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좋아지자 나는 바라는 게 많아졌다.
나는 요즘 하루에도 몇 번씩 남편의 바지 주머니에 있는 잔돈과 잠바 주머니에 있는 지갑을 가지고 집을 나선다. 술에 취한 남편이 술이 덜 깬 상태에서 다시 술을 사러 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눈에 보이는 돈, 카드를 모두 가지고 집에서 나온다.
처음 이 행동을 했을 때에는 그 모습이 너무 보기 싫어 거의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손을 덜덜 떨며 한 시라도 더 빠르게 그 자리를 떠나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효과가 좋았다. 남편은 정신이 없는 상태이니 기억도 못했고 시간이 많이 지난 상태에서 집에 들어가면 남편은 그 사이 술이 깨어 다시 멀쩡한 모습으로 앉아있었다. 자신의 지갑과 돈이 없어져서 찾았던 기억조차 없는 멀쩡한 남편이 되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어디 갔다 와?" 하면 나는 "그냥 밖에"라고 말하고 지갑과 돈을 제자리에 넣어 놓았다.
왜 가지고 갔냐 어쨌냐 소리 없이 상황 종료가 되니 이 방법이 너무 효과가 좋다는 생각밖에 미안함도 거리낌도 없었다. 이제는 여유를 부리며 차근차근 남편의 술 살 돈을 챙겨서 집을 나온다. 그리고 "시간아 빨리 가라"라고 하며 산책로를 걷고, 친정에 가서 시간을 때우고, 교회로 가서 기도하며 앉아있는다.
남편은 자기도 술에 취해 있는 것이 싫다고 한다. 그런데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말을 한다.
나는 지금도 남편의 돈과 지갑을 다 가지고 어디론가 나가 있고 싶다는 유혹을 이기며 이 글을 쓴다.
남편의 상태가 조금씩 좋아지면서 견뎌내야 하는 순간들이 더 많아지고 있다.
좋아지니 더 바라게 되고 더 바라게 되니 실망도 커지는 것 같다.
전에는 바라지 않던 것을 기대하게 된다.
위의 글을 쓴 날 이후 하루를 더 쉬며 술, 잠, 술, 잠으로 보낸 남편!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남편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왔다.
자고 일어나니 멀쩡해진 남편이 또다시 막걸리를 마셨고 다시 정신이 혼미해지는 듯했다.
"여보 나는 여보가 하루에 10분이라도 깨어있는 시간에 술 없이 생활하는 것을 보고 싶어요"
"그래? 그래 그럼 나가자"
정신없이 한 말이었지만 난 희망의 끈을 붙잡은 듯이 그 말을 붙잡았고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조차 못하는 남편을 얼르고 달래 가며 옷을 입히고 밖으로 나갔다.
남편 손을 잡고 가는 길에 지나가는 사람들이 나를 안 됐다는 듯이 쳐다보는 시선을 느꼈지만 전혀 아무렇지 않았다. 그런 시선 따위...
남편은 배가 남산만 하다. 바지를 배에 맞춰 사면 바지가 줄줄 흘러내려오고 이내 발목까지 주르륵 내려갈 모양새다. 며칠 전 인스타그램에서 본 '조절하게'라는 제품을 구입해서 남편 바지에 채웠다.
바지가 그래도 자꾸 흘러내려가려고 하는지 남편은 가다 멈춰 바지를 추켜올렸다.
하는 수 없이 남편의 허리채를 잡고 걸었다. 손목이 아팠지만 그 정도쯤이야...
"5m만 갔다 올 거야"라고 장난처럼 말하는 남편을 끌고 가다시피 하며 겨우겨우 집 앞 청계천 산책로로 향하는 지하철역으로 들어섰다.
"지금 우리 어디 가는 거야?"
남편이 큰 소리로 말하며 나에게 끌려가는 것을 보는 지나가는 사람들!
남편이 걸으며 "에고고 에고고"라고 하자 앞에 걸어가던 여자가 뒤를 힐끗 보려 하다가 멈췄다.
"쉿! 여보 여보 목소리가 너무 커서 쳐다보잖아요"
"에이 누가 쳐다보는데? 내가 쳐다보라 했어? 누군데?"
남편이 더 큰소리로 쩌렁쩌렁하게 말했고 지하철역으로 향하는 그 공간에 남편의 흐느적거리는 걸음걸이와 술에 덜 깬 듯한 말소리가 가득 찼다.
겨우 겨우 어두운 터널을 지나 밝은 빛이 보이는 산책로 앞까지 갔을 때!
"어어 그러는 거 아냐! 저기 저기까지만 가면 이제 집에 가야 해"
남편이 딱 어두움과 빛의 경계선을 가리키며 말했다.
산책로는 두 갈래로 나뉘어있다. 한 갈래는 그냥 걸어가면 산책로이고, 한 갈래는 다리를 건너가야 산책로, 자전거 도로가 있다. 남편과 나는 다리 위에서 꼼짝을 안 하고 다리 밑에 흐르는 청계천 강물을 보고 있었다.
히뿌연 물아래에 팔뚝만 한 잉어들이 헤엄치고 있었는데 처음에는 한 마리도 눈에 들어오지 않더니 한 마리를 발견하니 다른 잉어들이 계속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강물을 쳐다보고 있는 우리 둘을 지나가던 사람들이 또 힐끗힐끗 쳐다보았고 어떤 노부부는 우리처럼 다리 밑을 쳐다보다가 '도대체 뭘 보고 있는 거야?'라고 말하는 것처럼 우리를 한 번 보고 가던 길을 갔다.
"히히 사람들이 우리 되게 이상하게 생각하겠다" 남편이 좋아하며 다리 난간에 팔을 괴고 흐르는 물을 쳐다보았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햇살이 남편의 얼굴에 닿는 것 같아 보였다.
집으로 가기로 하고 흙탕물 쳐다보기를 마치고 왔던 길을 다시 가려고 하는데 남편은 어디 앉을 곳을 찾기 시작했다. "여보 집에 가야죠" 하며 남편을 출입구 쪽으로 끌다시피 하며 가니 남편이 "놔봐 담배 한 대 피우고"라고 하며 귀퉁이에 있는 볏짚이 덮어져 있는 화단 쪽으로 갔다. 그리고 거기에 걸터앉아 담배에 불을 붙였다. 나는 조금 떨어져 저 사람은 나하고 상관없는 사람이라는 듯이 먼 허공을 쳐다보다가 남편을 보니 앉은 채로 잠이 들어 담배는 손에서 곧 떨어질 것만 같았다. 이러다가는 볏짚에 불이 붙을 수도 있겠다 싶어 곧장 남편에게로 가서 흔들어 깨웠다. 어찌어찌 담배는 껐지만 남편은 그 자리에서 꿈쩍을 하지 않으려고 하며 눈을 감았다.
남편을 흔들어 깨우고 엉덩이가 껴서 일어나기 힘들어하는 남편을 부축해 그 화단을 벗어나 다시 부축하다시피 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에이고 왜 사냐 인간아! 와이프 고생이나 시키고 왜 사냐"
남편이 옷을 벗으며 혼자 자신에게 하는 말을 들었다.
남편이 좋아지며 나도 남편도 서로에게 바라는 것이 생겼다.
나는 남편이 조금 더 깨어있기를 바라고
남편은 내가 자신을 조금 더 존중해 주기를 바란다.
바지를 벗다 말고 "여보 나 이거 좀 벗겨줘"라고 하며 의자에 앉은 채 눈을 감은 남편!
전에는 어림도 없는 말이었는데 이젠 된다고 생각했는지...
나도 남편의 말을 들어주고 있다.
남편에게 다가가 양말을 벗기려고 하자 양말을 벗기고 있는 와이프에게 미안했는지
"어? 어? 그건 아닌데? 바지인데?"
"그래요! 바지를 벗으려니까 양말도 벗어야죠"
'오늘은 일을 하러 나가겠지?' 하며 남편이 잠이 들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좀 더 많이 자고 일어나기를
자다 깨도 다시 술을 마시지 않기를 바라며 지금 이 글을 쓴다.
사실 지금 까지 연재한 글들은 모두 오래전에 써 놓은 글들이다.
남편의 상황이 많이 좋아지면 언젠가는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게 해 주겠다고 했던 글들!
이제 써 놓은 글들이 모두 연재되고 나면 요즘의 남편의 모습을 쓸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오늘도 독자와의 약속을 지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