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포레스임 Jan 08. 2024

가속성에 따른 가변성의 시대

효율과 속도가 만능인 사회



 인간은 합리적인 이유를 갈구한다. 어떤 현상이든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믿음은 사람들을 공허하게 만든다. 중국인들은 실생활에 자연스럽게 노장사상을 품고 산다. 정의도 도덕도 이유도 없이 神은 인간을 짚으로 엮은 개처럼 놔둘 뿐이다라는 현실을 오랜 믿음으로 체화시켰다. 수많은 인구의 나라인 만큼, 많은 사상을 자기들의 생활에 대입해 봤을 것이다. 종국에는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의 삶을 정의한 노장사상이 가장 맞아떨어진다고 스스로의 삶을 나름의 규정을 한 것이란 생각이다.


 나는 386세대다. 고색창연한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현상을 좀 더 확연히 누군가에게 듣고 싶을 뿐이다. 하지만 그것조차도 오판일 수 있다. 지금은 서사(敍事)의 시대가 물어가는 시기이다. 누군가에게 귀를 기울여 어떤 신념을 갖는다는 것은 지극히 위험한 발상이다. 모든 것은 참고적일 뿐이다. 결국 인간은 아무리 애를 써도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를 완전히 알 수 없다. 모든 일을 완전히 해낼 수도 없으며, 결국은 허망함을 느끼며 종말을 맞을 뿐이다. 그렇다고 까뮈에 머물러 부조리한 세상을 원망하고 싶지는 않다. 귀를 열고, 눈을 부릅떠 환상 속의 어렴풋한 현실을 선명하게 목도하고 싶을 뿐이다.


 언제부터인지 속도가 모든 것의 척도가 되어버린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디지털이란 미명하에 개인이나 집단 모두는 속도경쟁을 하고 있다. 일을 잘한다는 기준은 검색을 통한 자료의 제출이 누가 가장 빠른가를 말함이다. 요즘은 AI가 詩나 에세이 그리고 실용문까지 거침없는 속도로 내놓는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생각을 하는 인간이란 존재는 속도면에선 상대가 되지 않는다. 쳇 GPT는 인간이 그동안 축적해 놓은 수많은 글 속에 모든 해답이 있다는 가정을 한다. 더 이상의 새로운 생각은 없다는 가정을 전제로 한다. 우스운 것은 스스로를 묶어버리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는다.


 속도가 모든 것의 달란트가 된 세상은 가변성 또한 붙은 모양새다. 무엇이든 변하고 있다. 가치관, 상식, 관습마저도 변해가고 있다. 이전의 황금률은 아무런 힘을 못쓰고 있다. 당연하다는 모든 전제는 의심의 눈초리를 피할 수없다.


 사람으로 태어나 성장을 하고 짝을 만나 새로운 생명을 키워 낸다는 자연의 섭리조차 배격되는 사회가 되어가고 있다. 전세계에서 디지털 세상을 선도하는 국가다운 발상이 난처할 뿐이다. 모든 세대를 아울러 보아도 현재의 젊은 세대는 이전 세대와 확연히 다르다. 그들은 스마트하게도 가장 빠른 정보를 접하며 활용하는 세대이다. 낡아빠진 가치관으로 훈계해 봤자 정보를 통한 논리로 무장한 그들을 넘어설 수 없다. 우리 사회는 자아도취 상태다.

 TV보도에 패널로 출연하는 대학 교수는 우리의 반도체기술에 자긍심이 넘쳐있었다. 일본은 이미 우리를 넘어설 수 없다고 흥분하는 어조로 말하고 있었다. 일제강점기동안 민족적 울분을 그렇게 비교하는 것이 이해도 된다. 구 대한제국이 속도경쟁에서 뒤처져 치욕적인 식민지배를 받았다는 교육은 내 어린 시절 화두처럼 귀에 박혀있다. 이후 한강의 기적등은 가속도가 붙어 기술전쟁이라 부를 만큼의 경제 중흥기를 지나 지금은 디지털 역사를 다시 써야 할 시기라고 한다. 과연 우리는 제대로 된 길을 찾아가는 것일까?

 

 내가 생각하기에도 디지털 사회 인프라가 속도경쟁을 하듯 너무 빠르게 우리 주변을 에워싸고 있다. 도로나 교량을 짓는 것과는 다르게 그것은 자본사회의 논리로 민간부문에서부터 변혁이 주도되었다. 돈이 되지 않거나, 비용이 많이 드는 부문은 여지없이 디지털화가 가속화되었다. 우리 사회에서는 비효율, 과비용은 용납이 되지 않는다. 대상이 사람일지라도 여지없이 숙청의 대상이 되곤 한다. 그 결과 인건비 없는 디지털화된 식당에는 키오스크가 자리 잡고, 무인점포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평생직장 개념은 어느 곳에서도 환영받지 못한다. 인력(人力)은 언제든 기계의 힘으로 대체될 수 있다. 점점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의 종류는 한정되어 다.



 아이를 낳고 키우는 환경과 문화가 우리 사회에서는 점차 단절된 느낌이다. 버스나 지하철 등 대중교통수단마다, 임신여성을 위한 별도의 좌석을 표시하여 출산을 장려한다고 한다. 제발..., 그런 이상한 정책은 그만했으면 한다. 누구의 생각 인지는 모르겠으나 겉발림식의 생색내기 정책인 것이 눈에 훤히 보이기 때문이다.

결혼도 출산도 안 하지만 여성 한 명이 평생 낳을 것으로 예상되는 출생아의 수가 0.6 출산율의 실체다. 저출산과 고령화 문제는 우리 사회의 화두로 등장했지만 정작 해법은 별로 없어 보인다.


 나부터도 서른이 넘은 딸아이가 있지만 결혼은 생각하지 않고 일에만 열중하는 모양새다. 요즘은 남녀 할 것 없이 자신의 분야에서 무언가 성취를 하고자 노력하는 사이, 나이는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주위의 같은 나이대들도 그리 급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한다. 확실히 386세대인 우리 때와는 확연히 다른 세대들이다.


 미몽을 헤매듯이 나는 아직도 변해선 안될 것들이 있다고 믿고 있다. 자연의 섭리가 그것이다. 한갓 미물인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 그것을 거스르는 족속은 생존에 위태롭다는 생각이 든다. 아날로그가 나쁜 것만은 아니다. 속도가 만능인 것도 아니다. 수많은 정보를 알아야 할 필요도 없다. 너무 앞서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주변을 돌아보지 않도록 만들었다. 그 결괏값은 우리가 미래에 치러야 할 셈이다. 우리만의 독특한 가치관이나 신념을 다시 세워야 사회가 존속할 수 있다고 믿는다. 우리는 집단생존의 문제에 직면하는 중이다. 편리함과 속도에 치중하는 동안 많은 것을 잃어버렸다. 당장의 나의 일이 아니기에 외면하고 방치하는 동안 환경은 바뀌어 간다. 그래도 살아가야 한다. 정체성은 지켜져야 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퇴근을 기다리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