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를 먼저 해야 하는 이유
초등학교 2학년 때 간 사이판 여행은 내 첫 번째 해외여행이었다. 여행사에서 일하던 막내 이모. 그리고 막내 이모의 식구들. 그 사이에 넉살 좋게 껴있는 한 초등학생. 그 초등학생은 사실 자신이 영어를 잘한다는 대단한 착각 속에 빠져있었다. 그래서 사이판에 가서 외국인을 보자마자 ‘하이’, ‘하우아유’, ‘아임 파인’, ‘웨얼아유 프롬'을 남발했다지. (참고로 나의 MBTI는 ENFP다.) 사람을 만나면서 에너지를 얻는다는, 극강의 ‘E’인 나는 사이판에서 여러 명의 외국인 친구를 사귀었다. 나에게는 그 기억이 너무 벅차서 해외여행을 갈 수 있는 기회가 생길 때마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덕분에 나는 스무 살이 되기도 전에 20개국을 넘게 여행한 사람이 되었다.
‘E’ 답게, 어렸을 때부터 난 참 인사성이 밝은 아이였다. 학교에는 나를 모르는 아이가 없었다. 나는 얼굴만 아는 아이들에게도 ‘안녕?’하고 인사했고, 아이들은 대부분 ‘안녕’하고 대답했다. 먼저 인사하는 것은 꽤 즐거운 일이었다. 사람에게 쉽게 호감을 얻을 수 있었고, 쉽게 친해질 수 있었다. 지나가던 사람에게도 그냥 막 인사했다. 어른들은 대부분 ‘인사를 아주 잘하는구나’ 하시며 허허 웃으셨다.
‘먼저 인사하기’는 내게 꽤 긍정적인 경험이었다. 하지만 내가 점점 나이가 들수록, ‘먼저 인사하기’는 긍정적인 경험에서 그렇지 않은 것으로 바뀌어 갔다. 나는 더 이상 귀여운 어린아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어른이 된 어린이들은 최대한 다른 사람의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서 고개를 숙여야 했다. 나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상한 사람이 되었다. 한국에서는 그랬다. 그런데 먼저 인사를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곳이 있었다. 그곳은 바로, 내가 처음 장기적으로 머물렀던 호주였다.
호주에 처음 갔을 때는 정말 신기했다. 어렸을 적의 나를 한가득 모아놓은 곳인 것 같았다. 집에서 버스정류장으로 가는 길에 누군가 나에게 인사를 했다. 아침부터 부지런히 차를 청소하던 청년이었다. 나는 기분 좋게 인사를 받으며, 차가 참 멋있다고 칭찬해주었다. 버스정류장에 도착하니까 누군가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그리고 갑자기 자신이 그린 그림을 보여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는 버스가 올 때까지 그 그림을 감상하며 어떤 부분이 인상 깊은지에 대해 말해주었다. 버스를 타니까 운전기사분이 날씨가 참 좋지 않느냐고 물으셨다. 나는 웃으며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내가 어렸을 적에 그랬던 것처럼 항상 먼저 인사를 건넸다. 그 인사들은 내가 기분 좋은 하루를 보낼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사실, 나는 ‘먼저 인사하기’에 그런 힘이 있는지는 몰랐다. 어렸을 때는 그저, ‘인사성이 밝은 아이가 되어라’라는 엄마의 말씀을 따라 열심히 인사를 했을 뿐이었다. 그렇게 먼저 인사를 했을 때는 몰랐는데, 호주에 가서 인사를 받아보니 깨달았다. 인사는 꽤나 긍정적인 에너지를 만든다는 것을.
우리는 대부분 같은 하루를 반복하며 산다. 매일 같은 지하철을 타고 같은 회사로 출근한다. 심지어 그 지하철에는 매일 보는 얼굴도 있다. 그렇게 얼굴을 매일 보다 보면 나도 모르게 내적 친밀감이 쌓인다. 막상 눈을 마주치면 황급히 피하지만. 그렇게 눈을 피하는 행위는 나도 모르게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을 유발하게 되고, 나의 하루는 그런 감정들과 함께 시작한다.
가끔씩은 한국에서도 호주에서 했던 것처럼 그냥 말을 걸고 싶을 때가 있다. ‘오늘은 날씨가 참 좋죠?’, ‘가방이 참 멋지네요!’ 비록 실없는 말일지라도 적막한 공기를 깨는 대화를 하다 보면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하루가 조금은 재밌어지기도 하니까. 그렇게 아무런 연고도 없는 사람들과 하나둘씩 친해지면 어떨까? ‘E’는 이런 상상을 하며 야릇한 미소를 짓는다. 내일부터는 자주 가는 빵집 아르바이트생에게 말을 걸어 봐야겠다. 만약에 MBTI가 ‘I’인 분이라면 이 글을 통해 먼저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전한다.
매주 수요일마다 [나만 보고 싶은 글] 매거진의 새 글이 올라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