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알림장에 하루 일기를 쓰고 있다. 학교에서 있었던 일 중 기억에 남는 일을 한 두 문장으로 정리해보는 활동이다. 알림장 검사를 하기 위해 내 옆으로 아이들이 줄을 선다. 내게 엄청난 힘이 생긴다.
"이거 무슨 글씨인지 못 알아보겠어. 이러면 선생님 못 읽어요. 다시 써오세요."
"선생님이 제일 싫어하는 게 뭐라 그랬지? 틀린 글씨 안 지우고 그 위에 진하게 덮어쓰는 거야. 지워 오세요."
"그런대가 아니라 데. 어! 이!"
"해다가 아니라 했!다! 받침에 쌍시옷을 써야 해요."
그 날도 반말과 존댓말 속에 친절과 냉정을 분주히 섞어가며 알림장을 검사하고 있었다.
[오늘 처음이로 회의를 해다. 재밋었다.]
[회의가 재밌었다.]
[처음 회의했는데 좋았다.]
학급 회의를 했다는 이야기를 거의 대부분의 아이들이 써 온 것을 발견했다. 그것도 '처음 했다'는 내용이 상당수를 차지했다. 이상했다. 나는 분명 1학기에도 학급회의를 통해 학급 규칙을 정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생일파티 때는 무엇을 할지 함께 결정했고 우리 반에 필요한 1인 1 역할도 회의를 거쳐 결정했는데,,,,, 아이들은 왜 오늘 한 회의를 '처음'으로 받아들였을까?
1. 재밌는 회의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동안은 재미가 없어서 기억이 안 났다.)
2. 회의라는 단어를 설명하고 난 뒤 회의를 시작했는데 그 영향 때문에 회의가 무엇인지 정확히 인지했다. (그동안 해왔던 행동이 회의라는 단어로 표현된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3. 1학기에 했던 회의는 일회적인 이벤트처럼 흘러가버려서 잊히게 되었다. (반복적으로 하지 않으면 쉽게 잊히니까.)
4. 나는 그동안 우리 반에서 회의를 제대로 운영하지 못했다. (그래서 아이들이 회의를 이제야 받아들인 것이다.)
네 번째 가능성은 다소 치명적이다. 민주주의를 가장한 독재 교실을 만들고 있었던 건 아닌지 걱정이 된다. 조금이라도 더 힘을 가진 쪽이 조심해야 한다고 했는데... 나도 모르게 내가 가진 힘을 무기 삼아 휘두르고 있었던 건 아닐까.
'처음'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회의를 통해 얻은 결론은 '또 해보지 뭐'이다. '이것이 회의입니다'라는 정의로 배우는 것도 좋지만, 해 보면서 함께 배우는 것도 매력적이니까. 나 역시 함께 배우고 있다. (끼워줘서 고마워 애들아)
+ 사족
알림장은 집으로 가져가게 한다. 알림장을 보고 스스로 숙제나 준비물을 챙기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꼭 학교에 놓고 다니는 아이들이 있다. (아마 아이의 입장에서 나름의 이유가 있으리라.)
하루 일기를 사진 찍고 싶다는 욕심이 뒤늦게 생겼다. 아이들은 이미 집으로 돌아가버렸고 서랍을 살피기 시작했다.
'한 명만 놓고 가라. 한 명만...'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서랍에 있는 알림장을 발견했다.
회의가 재밌다는 내용은 아니지만 어쨌든 그날의 조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