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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좋아해 Nov 18. 2023

이제 마침표를 찍어요

스스로를 구하는 일

  저녁과 밤 사이였을 것이다. 하루 일과가 마무리되고 휴식을 취하려는 순간, 전화벨이 울렸다. 밤 중에 울리는 전화는 대게 불편한 경우들이 많기 때문에 벨 소리만으로도 긴장했다. 전화기를 들어 화면을 보니 연락처가 저장되지 않은 번호였다.

  “여보세요.”

  “돌멩이 어머님 맞으시죠?”

  “네 맞아요. 누구실까요?”

  “어린이집에서 다른 반 선생님이에요. 다름 아니라 아까 돌멩이 데리러 원에 오셨잖아요. 그때 제 차를 문콕 하셨더라고요.”

  “네? 문콕이요?”

  “네, 제가 버스에서 다 보고 있었거든요. 차가 생각보다 많이 찌그러졌어요.”


  당황스러웠다. 평소 차에서 내릴 때 옆 차와 부딪히지 않게 매우 신경을 쓰는 편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문을 열다가 부딪힐 것 같으면 내 손을 문 사이에 끼워 넣어 차가 다치지 않게 할 정도이다. 그날은 옆 차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을 만큼 공간이 넓었다.  

  “선생님, 제가 아니라 다른 분이 그러신 것 같아요.”

  “아니에요. 어머님 맞아요. 어머님 차 모닝이잖아요. 제 차는 옆에 있던 BMW거든요. 제가 하원 버스 안에서 주차장을 보고 있었어요. 어머님이 차에서 내렸다가 다시 돌아가서 한참을 제 차 근처에서 왔다 갔다 하셨잖아요.”

  이건 또 무슨 소리란 말인가. 머릿속이 점점 새하애졌다. 내가 알아차리지 못한 잘못을 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스스로에 대한 의심이 생겼고, 상대방의 확신하는 어조에 의심은 사실이 되어 가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뿌옇기만 하던 그때가 선명하게 기억이 났다.


  “아! 선생님, 제가 다시 돌아간 이유는 선생님 차 때문이 아니에요. 제가 아이랑 놀이터에서 놀다 가잖아요. 햇볕이 너무 강해서 차로 돌아갔고, 차에 있던 선크림을 바르고 있던 거예요.”

  당황스러움에 손을 부들부들 떨며 통화를 하는데,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남편이 전화기를 빼앗았다.

  “선생님 늦은 시간에 전화하셔서 다짜고짜 사람을 범죄자 취급하시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습니다. 정확한 증거가 있다면 그걸 바탕으로 다시 이야기해 주시죠. 그리고 선생님께서 잘못 오해하신 거라면 이 사람에게 사과하셔야 합니다. ”

  선생님께서는 CCTV든 뭐든 증거를 대겠다며 화를 냈고 전화를 끊었다.


  그 후로 여러 날을 기다렸지만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연락을 기다리고 있다는 문자도 보내봤지만 답장은 돌아오지 않았다. 돌아오지 않는 답장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을 것이다. 첫 번째는 상대도 나도 자신이 피해자라는 사실을 소리 없이 최선을 다해 주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이 싸움을 그만하고 싶다는 의미일지도. 하지만 어느 쪽이든 마무리는 필요하다. 누군가의 마음에 점을 찍었다면 이 점이 선으로 이어질 것인지 아니면 작은 점으로 남을 것인지 정도는 알려야 하는 거 아닐까? 적어도 내게는 그게 필요했다.


 ‘왜 연락을 주지 않는 걸까?’ ‘내 잘못이라고 굳게 확신하고 있는 걸까?’ ‘내 차가 작은 경차여서 나까지 만만하게 보는 걸까?’라는 식의 온갖 자격지심이 나를 괴롭혔고 어린이집에 갈 때마다 신경이 곤두서기 시작했다. 그 선생님은 나를 알고 있고, 나는 그 선생님이 누구인지, 얼굴도 이름도 모른다는 사실에 매번 긴장했다. ‘저 선생님이 나를 노려보는 것 같은데, 저 사람인가?’ ‘지금도 나를 지켜보고 있는 건 아닐까.’ ‘선생님들 사이에 진상이라고 소문이 난 건 아닐까?’ 시간이 지날수록 상대에 대한 미움과 원망이 쌓여갔다. 약간의 틈이 생기면 그 사건이 떠오를만큼 나는 분노에 사로잡혀 버렸다.


  남편은 새로운 대안을 제시했다.

  “차라리 고소할래? 네 개인정보를 어린이집에서 마음대로 취득해서 사적으로 이용했잖아. 이거 형사소송감이야.”

  순간 솔깃했다.

  “게다가 형사소송은 민사랑 달라서 변호사를 상대하는 게 아니라 경찰이 수사해. 그때쯤 되면 너한테 미안하다고 당장 연락 올걸?”

  솔깃했던 마음은 슬며시 사라지고 주저하게 되었다. 복수의 마음이 칼날이 되어 내게 다시 돌아올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못하겠으면 덕을 쌓았다, 생각하고 깔끔하게 용서해 버려.”


  용서는 받는 이에게도 하는 이에게도 자유로워지는 일 같다. 더 이상 잘못된 일에 서로가 얽매여있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서로를 복수나 죄책감으로 꽁꽁 묶어두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품은 마음에서 조금이나마 자유로워지는 것이 아닐까. 나는 자유로워지고 싶어서 상대방을 용서하기로 마음먹었다. 아무도 내게 용서를 구하지 않았지만 용서가 가능하다는 사실이 이상하기도 하다. 정확하게는 마음에 찍힌 점이 점점 커져가는 것이 두려워서 용서‘해야 한다’라고 스스로에게 여러 번 되뇌었다.


  무게가 굉장히 다르지만 영화 <밀양>에서도 용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주인공은 자신의 아들을 죽인 가해자를 용서하기 위해 감옥을 찾아간다. 하지만 가해자는 피해자에게 용서를 구하지 않는다. 자신의 잘못에 대해 이미 하나님께 용서를 받았고 평안에 이르렀다고 이야기하는 가해자. 그의 맑은 얼굴을 보며 주인공은 분노한다.

  “내가 용서하지 않았는데 하나님이 먼저 용서하셨다고? 나는 피해자이고 그는 가해자인데 같은 평안 안에 산다고?”


  가해자의 사과 없이 용서는 이루어질 수 있을까?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가능하다고 본다. 주인공이 용서의 주도권을 하나님께 빼앗겼다고 생각하여 분노했듯이, 가해자의 사과를 우선시한다면 용서의 주도권은 내가 아니라 상대에게 있는 것과 같다. 그런 의미에서 용서는 스스로를 구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은 거울을 보며 스스로 머리카락을 자른다. 비로소 주도권이 제자리로 돌아온 것 같았다.

 

  마음속으로 용서 ‘해야 한다’를 반복하여 되뇌어도, 용서는 어려운 일이다. 특히나 나 같은 사람에게는 더더욱.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아직까지도 저장해 둔 상대의 전화번호를 들여다본다. 말로는 용서하고 털어버렸다고 하지만 여전히 용서를 못하고 있는 나를 바라본다. 마지막 문장의 점을 찍으며 연락처의 삭제 버튼을 눌러야겠다. 비로소 내 마음의 점에도 마침표가 찍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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