 어느 순간 느끼기도 전에 슬럼프는 우리 곁을 스쳐 지나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