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은 인공와우 오른쪽은 보청기를 착용하는 나는, 집에 오면 보청기는 바로 빼고 와우로만 생활을 한다. 귓구멍을 꽈악 막고 있는 보청기가 여간 답답한 것이 아니다.
특히 더운 한여름에는 보청기를 빼면 귓속이 얼마나 시원한지 모른다. 24시간 중에 평균 10시간은 매일 착용하다 보니 보청기와 귓속 냄새도 고역이다.
(보청기 냄새 제거 팁은 지난 15번 스토리 참고)
집이 아닌 공간에서 인공와우에 보청기를 필히 착용하는 이유는 소리의 질이 완전히 달라진다. 보통 집에서 와우만 착용하고 있을 때는 보청기 유무를 인지하지 못할 때가 많아서 인공와우만 하고 외출할 때가 있는데, 아파트를 벗어나면 바로 소리의 이질감을 느끼게 된다. 이상하다 싶어서 오른쪽 귀를 만져보면 보청기가 없는 경우가 다반사.
보청기는 좀 더 자연 그대로의 소리를 들을 수 있게 해 준다.
예를 들어 인공와우로만 들을 때는 소리가 미세한 진동을 타는 듯한 울림+다듬어지지 않은 거칠음이 느껴진다. 나무판자에 사포질을 10번 해야 매끈매끈 해진다면 사포질을 7~8회만 한 느낌? 보청기를 착용하면 자연 그대로의 원음이 들어오면서 기계로 들어오는 소리들을 중화시켜 줘 울림이 덜하고 사포질이 더 잘 된 매끄러운 느낌이 든다.
7~8회만 된 사포질을 8~9회까지 완료한 느낌이랄까?
7~8회와 8~9회는 되게 미세한 차이인 거 같지만 밖에서는 그 차이가 꽤 크게 다가온다.
익숙한 환경, 익숙한 소음만 있는 집에서는 인공와우만으로도 충분히 커버가 가능하고 긴장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보청기의 보조가 꼭 필요하지는 않다.
그렇다 보니 집에서는 와우로만 소리를 듣고, 와우까지 빼면 그야말로 소리가 블랙아웃 상황이다. 내가 집에서 와우를 착용하지 않는 순간은 딱 두 가지 상황이다.
첫 번째. 샤워할 때
두 번째. 취침할 때
샤워할 때 와우를 뺀 후 머리를 다 말린 후에 와우를 착용한다. 평균 40분 내외로 블랙아웃 순간이다. 이때 우리 집 아이들은 와우를 하지 않은 엄마를 부르기 위한 두 가지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1. 내가 있는 장소의 스위치를 껐다 켰다 한다. (거실에 있는 불이 켜졌다 꺼졌다 반복돼서 뒤돌아보면 셋 중에 한 명이 서서 웃고 있다.)
2. 근처에 있는 무언가를 엄마 옆으로 던진다. (물론 위험한 물건은 아니고 보통 물티슈를 뭉쳐서 던지거나, 쿵 소리를 낸다.)
아주 깜찍하지 않은가? 처음 아이들이 이런 행동을 할 때는 너무 어이없이 귀여워서 웃음이 났다.
다섯 식구 중에 취침 시간이 가장 빠른 나는 늦어도 10시에는 침대에 눕는다.
매일 밤 나는 취침 시간이 다가오면 가족들에게 공지한다.
나: 이제 자러 갑니다~ 와우 뺄 거예요~!
그러고는 가족들 한 명 한 명과 눈 마주침을 한다. 그러면 다들 나에게 손가락으로 오케이 사인을 보내준다.
그것은 엄마의 블랙아웃 상황을 인지하고 할 말이 있을 때는 엄마에게 직접 가야 한다는 암묵적인 사인인 것이다.
가끔 내가 와우 착용한 것을 모르고 블랙아웃 상황으로 인지한 아이들은 목소리를 내지 않고 천천히 크게 입 모양으로 말을 한다. "엄- 마- 오- 늘- 학- 교- 에- 서-"
"엄마 와우 했는데~~" 하면 "아~ 뭐야~ 쫑알쫑알" 원래의 대화 패턴으로 돌아온다.
인공와우 수술을 한 왼쪽 귀는 들리는 소리가 없다. 언젠가 한 번 막내딸이 왼쪽 귀에 대고 소리를 지른 적이 있었는데(10살임에도 불구하고 막내라서 가끔 자기가 아기인 줄 안다. 가끔 투정 부린다고 내 옆에서 꽥-! 소리를 지를 때가 있다. 난감) 꽤 큰 소리였는지 귓속에 통증이 느껴졌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큰 소리에 상응하는 통증이 느껴진걸 보니 어떠한 청각세포는 살아있나 보다.
보청기를 착용하는 오른쪽 귀는 데시벨 86으로 아직 잔청이 조금 남아있다. (인공와우를 한 왼쪽 귀는 83 데시벨이다. 청력이 조금 더 좋은 쪽에 수술을 해야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 한다.) 그래서 귀에 대고 이야기를 하면 목소리가 들리고 어렵지 않은 말은 거의 알아들을 수가 있다. (느낌으로 때려 맞추는 게 80% ㅋㅋ)
잔청이 남아있는 오른쪽 맨 귀로 아이의 목소리를 듣는 것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행위 중 하나이다. 맨 귀로 듣는 아이의 목소리는 보청기를 통해서 듣는 소리, 와우를 통해서 듣는 소리와 확연하게 다르다.
그래서 아이에게 잔청이 있는 오른쪽 귀에 대고 쫑알쫑알해달라고 가끔씩 부탁한다. 눈을 감고 아이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마음이 따듯해진다. 눈을 감고 아이의 살아있는 부드러운 음성을 듣고 있으면 행복해진다.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은 음색이다. 인공와우와 보청기를 통하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목소리가 귀로 들어와 온몸 구석구석으로 흐르는 느낌이다. 아이의 사랑스럽고 나지막한 목소리가 내 온몸을 훑고 심장에 쏙 들어올 때의 그 느낌과 감정을 표현할 단어를 못 찾겠다.
'맨 귀로 듣는 이 목소리도 우리 아이 목소리, 와우를 통해서 듣는 이 목소리도 우리 아이 목소리인데 다르구나.'
아마 와우를 하기 전의 나라면, 이 목소리마저 언젠가 못 들을까 봐 울컥했을지도 모르겠다.
지금의 나는 그 목소리가 그저 힐링이다. 귓속에도 USB가 있어서 언제든 꺼내 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