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여행의 시작이지만, 스페인 얘기는 없습니다.
저는 태생이 미괄러이지만, 이 글은 두괄식으로 시작해보려 합니다.
결론 ; 저는 여행을 갑니다. 스페인으로요.
스페인이 처음은 아닙니다. 수박을 싸고 있는 랩을 겉핥는 정도이긴 했지만, 몇 년 전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를 후다닥 스쳐 지나갔었습니다. 이번 여행을 키운 것은 날이 따뜻할 때의 유럽에 가야겠다는 엄마의 강력한 의지가 팔 할이었습니다. 휴가에 대한 눈치(봐야 하는) 점수가 다른 네 사람이 날짜와, 시간과, 가격을 두고 얼마나 열띤 토론을 했는지! 얼마 하지 않았습니다. 저희 가족은 제 말에 순응하는 편입니다. 하하. 여행을 준비하면서 크고 작은 에피소드가 많았어요. 18년 연말, "저... 5월에 휴가를 좀 길게 쓰려합니다."라고 하니 제 손을 붙들고 "그때까지 있어줄 거예요...?" 하던 팀장님의 슬픈 눈망울은 잊을 수 없죠.
그렇지만 스페인 여행을 앞두고 겪은 가장 큰, 그리고 가장 무거운 일은 할머니를 보내드린 것입니다. 할머니에 대한 얘기를 하지 않으면 <나의 스페인 여행> 책의 저자 서문을 건너뛰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무거운 마음은 조금 덜고, 너무도 가벼운 눈물샘은 지그시 누르고 이야기를 시작해봅니다.
한 달에 적어도 두 번은 만나고, 여름엔 여행을 가고 연말엔 송년회 레크리에이션을 준비하는 가족. 할머니는 그런 가족의 웃어른이었습니다. 9살 무렵까지 할머니네 집에서 생활했는데 "이 얄미운 계집애" 소리를 듣고 할머니가 나 미워한다고, 엉엉 울었던 기억도 선명합니다. 생일마다 수수팥떡을 먹어야 잔병치레가 없다고, 10살 생일날 수수팥떡을 들고 버스를 타고 집에 왔던 할머니의 모습도 떠올라요.
지금으로 치면 "인싸" 였던 할머니는 동네 경로당, 산악회에 매일같이 출석했었습니다. 지금은 보기 힘든 손바닥만 한 노오란 엽서에 동심 산악회 정기모임, 이라는 글자가 빼곡히 쓰여있으면 할머니께 가져다 드렸었죠.
그렇게 건강하던 할머니가 작년 여름부터 기운을 잃으셨습니다. 식사도 어려워하시고, 말수가 사라져 급히 병원에 가보았더니 지병이 심해진 것 같다고. 나이가 들면 자연스러운 과정이라 했습니다. 정기 가족 여행이 후쿠오카에서 국내로 바뀌긴 했지만 여전히, 가족들과의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식사도, 산책도 잘하시는 걸 보며 가족들 모두 다행이라 생각했어요.
야속하게도 잠깐잠깐일 뿐, 할머니의 기운은 돌아오질 않았습니다. 할머니도, 아프진 않다 하고 병원도 별 말이 없었지만 그 사이에 할머니 몸속의 암세포는 부피를 키워나가고 있었습니다. 한 군데도 아니고, 자그마치 세 군데라니요. 삼촌과의 통화를 마치고 엄마는 안방 침대에 모로 누운 채 한참 방 밖으로 나오지 않았습니다.
저와 가족들은 비행기 티켓 취소 문의를 넣고, 할머니와 시간을 자주 보내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주말은 무조건 할머니 댁에서, 평일에도 시간이 나면 들렸어요. 2018년 12월 31일은 가족들 모두가 행복했던 날입니다. 할머니도 컨디션이 좋아 맛있게 식사를 하셨고, 새로 들인 아이패드 구경을 하며 온 가족이 셀카도 찍었거든요.
2018년 2월 18일은 애인과의 기념일, 한 달 전부터 휴가를 내두었습니다. 전 날인 일요일 오후였어요. 아침에 할머니가 식사하신 게 안 좋았는지 응급실에 계신데 괜찮다는 전화를 받고 병원에 달려갔습니다. 분명 괜찮다고 했는데, 그래서 마음 놓고 갔는데.
병실에 들어서자마자 그대로 돌아 나와 동생에게 전화를 했어요. 지금 당장 병원에 안 오면, 너 후회할 것 같다고. 소리 반 울음 반이었는데 동생은 기똥차게 알아듣고 서울에서 날듯 달려왔습니다. 꼭 24시간째가 되던 18일 새벽, 할머니가 떠나셨습니다. 눈물을 쏟아내는 와중에도 마지막에 남는 감각은 청각이라는 간호사의 말에 온 가족이 돌아가며 할머니에게 인사를 했어요. 고맙고, 사랑한다고.
저는, 우리 가족은. 일요일마다 할머니가 생전에 가장 좋아하시던 절에 갔습니다. 장례를 다 치르고, 첫 제를 하는 날 절에서 나오는 길에 할아버지가 먼저 "얘들아, 그거 스페인 가야지. 엄마도 느이들 잘 다녀오라 했어."라고 얘기하셨습니다. 가족들끼리 시간도, 추억도 많이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고민 끝에 우리는 짧게 슬퍼하고 길게 기억하기로 했습니다. 여행은 상처는 보듬어주면서, 기억은 깊게 새기는 가장 좋은 방법이니까요. 스페인에서도 맛있는 걸 먹거나, 좋은 풍경을 보면 우리는 모두 각자의 방법으로 할머니를 떠올리겠지요.
그렇게, 우리는 여행을 가게 되었습니다. 스페인으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