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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모쌤 손정화 Jun 21. 2024

안 그런 척해야 살아지는 세상

절망을 감사로!

남편은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술을 좋아하고, 좋아하고, 또 좋아하는 사람!

얼마나 좋아하면 자신의 목숨이 달려있는 문제 앞에서도 술을 선택할까!

그렇게 생각했을 때가 있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남편은 술을 좋아한 것이 아니라 술이 필요했던 거다!

필요해서 찾고, 찾고, 또 찾다 보니 마치 우리가 외출할 때 핸드폰을 놓고 나오면 다시 들어가 가져오듯이

남편은 자신의 삶에서 자취를 감추려고 하는 술을 가끔 찾아들고 온다.

정확히 말하면 술이 아니다!

술을 찾는 마음을 살며시 다시 제자리로 데리고 온다!


간암 판정을 받고 남편은 술을 마시고 싶을 때마다 무알콜 맥주를 마셨다.

술이 필요했던 자리를 다른 것으로 바꿀 수 있다는 희망만으로도 딸과 나는 안도의 숨을 쉬었다.

하지만 남편은 여전히 안 들고 나온 핸드폰을 하루 종일 생각하듯 술을 마실 수 있는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남편에겐 경제권이 없다.

돈이 수중에 있으면 무조건 다시 찾을 술이 무서워 남편에게 돈을 허락하지 않았다.

다 큰 성인이 단 돈 1000원도 없이 몇 달을 생활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생활력을 기르는 것보다 힘든 일이다.

나는 가끔 남편이 불쌍하고 불쌍하고, 또 불쌍하다.

나라는 감옥에 갇혀! 나라는 병원에 감금되어 병을 고치고 있는! 아니 병과 싸우고 있는 남편이 대견하면서도 안쓰럽고 서럽도록 불쌍하다.


수중에 단 돈 천 원이 없다가 피치 못할 사정으로 돈이 생기면 남편이 잘 견뎌주고, 잘 절제해 주기를 바라며, 믿으며 지켜봐 줘야 한다.

응원해야 한다.

'제발 이겨줘 여보!'


꼼짝도 안 하고 있던 남편이 새삼스럽게 안 하던 행동을 할 때 나는 알았다. 남편이 지금 막걸리를 마시려고 밖으로 나간다는 것을!

"쓰레기나 버리고 와야겠다!"

"화분에 물 좀 주고 와야겠다!"

"학교 운동장 한 바퀴 돌고 와야겠다!"


그렇게 안 하던 행동을 한다고 말하며 누가 봐도 '나 지금 술 마시러 가!'를 외치며 남편은 수중에 있는 돈을 쓰러 나간다.

얼마 되지 않는 돈이지만 남편에겐 오아시스 같은 금액이다.

우리 동네 우리 집 앞 편의점에서는 장수막걸리 한 병이 1200원!

유난히 막걸리 값이 싸 동네의 남편 같은 사람들이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만원만 있어도 막걸리를 8병이나 마실 수 있는 금액이니 남편에게 만원은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은 금액이다.


남편이 들어왔을 때 "아니 여보 지금 술 마시고 온 거예요?"라고 말하고 싶지만 안 그런 척해야 한다.

아니 안 그런 척하기로 했다.

남편 나름대로 노력하는 모습이 안쓰럽기도 하고! 들키지 않았다고 생각하는데 굳이 '나 안 속았거든!' 할 좋은 이유를 찾지 못했다.

대놓고 사 와서 내 눈앞에서 마시지 않는 것을 감사하고!

그래도 스스로 절제하며 나가서 마시고 오는 것도 칭찬해주고 싶다.

내가 없을 때에는 어떻게 하든 내가 있을 때에는 아닌 척하는 것이 고맙기도 하다.


정신병동에 입원을 시켜도 고치기 힘든 병!

그 병을 남편은 이렇게 이겨내고 있다고 생각하고 싶다.

허나 남편의 간이 얼마나 생명력을 가지고 버텨줄는지...

의사가 말했었다. 암이 아니어도 술을 지금처럼 마시면 여명 2년이라고!


이번주에 어디에서 생겼는지 모를 돈이 남편수중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번엔 액수가 크다.

10만 원!

이 돈 다 쓰면 내 남편 하늘나라 가는 거 아닐까?

퇴근 후 본 남편의 초췌한 얼굴에 갑자기 너무 걱정이 돼 엉엉 울었다.

죽음은 포기라고 생각한다.

내가 포기하고! 가족이 포기하고!


포기하고 싶지 않아 안 그런 척하며 산다.

술로 만신창이인 남편에게 당신이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누구나 그럴 수 있는데 그걸 몰라서 내가 당신을 문제로 본 것이 문제였다고 하며 토닥였다.

남편이 스스로 나는 문제가 아니라고 하며 그 구렁텅이에서 조금씩 올라오는 것을 봤다.

이번에도 안 그런 척하며 모르는척하며 남편을 본다.

액수가 너무 커 마음이 아프다!

간이 버텨줘야 할 텐데...

우리 남편 스스로 알아서 잘할 때까지!

남은 수명 동안 좋아하는 술 무서워하지 않으며 필요할 때만 부를 수 있게!


이번 시티 검사 결과 암세포가 모두 사라졌다는 놀라운 소식을 접했다.

그치만 아무래도 이번 금액은 너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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