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서 작가는 나이 마흔에 등단했다.’라는 사실은 내게 큰 힘이 되었다. 나는 아직 마흔이 되지 않았으니까. 마흔이 되려면 아직 까마득한 시간이 남아있으니까, 라며 쓸데없는 자기 위로를 했기 때문이다. 까마득한 시간은 흐르고 흘러 빠지지 않는 나잇살과 숨길 수 없는 주름을 만들어 냈다. 삼십 대 후반에 접어든 지금은 마흔이 코 앞이다. 덜컥 겁이 난다. 나는 마흔이 되어서도 등단은커녕 아무것도 한 게 없을 것 같아서, 내 글은 여전히 제자리걸음인 것 같아서 불안하다.
작년 상반기 동안 매주 한편씩 글을 썼다. ‘브런치’라는 글쓰기 플랫폼에 글을 올려보기도 하고 함께 사는 ‘집 친구’에게 수줍게 꺼내 보이기도 했다. 반응은 다양했다. 어떤 글은 하루 만에 조회수가 삼천을 찍기도 했고 어떤 글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중 가장 나를 신경 쓰이게 했던 건 집 친구의 반응이었다. 그는 내게 말했다.
“작위적이야.”
“네 글은 너무 너에게만 빠져있어.”
“다른 사람들이 너의 일기 같은 글을 읽고 싶어 할까?”
“뭘 말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어. 그래서 할 말이 없어.”
그는 1차 독자로서 턱턱 걸리는 부분을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매도 계속 맞으면 반항심이 생기듯이, 나는 그의 안목에 물음표가 생겼다.
‘진짜 내 글이 그렇게 별로인가?’
재밌어서 쓰던 글이었는데 아무것도 못 쓰는 시간이 찾아왔다. 작년 하반기는 내가 써왔던 글을 읽고 또 읽으며 계속해서 ‘정말 별로인가?’ ‘진짜 별로다.’ ‘더는 글을 못 쓰겠다.’의 생각 사이를 왔다 갔다 했다. 글을 쓰지 않기 위한 변명은 수도 없이 떠올랐다.
문예창작과에 지금이라도 지원을 해볼까, 글쓰기 강연을 하는 작가님 일정을 따라다녀 볼까, 과외라도 받아야 하나, 알면 알수록 사랑하게 되는 것이 만고의 진리지만, 글쓰기는 알면 알수록 모르는 게 더 많아지는 것 같았다. 쓰지 못하니(않으니) 읽기라도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글쓰기 책을 읽기 시작했다. 스티븐 킹의 <유혹하는 글쓰기>, 배지영 작가의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면>, 이현 작가의 <동화 쓰는 법>, 이슬아 작가의 <몸과 마음을 탐구하는 이슬아 글방> 등 그들이 쓰는 이야기를 읽으며 울고 웃었다. 작가들이 쓰는 방식은 저마다 달랐지만, 공통점이 있었다. 자기만의 시선으로 ‘어쨌든’ 글을 쓴다는 것이었다. 쓰는 사람들이었다.
‘어쨌든’ 다시 글을 쓰고 싶었다. 내 글에 대한 구체적인 피드백을 받고 싶어서 2회에 15만 원을 지불하고 글방 문을 두드렸다. 그렇다. 나는 돈이 아까워서라도 글을 써야만 하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글방에 꺼내 보인 내 글은 아니나 다를까. 혹독한 피드백을 받았다.
“좋아해의 글은 귀엽지만, 정보가 너무 없어요.”
“주인공의 생각에 공감이 가지 않아요. 그 이유는 아마 좋아해님의 서사가 부족하기 때문인 것 같아요.”
상처가 되지 않게 친절한 언어를 선택했을 뿐, 결국 집 친구가 했던 말과 같았다. 하지만 받아들이는 내 마음이 달랐으니, 이것이 바로 권위의 힘인가? (돈의 힘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가 내게 이야기할 때마다 마음속으로 거부하고 있었다. ‘전문가도 아니면서, 왜 이렇게 냉정하게 평가하는 거야. 이러면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잖아.’ 라며 그를 탓하기도 했다.
나는 그에게 글을 내보이면서 무엇을 바랐던 걸까. 글에 대한 조언이나 성장을 위한 발걸음이 아니라 사랑을 바랐던 것 같다. 위로와 응원과 지지를 바라기도 했다. 그러니 계속해서 제자리걸음일 수밖에 없었나 보다. 가장 큰 문제는 그에게 잘 보이기 위한 글을 썼던 것이었다. 그게 문제였다.
글쓰기 딱 좋은 나이,라는 건 없었으면 좋겠다. 박완서 작가는 마흔에 등단했지만, 나는 쉰에 등단할 수도 있고 어쩌면 등단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욕심을 부리자면 꼬부랑 할머니가 되어 주름이 잔뜩 생겨도, 꾸준히 쓰는 마음만은 주름 없이 남아있으면 좋겠다.
#좋아해서남기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