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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종헌 Jan 09. 2019

미 비포 유
- 존엄사에 대하여 -

죽음과 인간의 존엄

주제 : 죽음에 관하여 / 작품 : 미 비포 유 <조조 모예스>

멜랑꼴리 목요일에서 나눈 대화를 소재로 쓴 글입니다.



당신의 삶이 나락으로 떨어진다면,


어느 날, 갑자스런 교통사고를 당해서 전신 마비 환자가 되어버렸습니다. 당신이 움직일 수 있는 부위라고는 목 위의 얼굴과 손가락 끝 마디가 전부입니다. 당신은 어떤 삶을 살아가게 될까요? 여기, 윌 트레이너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활동적이고 유능해서 다양한 스포츠를 즐기고 자신의 커리어에 있어서도 탄탄대로를 걷는 사람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불행이 이 사람에게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그는 존엄사를 택하려고 합니다. 여러분은 그를 존중할 수 있나요?


삶의 시련과 불행을 대처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에게 닥쳐온 불행을 이겨내려 노력하지요. 친구들, 가족들 혹은 사회의 도움을 받아 다시 일어섭니다. 한편으로는 시련에 주저앉아 무너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 사람이 나약해서일 수도 있겠지만, 주어진 시련이 너무 가혹한 경우도 존재하지요. 지금 내가 살아가고 있는 삶을 송두리째 잃어버린다면 어떻게 될까요? 책의 주인공인 윌은 180도 달라졌습니다. 냉소적이고 비관적이게 말이죠. 그 누가 그렇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는 부모님에게 자신을 죽여달라고 애원합니다. 물론, 존엄사를 통해서 말입니다. 혹자는 아무리 그래도 죽음을 선택해서는 안된다고 말을 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어떤 삶은 죽음보다 더 가혹한 삶도 있지 않나요? 견딜 수 없을 만큼, 매 순간 죽고 싶은 힘든 순간들이 계속된다면 죽음이 더 나은 선택지가 될 수는 없을까요? 우리는 그런 순간에 어떻게 대처를 해야 할까요? 우리에게 죽을 권리는 존재할까요?



왜 살아야 하는가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는 사실 죽어야 될 이유가 없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여러분은 살아야 할 명확한 이유가 있으신가요? 삶은 자신의 선택이 아닙니다. 주어지게 되죠. 그래서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는 삶의 이유가 있기 아니라 죽어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죽어야 할 이유가 명확하다면 어떨까요? 삶의 의미를 잃고 죽고 싶은 이유가 명확하다면 그 사람이 살아야 할 이유가 있을까요?


윌이 살아야 할 이유를 여러 가지를 댈 수 있을 것입니다. 윌에게는 그를 사랑하는 가족들이 있습니다. 그가 죽으면 슬퍼할 가족들이 있죠. 또 그의 간병인 루이자도 있습니다. 루이자는 소설 속 여주인공으로 그의 간병인 역할을 하다가 서로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결국 그의 선택을 존중해주기는 하지만 그녀도 그의 죽음을 바라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가 살아야 할 이유를 하나 뽑자면 그의 주변 지인들이 그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죽음은 그와 관계 맺은 이들에게 슬픔을 안겨줍니다. 하지만, 이런 논리는 조금 빈약해 보입니다. 그 자신의 행복보다 주변 사람들의 행복이 그의 선택에 더 영향을 끼치는 것 같으니까요.


다른 이유로는 더 나은 삶의 가능성입니다. 그의 삶이 더 나아질 가능성이 있다면? 루이자를 만나 사랑하고 행복을 느끼면서 살아갈 수 있다면 어떨까요? 이것은 큰 이유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타인이 아닌 자신의 행복과 결부되어 있으니까요. 그가 조금만 더 노력하고 삶의 태도를 바꿔 본다면 그에게도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셈이니 말입니다. 그런데도, 죽음을 선택하는 것은 그 가능성을 포기한 것이며 자신에게도 큰 해약을 끼치는 것이겠지요.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논리를 중요한 이유로 제시하지 않을까 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윌은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활동적이고 정력적이며 자신의 에너지를 발산하면서 행복을 느끼는 사람이죠. 그가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 살아간다면 그것은 그가 그 삶에서 행복을 느꼈기 때문이 아니라 체념을 했기 때문일 겁니다. 사지마비의 삶이 가치가 없다거나 살 이유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윌 같은 사람에게 그러한 환경은 삶보다 죽음을 선택할 이유가 더 크다는 것이지요.



우리에게 죽을 권리가 있는가


이 책은 결국 존엄사에 대한 이야기를 윌 트레이너라는 인물을 통해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바로 우리에게 죽을 권리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권리라는 것은 사회가 부여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회적인 측면에서 얘기를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사실 존엄사란 스스로 자살할 수 없는 사람들이 선택하는 선택지입니다. 정말 삶이 힘들다면, 또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수 있다면 자살을 선택하겠지요. 존엄사가 필요한 사람들은 윌처럼 물리적으로 불가능하거나 치매나 뇌사로 정신적인 의사표현을 할 수 없는 분들일 것입니다. (물론, 고통스럽게 죽기 싫어서 존엄사를 선택하신 분들도 계실 겁니다.) 우리에게 죽을 권리가 없다면 이런 분들에게 존엄사를 해드릴 수는 없겠지요. 우리 사회에서는 존엄사를 금지하고 있습니다. 최근 들어 그와 관련된 논의가 진행되면서 극히 제한된 조건 하에 엄격한 과정을 거쳐서 연명치료를 중단하는 케이스는 나오는 것 같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우리에게 죽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삶은 부여받았지만 어떻게 죽을지는 스스로 정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혹자는 존엄사를 옹호하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아름다운 죽음은 없다. 하지만, 인간다운 죽음은 있다.


그렇습니다. 죽음이 어떻게 좋을 수가 있을까요? 모든 죽음은 나름의 슬픔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삶이 그것보다 더 힘들다면 죽을 수 있지 않을까요? 죽음의 선택이야 말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자유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래서 인간의 존엄을 위해서라면 인간에게 죽을 권리를 부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간답게 죽을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는 것이지요. 존엄사가 윌에게 행복이나 주었다거나 좋은 대안을 제시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현재 가지고 있는 고통의 삶에서 해방을 시켜줬다고는 할 수 있습니다. 지금 현재 불행하다는 사실과는 별개로 앞으로의 미래도 달라지지 않을 거라는 사실이 더 불행한 법이니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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