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슬슬하게 부는 바람에 봄인지 가을인지, 아니면 세상에 없던 계절의 탄생인지 나를 종잡을 수 없게 만든다. 오래 전 만났던 한 친구 또한 나에게 그랬으리라. 장정일이 짓고 장선우 감독이 만든 '너에게 나를 보낸다'의 여자처럼, A는 나에게 왔다. 그 치가 나에게 보낸 마음이 사랑이었는지는 아직 알 수 없는 시기를 지나 우리는 손을 맞잡고 있었다. 우리는 시시때때의 관계였다. 나는 본래 자신만만하고 자존감에 발기된 존재라 생각했지만 웬걸 내 풀을 꺾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태어나 처음 알게 된 순간도 그 때 즈음이었으리라. 제멋대로 나를 가지고 놀다 마지막에는 뺨을 때리듯 나를 밀쳐내고 내 심방심실에 자상을 낸 그는 풍문에 의하면 그 이후로 또 다른 남자에게 그런 상처를 줬다. 내가 '또 다른 사람'이 아니라 '또 다른 남자'라고 짚어 말한 이유는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남자' 앞의 수식어만 계속 바꾸기를 원하는 요부적 본능 때문이었다. 씨발년. 똑똑하고 유능했던 사람들이 퍽퍽, 쓰러졌다. 남자들은 볼 품 없었다. 하나의 전유물이었고 '피규어 심벌'이었다. 충분한 매력을 얻고 생각했냐고, 결코 그것도 아니었을테다. 내 이후에 그녀의 근현대사를 밟은 녀석들을 보면 특출난 것들이 없었으니까.
확실한 것은 A는 결코 쓰레기로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무서울 정도로 여러가지 방법을 사용해가며 자신을 정당화시켰다. 실체를 보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에 의해 그녀는 좋은대학, 성실하고 집안좋으며 고상하되 겸손한 막내딸로 포장되었다. 폭발할만한 것은 소수였고 그녀 입장에서는 그들의 사회적 거세를 시켜버리면 그만일 일들이었을테고 그 또한 그녀의 일이 아닌 수많은 대중들의 일이었기에 그녀의 죄의식은 수렴항 제로로 가는 무한급수처럼 단계지어졌다.
오랜 시간이 지나고서, 멀리서 그 '지옥'을 봤을때야 나는 알게 되었다. 결국은, 서로의 가치는 무너졌고 '욕구되어진 관계' 속에서 얻을 것이라곤 더 사랑했던 사람의 피폐뿐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3.
너는 나를 무릎 꿇리려 했지, 내 무릎을 잘라 버리려 했다. 내가 기어다느닌 꼴을 보고 싶었을까, 네가 했던 말들이 하나씩 다가올 때마다 나는 처음에 바늘을 느끼고 다음엔 압정, 그리고 못질을 느꼈다. 나는 절박했다. 용서를 빌기를 원하지 않더라도, 적어도 화해의 눈초리라도 보냈었더라면 나는 키보드를 부수지 않았을 것이다. 내 인생에서 너를 찢진 않았을 것이다. 나를 아는 사람들은 궁금했다. 그토록 단단한 사람이 꺾이기까지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하염없는 궁금증만 되풀이했지, 결코 답을 내리거나 단정할 수도 없었다. 절대적으로 투명해진 네가, 몽유병 환자처럼 나를 몇달간 부유케 하리라 누가 생각했을까. 유럽을 떠도는 맑스의 유령보다 강력한 환영에 씌여 어떤 사리분별도 없이 창창한 이십대 청년의 날들을 잠식시켜버릴 것이라 누가 생각했을까.
5.
많은 시간이 지났다. 인생에 상처없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파리채를 들어보지 않은 사람 또한 없을 것이다. 지겨운 인생은, 그러나 죽지 못해 사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음을 담보하기도 한다. 어떤 처참한 인생조차도 죽음보다는 삶을 선택하곤 하니까 말이다. 그래서 인생은 인사死가 아니라 인생生이기도 하며, 어디서든 제 잘난 다리를 문지르는 파리보다 솔직하다.
1.
해가 지는 시간이 다가올 때면, 나의 심장은 언제나 다시 문을 닫는다. 보통 이 시간대라면 감상의 문이 나를 세차게 흔들었겠지만 억지로 빗장을 굳게 질러놓고선 시위를 하는 중이다. 내가 좋고 네가 좋아야 너의 나도 좋고 너의 너 또한 좋을 것이다. 여기서 빠진 '너의 너'는, 굳이 말하면 오롯이 너의 문제다. 이기적 마음을 논하고자 하는 것이 결코 아니야. 굳이 그것을 이기라 칭한다면, 그래.나 이기적이다. 앞으로의 연애관계는 둘 중 하나다. 이기적이거나 조금만 이기적이거나. 울만큼 울었다. 깨질만큼 깨졌고, 왠지 모르지만 빡셌다. 그냥, 드라마 속의 연애는 나에게 0%인 것으로. 가장 주의해야 할 것은, 나에게 가까웁게 지내는 사람들 중에서 '나를 보세요. 이렇게 예쁘고 괜찮아요. 나를 사랑해주세요.'와 '당신을 사랑해요. 사랑해요. 우리, 우리의 사랑을 해요.'를 잘 구분하는 눈을 가질 것. 전자일 경우, 스무살 꼬마 아이들을 만났겠지, 왜 굳이 힘든 연애를 했었겠는가. 나의 마음은 언제나 후자였다. 부드러운 카스테라도 물론 좋지만 나는 잡곡밥에 간이 덜 된 우거짓국같은 밥상 차림을 먹고 싶다. 사람의 욕심은 왜 언제나 다다익선을 말하는가.
씨발, 연애가 많다고 좋은 것은 결코 아니다. 상처가 늘고 사람을 믿지 못하고 가시적 기대감이라는 것들이 침몰하는 것에서부터 나는 '연애의 나'를 상실시켜 간다. 만나는 사람들이 왜 나와 닮지 않았던가. 나는 적절한 거리를 가지거나 적당한 모습을 보여주거나 그저 좋게만 사랑스러운 표정을 뱉지 못했던가.
4.
어떤 순간들도 소멸하기 위해 존재하지는 않는다. 순간은 순간을 위해서 존재한다. 만약 당신이 어떤 류의 게임, 러시안 룰렛처럼 결국에는 끝나고 말아버리는 놀이에 참여했다고 생각하자. 하나의 턴이 넘어가는 동안 당신이 '아, 어서 죽음의 순간이 어느 임의에게라도 발사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 않듯이, 결국 순간들의 정의는 각자 개개인에게만 분리되어 서 있다. 우리는 이것을 이기적이다 말하지 않는다.
추신, 이 글은 제 노트와 블로그 등에 먼저 작성 및 게재됐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