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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종헌 Jan 19. 2019

눈먼 자들의 도시
- 환경과 인간의 본성 -

인간 본성, 그 본질에 관하여

주제 : 인간의 본성 / 작품 : 눈먼 자들의 도시 <주제 사마라구>

두근두근 금요일에서 나눈 대화를 소재로 쓴 글입니다.



본성에 대한 질문, 그것이 중요하다.


인간의 본성을 묻는 질문이라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선한가, 악한가'이다. 선과 악이 무엇인지에 대한 것은 차치하더라도 왜 본성에 대한 질문이 선과 악에 대한 질문으로만 귀결되는지가 의문이다. 중, 고등학교 윤리 도덕 교과서를 보더라도 성선설과 성악설을 필두로 인간의 본성을 선과 악의 관점에서 설명하려 한다. 선과 악은 옳고 그름의 문제다. 그것이 상대적이든 절대적이든 어떤 행동이나 생각을 가치 판단하는 점에서 말이다. 


눈먼 자들의 도시를 보고 '인간의 본성은 무엇일까?'라고 질문을 던지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악하다 혹은 선하다 혹은 그 둘의 중간이다고 대답할 것이다. 눈먼 자들의 책을 보고 인간의 본성을 판단하기 전에 그것에 대한 질문부터 바꿔보려고 한다. 이분법 적인 질문의 장점은 어떤 식으로든 결론을 내릴 수 있다는 점이다. 한 가지 기준을 가지고 판단을 하니, 이쪽 아니면 저쪽 이런 식으로 말이다.

(어쩌면 인간의 본성은 가치 판단을 하려는 것일 수도 있겠다.)


여기서 본성을 잠시 짚고 넘어가야 하는데, 본성이란 본연의 모습이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는 시작된다. 인간 본연의 모습이란 무엇인가? 눈먼 자들의 도시에 나오는 상황처럼 눈멀고 춥고 배고프고 문명이 파괴된 상황? 혹은 빈곤과 가난에서 벗어나 여유로운 생활을 즐길 수 있는 상황? 이러한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는 까닭은 상황에 따라 인간의 행동방식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만약 굶주리고 불안한 상태라면 인간은 서로를 신뢰할 수 없고 생존이 우선시되기 때문에 우리가 악하다고 규정하는 행동들이 만연해질 것이다. 반면, 풍요롭고 안정된 상태라면 서로를 도와주기 더 쉬운 상황일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누군가는 이렇게 행동했으니 악하고, 누군가는 이렇게 행동했으니 선하다고 말하는 것은 선과 악의 이분법적 질문에 한정지은 생각일 것이다. 결국 인간의 행동 양식이란 환경에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선과 악으로 본성을 파악하려는 시도는 어떠한 환경인가, 누구와 함께 하는가 등 다양한 조건들을 선제적으로 제시한 후 답할 수 있을 것이다.

(중립적인 상황이란 없다. 왜냐하면 어떤 식으로든 선한 쪽 혹은 악한 쪽으로 행동하기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기 때문이다. 그게 바로 이분법적 질문의 장점이 아니겠는가)



눈먼 자들의 도시, 그곳은 어떤 상황인가?


결국 모두가 눈이 멀어버린, 그래서 문명이 파괴되고 서로의 생존을 서로가 위협하는 상황까지 내몰리게 된다. 협력하는 사람도 있고 다른 사람을 억압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도 나타난다. 보이지 않음으로써 인류가 쌓아 왔던 모든 것이 파괴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집단적 공황에 빠져버린 이 상황에서 본성을 파악하는 것은 오히려 더 어려울 것이다. 우리가 이 상황에서 인간의 본성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은 인간 역시 생명의 위협을 받는 상황이면 동물처럼 악해진다. 혹은 그러한 상황에서 조차 다른 개체를 도울 수 있는 동물이다는 명제 밖에 얻을 수 없지 않을까?  악하다는 것은 결국 가치와 연관되어 있는데 이곳에서는 기존의 가치가 모두 파괴된 상태다. 의약품도 먹을거리도 사회도 제도도 그 어느 것도 기존의 상황과 다르다.


자, 그럼 인간이 이제까지 쌓아 올린 것에서 벗어나 자연 본연의 상태로 세상을 살아가게 되었으니 그 모습을 보고 인간을 판단하면 되는 걸까? 오히려 그런 것들이 없어졌을 때 인간이 악해지는 모습을 보인다면 혹은 그런 사람들이 증가하는 경향이 나타난다면 인간이야말로 환경을 통해 선과 악을 선택할 수 있는 존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악해질 수 있는 환경을 선하게 행동할 수 있는 환경으로 바꾸고 선한 사람이 선한 일을 거리낌 없이 하고 악한 사람이 악한 짓을 저지르지 못하는 환경을 만들어 갈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결국 인간이 무엇을 궁극적으로 추구하는가 이다. 실제 본성이 그러한 것은 너무 많은 상황과 변수 때문에 쉽사리 판단하기 어렵다. 예를 들어, 어린아이의 악한 행동을 보고 인간의 본성이 악하다고 판단하는 것은 아직 미성숙한 존재인 아이를 보고 인간 전체를 판단하는 오류를 저지르는 것이다. 결국 인간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선을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선과 악도 결국 인간의 도구 중 하나로 인간에게 봉사하기 위한 가치 중 하나인 것이다. 편안함, 안락함, 안전, 번영을 위해서는 악보다는 선을 추구해야 그것을 이룰 수 있다. 

(물론, 지금까지의 논의에서 선과 악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논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되면 논의가 훨씬 포괄적이게 되기 때문에 단순히 그러한 것들이 있다고 상정하고 말하려 한다. )



그렇다면 결국, 인간 본성의 본질은 무엇인가?


어떠한 것의 결론을 내릴 때 한 가지의 측면에서만 살펴보고 내리는 결론만큼 위험한 것은 없다. 다시 책으로 돌아가서 그 책에 나오는 사람들이 나중에 원하는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생각해보자. 안전과 의식주 문명과 제도를 원하지 않았을까? 그전의 세계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을까?  본성에 대한 것은 실제 그러한 것이 무엇인지와 무엇을 지향하는지 함께 파악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작품을 보면서 인간의 악한 모습을 많이 보아왔지만 선을 지향한다고 생각했다. 결국은 서로 피 흘리지 않고 평화로운 곳에서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는 것을 지향한다. 물론, 그중에는 폭력적이고 지배적인 성향의 사람이 있겠지만 대다수의 사람은 이것보다는 평화를 원하지 않을까? 


내가 내린 결론은 인간은 선을 '지향'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인간 일반에 대한 결론이라서 모든 인간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또한, 인간이 선하다는 것도 아니다. 그것을 지향한다는 것일 뿐. 


(글을 쓰다 보니 다소 책과는 거리감이 있는 글이 되었다. 아무래도 주제에 더 집중을 하다 보니 그랬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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