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늦은 나이에 공부를 해야겠다는 자각이 인 것은, 아마도 내적인 갈등에 따른 새로운 경험과 젊은 날에 미처 돌보지 못한 지적욕구를 채우려 함이었다. 입학 전까지 많은 갈등이 있었다. 나이가 오십을 넘겼고 뭔가 새로 시작하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결국 젊은 날 하고팠던 학문에 대한 잔불씨는 나를 입학으로 이끌었다. OT때의 기억은 내 생각은 기우에 불과하다는 확신으로 다가왔다. 나보다 훨씬 연배가 되어 보이는 분들이 다수를 차지했다. 오십 초반의 내 나이는 오히려 전체 비율로 봤을 때, 중간에서 좀 젊은 축에 속하는 듯 보였다. 지나고 보니 '국어국문학과'의 특성일 수도 있었고, 여타의 몇몇 다른 학과들을 빼면 거의 대동소이하게 보였다.
국어국문학과는 나름의 특징이 있었다. 현역에서 활동하는 문인들이 다수가 동급생으로 포함되어 있었다. 주로 詩나 에세이 문인들이 주류를 이루어 학과 행사 때 많은 진풍경을 연출해 내었다. 나서기를 그렇게 좋아하는 성격은 아니지만 어쩌다 보니 학년대표를 맡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행사에 동원되어 이런저런 경험을 하게 되었다. MT를 강촌으로 갔었다. 학과 회장님은 다른 학과와는 다르게 근교가 아닌 강원도의 강촌이 MT의 최적지라고 우리를 몰아쳐 말로만 듣던 강촌으로 단합대회를 갔다.
칠순이 다되신 병우 형님과 나 그리고 문협의 문인인 영란 씨와 미용실을 운영하는 성미 씨, 사업을 하는이인 씨 등 다섯은 한차에 올라 각자 도착하는 방식이었다. 강촌에 도착하니 '강빛노을' 펜션은 널찍한 부대시설만큼이나 뒤로 보이는 북한강의 정취는 약간 흥분하기도 할 만큼 MT로는 최적지로 보였다. 이미 지나간 아련한 추억의 청춘은 이날만큼은 다시 재림한 듯 우리는 각자의 소개와 선배학년의 시낭송과 통기타 연주 등으로 한껏 들떠 있었다.
밤이 되자 캠프파이어의 불길이 타올랐고, 창(唱)으로 재능기부도 하는 선배의 가락에 흥취가 한껏 무르익었다. 앞으로의 학업에 대한 걱정과 기우도 한 줌 재가 되어 희망과 또 다른 도전의 시작이라는 기쁨으로 무엇이든 하겠다는 의지 또한 무르익어갔다. 다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듯이 나름의 문학론을 피력하기도 하고, 자작 에세이를 읽어주기도 하는 등 아쉬운 주황색 청춘들의 밤은 깊어만 갔다.
어쩌면 내 생에 있어서 가장 탁월했던 선택이었다고 생각한 순간이기도 했다. 직장인으로 생활하는 동안 잃어버린 꿈과 소망등이 새록새록 여린 잎으로 눈에 보였기 때문이다.
원래 하고팠던 학문이기에 국문학은 교재부터 정감이 갔다. 하지만 문학만을 생각한 학우들에게 실제 학업은 엄혹하게 다가왔다. 국어라는 뜻은 문법을 말한다. 국문학이란 말도 비평과 문학을 포함한 쉼 없는 글쓰기의 연속이었다. 아연실색한 학우는 중도 탈락하여 소리소문 없이 사라지고 있었다. 학업을 하며 직장에 누를 끼칠 순 없기에 퇴근 후 눈을 비비며 열람실에 앉아 있어야 했다.
학생회 일에도 나름 열성적으로 참여했다. 학년대표를 맡다 보니 이런저런 회의에 참석할 수밖에 없었고, 학교 시스템에 누구보다 감을 빨리 잡을 수 있었다. 사실 이런 부수적인 목적을 가지고 대표직을 수락하긴 했었다. 한 학기가 지나갈 무렵 학술제 행사가 있었다. 각 학과별로 여름방학 동안 행사가 있었는데 국문과는 전국의 지역대학과 연계해 강원도 횡성 리조트에서 1박으로 '학술제' 행사를 가졌다. 평소 볼 수 없던 학과 교수분들과의 미팅회의와 전국 학과 동급생들과의 대화는 나름 의미 있고 소중한 경험이었다.
다음날 근방의 이효석 문학관을 찾았다. 새로 단장한 문학관은 깔끔한 이미지와 이효석의 문학세계를 알리기에 좋은 장소이다.근처의 식당으로 점심을 먹으러 갔다. 이상한 것은 2학년 선배들이 다른 식당으로 몰려갔다. 식사를 하는 도중에 나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2학년 상혁선배였다. 학생회 임원이었고 평소 나와 학우들의 공부를 위한 자료 등을 제공해 주어 믿고 따르는 중이었다. 티 내지 말고 옆의 식당으로 오라고 했다. 옆의 식당으로 옮겨가 2학년 선배들의 말을 경청했다. 요지는 내년도 학과회장 선출에 관한 건이었다.
내용을 파악하고서는 난감해졌다. 그동안 학과회장은 3학년이 도맡아 했었는데, 4학년으로 올라가는 부회장이 회장이 되겠다고 공식선언을 했다는 것이다. 그동안은 회장을 하겠다는 사람이 없어 지명으로 회장을 뽑아 추대하는 형식이었는데 투표를 통한 선출회장을 뽑겠다고 한다. 점점 골치 아픈 내용으로 전개되는 말을 듣자니 심란해졌다.연말에 투표를 하면 1학년이 키를 쥐게 되니 도와달라는 내용이었다. 잘못 대답하면 큰일이다 싶었다. 공감은 하는데 상황을 보고 말씀드리겠다고 하고선 식당을 나왔다. 나오니 3학년 부회장 선배는 나에게 무슨 말들을 하냐고 되묻는다. 학업에 대한 내용이라고 얼버무리고 내 자리로 돌아갔다.
한편으로는 쓴웃음이 나왔다. 나이 들어 들어온 온라인 대학에서 감투다툼을 하는 것이 못내 아쉽지만, 젊은 청춘들 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2학기가 되자 좀 더 심화된 내용의 학습을 하느라 힘겨웠다. 학교 가요제가 있었고, 정지용시인을 추모하는 옥천의 '지용제'등도 인솔을 하고 다녀와야 했다. 그러는 동안 2, 3학년 임원들의 갈등은 깊어만 갔다. 연말의 '국문인의 밤' 행사를 준비하면서 나름의 결심을 하였다.
어느 날 2학년 상혁선배는 자신이 운영하는 호텔의 연회장으로 우리 학년 임원들만 초빙을 하여 어쩔 수 없이 참석을 했다. 식사도중 상혁선배는 전에 나에게 했던 말을 되풀이하였다. 다들 당황해하면서 나를 쳐다보았다. 뭔가 한마디 해줘야 했다. 나는 아직 선출방법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으니 선배님들이 그것부터 협의하라고 말했다. 사실 선출에 대한 협의 중 불상사가 있었다. 2, 3학년 임원들 간에 서로 삿대질에 욕설이 난무하더니 명예훼손으로 경찰에 신고까지 들어간 상태였다.
나는 학생회를 탈퇴하겠다고 답했다. 많은 도움을 받은 것도 사실이지만 더 이상 이러한 내홍에 휩싸여 만학의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다들 놀라는 눈치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 입학 당시의 초심으로 돌아가고 싶었다.1년 동안 짧지만 강렬한 국문학과 학생회 임원으로의 활동은 MT때의 주황색 불꽃처럼 타오르다, 실망으로 사그라들었다. 지금도 간혹 생각나는 그때의 경험은 사람은 상황에 따라 낙조의 황혼에 다다를지라도 본성에 따라 행동하는 특성을 알게 해 주었다. 지금도 기억이 난다. '문학이 있는 작은 음악회'에서 통기타를 치던 포크가수인 학우의 '여울목'가사를 흥얼거리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