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조절할 수 있는 스트레스는 더 이상 스트레스가 아니다
휴직을 한 것은 자의 반, 타의 반이었다.
더 이상 이대로 나를 놔둘 수 없다는 생각에 억지로 쉬기로 했다.
아이 둘을 낳는 동안 단 한 번의 휴직도 없었다. 그저 90일 출산휴가만 쓰고 회사로 복귀했다.
일이 좋아서는 아니었다. 육아를 도와줄 조력자가 있었고, 나는 돈을 벌어야 했다.
잘 지냈다. 아이가 아플 때 빼고는 별로 힘들지 않았다.
우리 아이들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엄마는 일하는 사람이라고 당연히 생각했다.
겨우 1년 휴직하고 회사로 돌아갈 바에는 이런 시스템을 견고히 하는 것이 훨씬 낫다고 판단했다.
그렇다고 일을 하면서 마냥 즐거웠겠는가? 사람이 미웠던 적이 한두 번이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견뎌냈다. 견딜 만했기 때문이다.
그런 크고 작은 스트레스가 미움이 원망이 서러움이 쌓여 결국 마음에 병이 생겼다.
비단 한 사람 때문만이 아니다.
그 사람은 나의 임계점이 다닿랐을 때 폭발을 촉발시킨 하나의 돌 뿌리였을 뿐이다.
이왕 쉬는 것 쉴 수 있는 기간을 다 쉬자 결심했다.
나에게 주는 선물이었다.
다행히 둘째가 어려 육아휴직을 할 수 있었다.
나는 육아휴직 최장 3년을 다 쉬기로 했다.
휴직을 하면 해야 할 리스트가 어마어마했다. 나의 방점은 ‘자기 계발’이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휴직을 하자마자 코로나가 닥쳤고 나는 정말 ‘육아 휴직’을 했다.
하루 종일 두 아이와 부대꼈다.
그러면서 틈틈이 아니 어쩌면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자기 계발’을 했다.
책을 읽고 강의를 듣고 독서모임에 나가고 운동을 하고, 일하느라 할 수 없었던 ‘호사’를 누렸다.
이렇게 매일 아무 일정도 없이 내가 하고 싶은 것만 해도 될까 싶은 날이 이어졌다.
아이들과 하루 종일 지내는 것도 익숙해졌다. 육아를 하면서 오는 스트레스는 별로 없다.
살림을 하면서 오는 스트레스는 전혀 없다.
자기 계발을 하면서 오는 스트레스가 좀 많다.
일 년 후면 다시 일하는 엄마로 돌아가야 한다.
3년은 길어 보였는데, 어느새 돌아갈 생각을 해야 하는 날이 다가왔다.
여름휴가만 다녀와도 어색한데, 3년을 쉬고 돌아가면 많이 낯설지 않을까 염려된다.
남편이 묻는다. “당신을 보면 가만히 있질 못하는 것 같아. 스트레스 안 받아?”
가만히 있지 못하는 것은 인정, 그러나 지금 나에게 스트레스는 없다.
스트레스는 정신, 신체적 자극을 일으키는 심리, 신체적 반응으로서의 적응을 뜻한다.
스트레스 요인이야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것이 심리, 신체적으로 잘 적응할 수 있다면
더 이상 스트레스가 아닌 것이다.
내가 힘들었던 것은 회사에서의 스트레스, 업무이든 사람이든 그것을 내 의지대로 조절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만 지금 내가 받는 건강한 스트레스는 내가 조절할 수 있는 수준이다.
내 의지대로 조절할 수 있는 그 모든 자극은 나를 발전시킬 수 있는 원동력이 될 뿐이다.
그러니 나는 지금 스트레스받아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