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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종헌 Mar 11. 2019

인간실격과 이방인
- 타인 이해하기 -

이해와 오해의 경계에서

주제 : 타인 이해하기 / 작품 : 인간실격 <다자이 오사무> | 이방인 <알베르 카뮈>

매력적인 일요일에서 나눈 대화를 소재로 쓴 글입니다.



이해의 경계선

사람에게는 이해의 경계선이 있습니다. 어떤 생각이 그 경계선 안에 있다면 그것이 이해가 되고 납득이 갑니다. 그런데, 그 경계의 밖에 있는 생각들은 이해할 수 없게 됩니다. 그리고 이해의 경계선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동성애를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반면, 어떤 사람은 자신은 그것을 절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동성애는 존재 방식이기 때문에 이해의 문제는 아니지만, 동성애자가 이해의 경계선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해가 필요할 수 있습니다). 이 경계선이 중요한 까닭은 우리가 사람을 만났을 때 이 경계선에 따라 그 사람을 받아들일 수 있는지 없는지가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인간실격의 요조는 우리가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인물입니다. 익살꾼이라는 가면을 쓰고 술과 마약에 절어 살며 술집 여자와의 숱한 잠자리를 가지면서도 무기력한 삶을 살아가죠. 또, 아내가 다른 사내한테 강간을 당하는 상황에서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 상황을 지켜보기만 합니다. 무엇을 하겠다는 의욕도 삶에 대한 의지도 있지 않은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 삶의 한 부분에서는 요조를 닮아 있기는 하지만, 그의 삶을 이해하기는 쉽지가 않습니다. 물론 타인의 삶을 이해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요조의 삶은 특히 이해의 경계선 저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습니다.




한편, 어머니의 장례 다음날 여자 친구와 잠자리를 갖고 햇빛이 눈부시다는 이유로 사람을 죽은 뫼르소라는 남자가 있습니다. 그의 삶은 요조와는 다른 방식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면들이 있습니다. 사이코패스처럼 느껴지는 그의 무심함은 결국 그를 죽음으로 이끕니다. 이 남자는 알베르 카뮈의 소설, 이방인의 주인공입니다. 뫼르소는 이 세계에서는 이해받지 못하는 이방인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요조와 뫼르소 이 두 남자의 공통점은 타인으로부터 이해받지 못하는 삶을 살았다는 것이죠. 이해의 경계선에서 저 멀리 떨어진 이 사람들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이해의 지평은 우리의 그릇이다


이해의 경계선이 극단적으로 좁은 사람을 우리는 '편협한' 사람이라 부릅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너무나 좁아 역설적으로 이 사람 또한 이해의 경계 밖으로 밀려나 버리지요. '왜 저 사람은 저렇게 이해의 폭이 좁은 건지 이해할 수가 없네요.' 라면서 말입니다. 우리가 편협한 사람한테 너무나 잘 들이미는 이 잣대를 왜 스스로에게는 들이밀지 않는 것일까요? 자신의 이해의 경계선은 얼마만큼인가요? 이것이 넓을수록 그 사람의 이해능력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그 사람을 이해할 수가 없어'라는 말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이해능력의 결여를 보여주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이해하지 못하는 원인을 내가 아니라 타인으로 바꿔버립니다.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이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미친놈들까지 이해해야 돼?'라고 생각하시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이해한다고 해서 그들의 생각이나 행동에 동의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적어도 왜 그들이 그런 행동이나 생각을 갖게 되었는지 안다는 뜻이죠. 연쇄 살인마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다고 해서 그들의 행동에 동의하는 것은 아닌 것과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우리의 이해의 경계선이 넓어질수록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되고,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삶을 더 다양한 측면에서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요? 삶에 대한 더 깊은 이해가 가능한 것이지요.



삶은 선택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다양한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는 삶을 살아갈 것인지, 한정된 경계 안에서 그 안의 사람들만 이해하는 삶을 살아갈 것인지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을 이해하지 않은 삶을 어떻길래 우리는 타인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까요? 이해하지 않은 채로 살아가도 내 인생에 무슨 일이 생기기야 할까요?





이해해야 하는 이유, 오해하지 않기 위해


안타깝게도 이해하기를 멈추면 그곳에서부터 오해가 시작됩니다. 그 사람의 행동을 오해하고 생각을 오해하게 됩니다. 이해하지 않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방식으로 '이해'하게 되어버립니다. 장발장을 이해하기를 멈추면, 그를 욕구를 참지 못해 범죄를 저지른 절도범으로 볼 것입니다. 독일 유태인 학살의 전범 아이히만을 이해하기를 멈추면, 그를 천하의 악인 중의 악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들을 이해의 경계선 안으로 끌어들인다면 장발장이 겪은 극심한 배고픔 공감하게 되고 음식조차 구할 수 없는 그 시대의 구조적인 문제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고, 아이히만이 천하의 악인이 아니라 생각하기를 멈춘 '판단의 무능'으로 저지른 범죄임을 알고 그 누구도 그렇게 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장발장과 아이히만을 이해한다고 해서 장발장이 저지른 절도를 용인한다는 것도, 아이히만이 저지른 학살을 긍정하는 것도 아닙니다. 적어도 그들을 다른 방식으로 이해하지는 않게 되겠죠. 



우리가 타인을 오해함으로써 얼마나 잘못된 생각을 가지게 되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잘 아실 것입니다. 이해의 경계선 밖은 이해하지 않음이 아니라, 오해로 가득 차 있음을 말입니다. 이해의 지평을 넓힌다는 것은 다시 말해 오해, 편견, 편협함을 줄여간다는 것이죠. 이 역시 여러분의 선택일 것입니다. 편견과 편협함으로 가득 찬 삶을 살아가느냐, 넓은 이해의 지평을 가지고 살아가느냐 말입니다. 요조를 인간실격으로 볼지, 인간의 실존에 직면한 고뇌하는 청년으로 볼지는 요조가 아닌 여러분에게 달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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