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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K Jan 08. 2023

책임은 없고 자유만 있는 학교

1. 요즘 초등학교 학교폭력사건의 심각성

<출처: freepik>

얼마 전 익산의 한 초등학교에서 일어난 심각한 학교폭력 사건에 관한 보도가 있었다. 다른 학교에서 학교폭력으로 강제 전학을 온 A학생은 강제 전학 첫 날부터 교사에게 폭언과 욕설을 하며 난동을 피웠고, 5일 만에 같은 반 학생을 폭행했으며 이를 제지하는교사를 아동학대로 경찰에 신고했다. 이후에도 A학생의 동급생과 교사를 향한 폭언과 폭행 협박은 계속되었고, 결국 학교폭력심의위원회에서 출석정지 10일 특별교육 30일 처분이내려지며 일단락되었다는 보도이다. ‘가해학생도 한 인격체이기 때문에 단순한 격리나 징벌만이 아니라 치유와 교육을 병행할 수 있는 방법을 고심한 끝에 추진한 결과’라는 것이 전북교육청과 익산교육청 관계자의 설명이다.  



2. 학생인권조례

 2009년 김상곤 경기도교육감을 시작으로 전국적으로 진보교육감들의 약진이 거세지며, 학교에서는 그동안 소외되었던 ‘학생인권’에 대한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이에 2011년경기도교육청을 시작으로 점차 교육청차원 학생인권조례 제정이 확대되었다. 물론 이는 교육에 매우 의미 있는 일이었으며, 민주시민을 길러내는 것이 목표인 학교에서 반드시 논의되어야 할 부분이기도 했다. 하지만 제정 과정에서 교육 3주체가 참여하여 충분한 논의를 거친 후 학생인권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선행됐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하였다. 그결과 사람들 인식 속에 학생인권은 교권과 대립하는 관계로 규정지어 졌다. 교권과 학생인권은 학교현장에서 동시에 존중받아야할 권리인데, 지나치게 한쪽으로 치우친 경향이 있다. 

<출처: freepik>



3. 누구를 위한 인권인가?

 그렇다면 학생인권이 매우 강화된 지금의 학교는 학생의 인권이 잘 지켜지고 있는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가해학생의 인권은 잘 지켜지고 있는데, 피해학생들의 인권은 존중받지 못하는 상황이 참 많다. 민주주의에서 의미하는 참된 인권은 어느 한쪽이일방적으로 참아야만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지금 학교에서는 학생인권이라는 명목아래 수업을 방해하고 타인을 괴롭히는 학생들에 대한 규제나 제재 조치가 전무하다. 자율성은 극대화 되었지만 책임과 의무가 빠진 학생인권조례는 규칙을 잘 지키고 친구를 배려하는 일반 학생 대다수의 인권을 짓밟고 있다. 

<출처: unsplash>


기사에 나온 사례가 매우 심한 경우이기는 하지만, 다른 학생들을 지속적으로 괴롭히고 수업을 방해하며 교사와 주변 학생들에게 욕설과 폭언을 하는 학생들이 흔치 않은 것은 아니다. 생각보다 학교현장에서 많이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이런 학생들을 지도하거나 제재할 방법이 없다. 다행히 문제를 일으키는 학생의 학부모가 문제행동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학교와 협력하여 지도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으면 어느 정도 개선의 가능성이 보이지만, 경험상 대다수 문제를 일으키는 학생 학부모는 아이에게 무관심하거나 지나치게 방어적이거나 심지어 적반하장으로 담임교사를 아동학대로 신고하는 사례도 많다. 결국 문제행동을 일삼는 한 아이 때문에 교실의 나머지 모든 학생들은 1년 동안 그 모든 스트레스 상황을 감내해야만 한다. 안전하고 평화로워야 할 교실에서 종일 이유 없이 욕설과 폭언을 들어야 하고 신체적 위협행동을 참아야 하며, 때로는 모르는 척 못 본 척 하기도 하고,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 조심하고, 그만해달라고 사정하기도 해야 한다. 그럴수록 문제행동을 일으키는 아이는 더욱더 행동이 거칠어지고 세 진다. 어떤 제대로 된 제재나 처벌도 받지 않기 때문에 문제행동은 더 보란 듯이 강화된다. 교실은 한 명의 인권이 지켜지면서 나머지 20명이 넘는 아이들의 인권, 학습권이 침해당하고 교사의 교권과 교육권도 무너진 지 오래이다. 


4. 호미로 막을 일 가래로도 못 막는다.

 더 큰 문제는 지금과 같은 상황이 지속되어 익산초등학생과 같은 학생들이 문제행동을 제대로 고치지 않고 중학교, 고등학교를 거쳐 사회에 나갔을 때다. 학교는 학습을 하는 공간이기도 하지만, 작은 사회이며 어른들의 보호아래 학교라는 안전한 울타리 안에서 사회화의 과정을 거쳐 진짜 사회로 나가는 연습을 하는 곳이기도 하다. 현재와 같이 학교에서 심각하게 타인을 괴롭히고 방해하는 행동을 한 학생들이 그에 합당한 처벌이나 지도(현재의 시스템에서는 교사가 문제학생을 제대로 지도 할 수 없는 상황이다)를 받지 않고, 오히려 피해학생들이 가해학생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쪽으로 눈치보고 맞춰주는 상황에서 자란 학생들은 과연 자라서 어떤 성인이 될까? 우리 사회는 어떤 사회가 될까? 

 우리 속담에 ‘호미로 막을 일 가래로 막는다’는 말이 있다. 아직 성장기에 있는 우리 아이들은 모든 것이 가변적이고 변화에도 유연하다. 지금 당장 바로잡지 않으면 문제행동을 일으키는 학생에게도 그 문제행동의 피해를 온전히 감내해야하는 학생에게도 더 큰 상처가 되어 이후에는 정말 바로잡기 힘들 것이다. 한명의 아이도 포기하지 않겠다는 신념에 너무 매몰되어 나머지 다수의 아이들의 마음과 정신이 멍들고 있음을 꼭 기억해야 할 것이다. 


5. 모든 아이가 자율 속에서 책임을 배울 수 있도록.

 지난 6.1 지방선거에서 10여년 만에 진보성향의 교육감에 편중되었던 비율이 보수성향의 교육감이 대거 당선되면서 균형을 맞추었다. 그리고 요즘 교육계에서 단연 화두는 학생인권조례이다. 학생인권조례의 일방적인 폐지 혹은 존치를 두고 대립하여 논쟁할 것이 아니라, 각 17개 시도의 교육감이 한자리에 모여 진보와 보수를 떠나 다양한 시각과 통찰력으로 충분한 논의를 거쳐 학생이 자율 속에서 책임을 배울 수 있는 방향으로 개정되길 바란다. 또한 교사들 역시 학생인권조례가 제정된 원인에 대한 제고가 필요하다. 일부 학생인권을 경시한 교사들의 부적절한 행동이 지금의 학생인권조례가 제정되는데 그 원인을 제공했음을 기억하고, 기준과 원칙을 정해 학생을 지도하고 학생들을 인격적인 존재로 대우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문제행동을 일으키는 학부모의 자녀 지도에 대한 의무와 책임에 대해서도 공론화되었으면 좋겠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문제행동을 일으키는 학생의 학부모는 대게 두 가지 유형이다. 자녀에게 무관심하고 문제를 외면하며 전혀 학교에 협조하지 않는 학부모, 자녀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모든 책임을 학교와 교사에게 떠넘기며 어떻게든 꼬투리를 잡아 교사나 피해 학생의 학부모를 아동학대로 고소하는 학부모. 두 유형 모두 문제 해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주변 사람을 더 힘들고 고통스럽게 만든다. 미국 공립학교에서는 학생이 문제행동을 일으킬 경우 분리하여 수업하게 할 수 있고, 학부모를 소환해 학생을 데려가도록 할 수 있으며, 문제행동이 심한 경우 학부모를 ‘방임’으로 고발조치까지 할 수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도 이제 학교에서 일어나는 일을 학교의 문제로만 놓고 보지 말고 사회적차원에서 담론이 필요하며, 학부모의 자녀 지도에 대한 의무와 책임이 더 강화되어야 한다.

<출처: freepik>

과거 선생님에 대한 신뢰와 권위가 있었을 때는 교사가 소신을 가지고 문제행동을 일으키는 학생을 적극적으로 훈육하고 지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사회적 인식과 상황이 바뀌었다. 교사에게도 안전하게 학생들을 지도할 수 있는 법적근거가 마련되어야 한다. 수업시간에 난동을 피우는 학생을 잠시 복도에 내보낼 수도 없으며, 친구를 괴롭히는 학생을 따로 상담할 수도 없고, 교사와 다른 학생들에게 폭언, 욕설을 하는 학생을 제대로 훈계할 수도 없다. 모두 아동학대법에 걸린다. 이 모든 과정에서 다수의 선량한 학생들이 피해보고 있음을 꼭 기억해야 한다. 

최소한 교실에 있는 모두의 인권을 지키지 위해 교사에게 문제행동을 ‘말릴 권리’, 타인을 괴롭히는 행동은 나쁜 것이라고 ‘가르칠 권리’는 주어져야 한다.

<출처: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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