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직장생활
신호대기 중이다.
아파트 앞 사거리 신호등 앞에 대여섯 살로 보이는 여자아이가 건너편을 향해 사정없이 손을 흔든다.
손을 흔드는 모습이 필사 아주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반가운 누군가를 본 모양이다.
어찌나 계속 손을 흔드는지 ‘팔이 아프지 않을까?’ 싶을 정도이다.
누가 있길래 저 작은 아이가 저리도 손을 흔들까 싶어 고개를 돌렸다.
비슷한 또래의 남자아이다.
남자아이도 여자아이만큼은 아니지만 손을 흔들어 준다.
신호가 바뀌자 여자아이는 튀어나가듯 건널목을 가로지른다.
맞은편 남자아이와 엄마로 보이는 분이 건널목 중간쯤에서 여자아이를 마중해 다시 있던 자리로 돌아간다.
만나자마자 손을 잡고 들고 있던 사탕인지 젤리인지를 한 움큼 건넨다.
무슨 얘기를 하는지 아이들의 얼굴에 웃음이 한가득이다.
‘저 아이들은 A등급이네.’
문득 휴직 전 회사 직원들과 점심을 먹을 때가 떠올랐다.
인사고과 시기를 겪어 본 사람들은 모두 알겠지만
평가기간도 분위기가 애매하지만 평가 결과가 공개된 후에는 확실히 화기애애한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다.
이 시기 어느 점심시간이었다.
이 날은 특히 우리 팀만 점심을 먹은 것이 아니라 과장님까지 동승한 자리여서 평소보다 더 불편했다.
뛰어난 팀워크도 대화를 리드할 누군가도 없다면
적당히 업무 얘기를 하다 까도 되는 사생활을 살짝 얹어 음식이 나오기 전,
그 적막하고 애매한 분위기를 견뎌내야 한다.
그래서 메뉴 선택이 중요하다.
대기시간이 생기지 않게 미리 주문을 해놓던가
그것이 여의치 않다면 대기시간이 10분을 넘겨서는 안 된다.
이 날 점심메뉴는 솥밥 청국장이었다.
솥밥 덕분에 하는 수 없이 10여분을 기다려야 했고
주문한 메뉴가 나오기 전까지 우리의 공통 화제는 ‘성과평가결과’였다.
평가라는 것이 절대평가가 아닌 이상 잘 받은 사람이 있으면 못 받은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점심식사 자리에 함께 한 우리는 크게 나누자면
평가를 한 사람과 평가를 받은 사람이 있었고,
다시 세부적으로 평가를 잘 받은 사람과 잘 못 받은 사람이 있었다.
시기가 그러했기에 나온 화제였지만
어쨌거나 매우 민감한 화제였기에 나는 화제를 다른 것으로 돌렸다.
이 때도 기존의 화제와 맥락을 비슷하게 가져가야
분위기가 한결 자연스러워짐을 기억해야 한다.
아이 학교 학부모 총회 때 들은 특강으로 화제를 돌렸다.
“애 학교에 갔는데 요즘 총회 때는 자녀교육전문가가 와서 특강도 해주더라고요. 강사가 대뜸 “여러분과 여러분의 자녀는 무슨 등급이냐?”라고 묻더라고요. 손을 들어보라고. 나와 우리 아이 관계가 A등급이다? B등급이다? C등급니다? 어디에 손을 많이 들었을까요? 절반 이상이 A등급에 손을 들었고 C등급은 창피한지 사실인지 손을 든 사람이 거의 없더라고요.”라고 운을 띄우고는 이야기를 이어갔다.
강사는 여러분의 생각이 맞는지 확인할 확실한 방법이 있다며 알려주었다.
길을 가다 우연히 50m쯤 떨어져 아이와 마주쳤을 때 아이의 반응에 따라 나뉜다.
멀리서 엄마(아빠)를 발견한 아이가 손을 크게 흔들며 “엄마(아빠)~~~~~~”하고 달려오면 A등급,
가까이 다가올 때까지 기다렸다 눈인사 정도 하면 B등급,
분명 엄마나 아빠를 보았는데 다른 길로 돌아가면 C등급이란다.
물론 저학년일수록 엄마나 아빠를 부르며 달려올 확률이 높다고 한다.
현장에서는 모두들 크게 웃었다.
무척 직관적인 평가방법인 것 같았다.
비단 부모 자녀관계뿐만 아니라 나와 타인의 관계가 A인지 B인지 C인지 확실히 알 수 있지 않겠는가.
내가 이 이야기를 마쳤을 때 나는 느꼈다.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겉으로 크게 웃었지만 속으로는 겸연쩍었을 것을.
“나중에 한번 해보세요. 저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나 궁금할 때.”라는 말이 끝나자
주문한 청국장과 솥밥이 나왔다. 속도를 맞춰가며 밥을 먹는다.
먹는 동안 침묵은 조금 덜 불편하다.
아무리 천천히 먹어도 대략 30~40분이면 다 먹는다.
사무실까지 가는 시간을 감안하면
카페에 들어가 앉아 커피를 마시기에는 부족한 시간이다.
커피는 취향에 따라 주문해 테이크 아웃(take-out)으로 깔끔하게 마무리한다.
커피까지 마주 보고 앉아 마시기엔 나눌 이야기도 센스도 턱없이 부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