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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좋아해 Oct 31. 2023

그리운 나의 집

그리움은 다시는 그때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받아들이는 거예요

  두 번은 없는 순간들이 있다. 첫째 아이가 내게 찾아오고 결혼이라는 엄청난 숙제를 빠른 시간 내에 해결하느라 조금 지쳐있었다. ‘결혼하다’라는 동사 안에는 웨딩 촬영, 드레스 및 예식장 계약, 상견례, 예물 예단, 이불값, 시댁, 사돈어른, 한복, 청첩장 등이 함께 따라오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아이는 뱃속에서 무럭무럭 부풀어 올랐고 출산을 앞둔 여름방학에 나는 무주로 이사를 했다.


  한적하고 고요한 시골 마을이었다. 우리는 관사에서 처음으로 함께 살기 시작했다. 관사 옆에는 넓게 고구마 밭이 있었고 산으로 둘러 쌓여 있어서 항상 서늘한 느낌이었다. 그 동네에서 학교와 관사만이 유일한 2층 건물이었고 동네분들의 집은 밭을 끼고 있어서 생각보다 멀리 군데군데에 떨어져 있었다. 도심의 주택가와는 또 다른 분위기였다.


  남편이 퇴근하고 돌아오면 함께 저녁을 차려먹고 동네를 산책하곤 했다. 갈 데라곤 사실 학교밖에 없어서 자주 운동장을 거닐었다. 오래된 학교의 좋은 점은 나무들이 굉장하다는 것이다. 게다가 주사님과 교장 선생님께서 밭을 가꾸길 좋아하셔서 초록으로 가득한 학교였다. 남편은 작은 풀을 발견하고 멈춰 섰다.

  “이게 아직도 있네, 돈나물이야. 이거 초장 찍어 먹으면 맛있어.”

  “나 이거 마트에서 봤어. 근데 이름이 왜 돈나물이야? 먹으면 부자 되나?”

  “돌 밭에서도 잘 자라서 그럴걸? 원래 돌나물인데 돈나물이라고도 불러.”

  “이거 뜯어가서 먹자.”

  우린 그 자리에 쪼그려 앉아 돈나물을 뜯어댔다.


  자리를 옮겨 등나무 밑을 지나는데 오이같이 생긴 애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남편은 열매를 하나 툭 따더니 내게 물었다.

  “이거 이름이 뭐게?”

  “조롱박?”

  “무슨 조롱박이 이렇게 생겼어. 이건 수세미야.”

  “무슨 소리야. 거짓말하지 마.”

  남편이 나를 속이는 줄 알았다. 설거지할 때 쓰는 수세미가 식물 수세미랑 이름이 같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다. 오이같이 생긴 커다란 수세미가 주렁주렁 열린 것을 보고 신기했고 열매가 스펀지처럼 폭신하게 변한다는 것도 재밌었다.

  “식물을 하나도 모르네. 우리 이러고 있으니까, 순박한 산골 소년이 하얀 도시 소녀 데리고 다니는 것 같다. '산골 소년의 사랑 이야기'라는 노래 알아?

  라고 말하더니 뒤이어 노래를 흥얼거렸다.


  아기가 태어나기 전의 두 달은 내 생애 가장 충만한 순간이었다. 배 속에 있는지 없는지 잘 느껴지지 않던 생명체는 하루에도 여러 차례 발길질을 뻥뻥 해대며 존재감을 과시했다. 내 신체 안에 또 다른 생명이 자라고 있다는 사실은 놀랍고도 멋진 일이었다. 예정일이 지나도 나오지 않는 아이 덕분에 우리는 무주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와인 동굴도 다녀오고 덕유산에도 올라갔으며 개울가에 멈춰 다슬기를 잡으며 놀았다. 셋이긴 하지만 둘 뿐이기도 한 우리는 온전히 서로를 위해 존재하고 있었다.


  아기가 태어나면서 그 모든 것들은 지나간 일이 되었다. 우리는 서로가 아닌 아이를 바라보았고 ‘엄마’나 ‘아빠’라는 새로운 사회적 호칭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뱃속에 첫째 아이를 품었을 때의 충만함은 종종 그리움이라는 단어와 함께 나를 그때로 데려가기도 했다. 사실 그 당시의 상황이 그립다기보다 남편과 함께했던 순간들이 그리웠을 것이다. 시간이 흘러 둘째를 임신했을 때 나는 마음속으로 환호했다. 그때를 다시 한번 느껴볼 수 있을 것 같아 설렜기 때문이다.


  둘째의 임신은 충만함과는 거리가 먼, 그저 현실이었다. 첫째 아이는 아직 어렸고 우리 집은 엘리베이터가 없는 5층이었다. 나는 불러오는 배와 함께 첫째 아이를 등에 업고 한 칸 한 칸 계단을 오르내려야 했다. 덕분에 살이 찔 틈이 없었다. 남편은 때마침 하고 싶은 일이 생겼고 최선을 다해 그 일에 집중하고 있었다. 지금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지난 과거는 완전히 그리움으로 남게 되었다.


  그리움은 다시는 그때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계속해서 받아들이는 과정이지 않을까. 지난 일들을 떠올리며 그때가 한 번뿐이었던 순간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있다. 그때를 그리워하며 그리움의 문을 열었다가 지금을 살기 위해 그 문을 닫는 것도 같다. 한 번씩 그 문이 활짝 열려서 그때로 건너가고 싶은 마음도 들지만, (나는 시간을 달리는 소녀도 아니고 스즈메도 아니기 때문에) 그저 충실하게 지금을 살고 있다. 어쩌면 매 순간순간 미래의 그리움을 만들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무주에서 익산을 거쳐 전주로 이사를 했다. 아이들은 종종 익산에서 살던 때를 이야기한다.

  “엄마 나 예전 집이 그리워. 거기서 다시 살고 싶어.”

  “엄마도 그리워. 그립지만 다시 돌아갈 수는 없어.”

  “왜 못 돌아가? 거기엔 태권도 관장님도 있고, 지민이도 있고, 하율이 형아도 있잖아. 어린이집 선생님도 그리워.”

  “돌멩아, 우린 지금 여기에 살고 있어. 그때를 그리워하고 추억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돌아갈 수는 없어.”

  아이는 속이 상해서 나를 붙잡고 엉엉 울었다. 그리움을 견디고 지금의 시간들을 지나가야 한다는 걸 아이는 받아들이기 힘들어했다.


  남편은 순박한 시골 청년을 지나 어른이 되었다. 너무 일찍 어른이 된 것이 아쉬웠는지 뒤늦게 여드름이 돋아나 마치 가시 복어 같다. 아마 미래의 나는 “오빠 예전에 여드름 엄청나서 가시 복어 같았잖아! 그때 진짜 못생겼었는데!”라며 그리움을 담아 지금을 놀려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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