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해하지만 유쾌한 상상

더글러스 애덤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by 와이

유난히 눈꺼풀이 무거운 아침이 있다. 이불을 개고, 세수하고, 양말을 고르는 일상이 도돌이표에 갇힌 것처럼 지루하다. 어제와 똑같은 만원 버스가 이상하게 숨 막히고, 평소와 다르지 않은 오늘이 답답하게 느껴지는 아침. 이런 날엔 스스로에 대한 처방으로 흥겨운 음악을 깔고, 시답잖은 농담이 담긴 책을 꺼내 읽는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는 셀프 처방전에 가장 많이 등장한, 즐겨 읽는 SF 소설이다. 지구 종말과 우주를 다룬 6권의 시리즈 책이지만, 특유의 간결하고 신랄한 문체 덕분에 술술 읽을 수 있다. 세상에 농담이 필요한 사람이 많긴 했는지 꽤 히트를 쳤다. 영화와 TV 시리즈, 연극까지도 만들어졌으니. 그래도 애덤스의 영국식 조-크는 글에 가장 잘 담겨있다.


<안내서>에 담긴 상상과 풍자는 지루한 아침을 잊게 만든다. 주인공의 5년 지기 친구는 히치하이크에 실패해 단역 배우인 척하는 외계인. <안내서>에 따르면 ‘대체로 무해한’ 지구는 은하 고속도로 건설을 위해 순식간에 ‘철거’ 당한다. 지구 종말에 대한 묘사도 현실적이어서 웃기다. “달러는 이제 영원히 하락해버렸군. 그러자 조금 오싹해졌다. 맥도날드 햄버거 같은 것도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졸도했다.”


tonik-U0wwiY6nRGA-unsplash.jpg 하지 말라니까 더 하고싶어지는 묘한 심리


책을 사면서 ‘don’t panic’이라 적힌 수건을 받았다. <안내서>의 표지에 적힌 문구다. 지루함이 넘치는 목요일 아침엔 꼭 이 수건을 꺼내 쓴다. 그리고 무해하지만 유쾌한 상상으로 하루를 보낸다. 옆자리에서 간식 상자를 뒤적거리고 있는 에디터도 사실 히치하이킹에 실패한 외계인 일지 몰라, 따위의 농담을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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