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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레스임 Aug 30. 2023

장인(丈人)

또 다른 아버지의 이름



 장인(丈人)이란 명칭은 나에게 또 다른 아버지의 이름이나 마찬가지다. 일찍이 돌아가신 아버지가 나에게 생명과 육신을 주셨다면 장인어른은 결혼 후, 흔들리는 나에게 중심을 잡아 살아가도록 해 주셨다. 장모님은 내가 아내와 처음 만난 날, 이태 전에 이미 돌아가셔서 얼굴도 못 뵈었다. 홀로 계시던 장인어른에 대한 기억만이 처가 쪽 기억의 전부다. 장인이란 호칭도 나에게는 낯설다. 돌아가시기 전까지 '아버님'이라 불렀으니, 누구보다 나에겐 애잔한 당신을 그냥 아버님이라 부르겠다.



일제강점기 어느 해, 경성 종로거리 기름집 둘째 아들로 신 아버님은 옛일을 회고하듯 말씀을 하실 때, 흡사 어린아이를 보는 것 같았다. 눈매는 팔순의 연세에도 초롱거리셨고, 약간은 다혈질의 급한 말투도 듣기 좋았다. 아내는 그런 유전적 형질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으로 생각된다. 나는 아버님을 십여 년 모시고 살았다. 아니 정확히는 내가 아버님의 부양을 받았다고 말하고 싶다. 아들인 처남이 없지는 않았으나, 여러 사정으로 여의치 않아 결국 우리 내외와 지내셨다.


아버님은 칠순이 넘도록 와이셔츠 봉제일을 다니셨다. 연배가 있으셔서 걱정도 되었지만, 워낙에 자기 관리가 철저하신 분이고, 그 연세가 되어도 성실성을 인정받아 영세하지만 찾는 업체가 많으니 운동삼아 다니신다고 하셨다. 호리호리한 체구에 잰걸음은 오히려 젊은 내가 따르기에 벅찰 때가 많았다.


6.25 사변 때 아버님은 징집되어 그 치열했다던 금화지구 전투에 참여하셨다. 포탄이 오가는 아비규환의 와중에 파편 한 조각이 아버님의 왼쪽이마에 상흔을 남겼다. 다행히 미군 야전병원에 입원이 되어 제거 수술을 받은 후, 무사히 전역을 했다고 들었다. 그 공로로 국가유공자 등급을 받고 매월 유공자 연금을 받을 수 있었다. 평소 담배는 조금 태셨으나 그마저도 끊으시고, 술은 보리밭에도 못 가시는 체질이라 그 연금을 오롯이 우리 딸아이를 위해 내놓으셨다.


아버님은 외손녀인 우리 딸아이를 누구보다 아끼셨다. 내가 결혼 후 직장을 그만두고 다른 직업을 모색하고 흔들릴 때, 아버님은 그 연세에도 기꺼이 고목처럼 기둥이 되어주셨다. 그런 결심을 한 것도 아버님이 계셔서 가능한 일이었다. 서울의 여대(女大) 부설 유치원은 어느 곳보다 비싼 학비로 유명했다. 아내는 친정아버지의 도움으로 거침없이 등록을 하였다. 만 삼 년여를 그곳에서 양질의 유아교육을 받은 것도 다 아버님 덕분이었다.


시간이 흘러 더 연로해진 아버님은 다니시던 봉제공장을 그만두시던 날, 나에게 한 말씀하셨다.


"출퇴근할 일이 없어졌으니, 이젠 뭘 할까 궁리 중일세!"


"연배도 있으신데,... 이젠 좀 쉬셔야죠!"


"쉰다는 건,.... 이미 쓸모가 없어졌다는 거야!... 뭔가 일이 생기겠지!"


그때 연세가 이미 일흔다섯이셨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그때의 아버님처럼만 살아가면 남자로서 원이 없겠단 생각이 들곤 한다. 때마침 나는 인천으로 직장이 잡혀 서울을 떠야 했다. 아버님은 한동안 처남과 지내시다가 결국 내려오셨다. 초등학교 4학년을 시작하는 딸아이가 문제였다. 나는 어쩔 수없이 전학을 생각했지만, 아내와 딸아이는 원치 않는 눈치였다. 그때 아버님은 당신이 통학시킬 테니 걱정 말라고 하셨다. 서울시청역까지 한 시간이 넘는 거리를 노인분이......, 아버님의 해맑은 얼굴을 뵙고 그러기로 하였다.


 덕수궁 근처의 딸아이 초등학교는 공립형 시범학교였다. 도심에 있었으나 영국의 써머힐 학제를 본떠 좀 더 자유로이 공부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해 주었다. 나도 그런 사정을 알기에 초등학교를 6번이나 전학했던 내경험에 비추어 딸아이만큼은 한곳에서 졸업시키고픈 욕심이 있었다. 아버님은 딸아이를 아내가 준비시키면 바로 역으로 가 노인우대 무료티켓을 받고, 딸아이와 서울시청행 전철에 오르셨다. 아이가 학교로 들어가면 바로 내려오셔서 아내가 차려주는 식사를 드시고 잠깐 동안의 휴식 후, 아이를 데리러 또 서울행 전철에 오르셨다.


그 일을 아버님은 아이가 초등학교를 졸업하는 해까지 기꺼이 해내셨다. 하루 두 번이나 왕복하는 서울행 전철칸에서 아버님은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의외로 당시의 아버님 얼굴에서 생기가 도셨다. 무언가 딸내외와 같이 살면서 도움이 되는 일을 해주신다는 생각과, 두 번의 서울행은 집에만 답답하게 계시는 것보단 나은 것 같았다. 딸아이는 외할아버지와 추억이 많을 것이다.


 한 번은 아이가 제엄마에게 일러바치길, 하교 후, 서울시청역 플랫폼에서 천마(天麻)를 가공한 건강식품을 거리홍보를 하는 걸 딸아이와 아버님이 지켜봤단다. 마이크를 잡은 약장수는 문제를 맞히는 사람에게 할인가격으로 모신 다나 하는 광고를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데........, 오직 아버님 만이 큰소리로 "천마!!"라고 외치니, 옳다구나 싶은 그들이 아버님의 신상명세를 파악 후, 두 박스의 짐을 안겨주어 들고 내려오셨다. 아내가 아버님께 싫은 소리를 해대니, 아버님은 슬그머니 다시 올라가서 취소하겠다고 하시곤, 천마박스를 돌려주고 오셨다고 한다. 그러니 그날은 세 번의 서울행을 다녀오신 셈이다. 그렇게 아버님은 순백색의 동심을 가진 분이셨다.


딸아이가 초등학교를 무사히 졸업하고 집 근처의 중학교를 배정받았다. 이제 아버님은 별로 할 일이 없으셨다. 집에서 아내의 잔일을 도우시거나 세탁기를 돌리는 일 등은 아버님의 몫이었다. 아이가 학교에서 우등상을 타거나 성적이 오르면 우리 내외보다 더 즐거워하셨다. 희미한 미소 속에 아버님은 쇠잔해지시는 것 같았다. 어느 날 아버님 방에서 뭔가 쿵하는 소리가 들려 내가 뛰어들어가니 화장실 변기에서 내려오시다 팔이......., 부러지셨다.


선명히 기억이 나는 건 아버님의 팔이 부러진 것이 눈으로 보일 정도였다. 놀라서 119를 부르고 병원을 가니 폐암이란 진단을 받았다. 이미 전이가 심해 팔의 뼈 부분까지 전이가 되어 부러진 것이란 설명에 아연실색했다. 당시의 내가 별다른 여축은 없었으나 아버님은 국가유공자였기에 협력병원에서의 진료나 수술은 모두 보훈예산에서 결제가 되었다. 당신의 마지막 고행을 나는 아무런 부담도 지지 않고 지켜보기만 하였다.


아내의 고행 또한 시작되었다. 서울의 보훈병원은 거리가 먼 것도 있지만, 간병인으로 딸인 아내는 기꺼이 아버님 곁을 지켰다. 두어 달 동안 수술과 가료를 했지만 고령의 아버님은 차도가 없었다.


병원의 의사와 아내는 모종의 대화를 통해 아버님을 집으로 모시기로 했다. 병원침구를 준비해 아버님을 누이니 휘둥그레하신 아버님의 안구가 못내 눈물겨웠다. 그날을 집에서 하룻밤도 못 주무시고 위급해지셨다. 인천의 협력병원으로 옮겨 중환자실에 또 입원을 하셨다. 보름동안의 중환자실 입원은 하루에 한 번 면회를 허용했다. 아버님의 얼굴에서 이전의 생기는 가뭇없이 사그라들었다. 


보름남짓의 중환자실에서 아버님은 생을 마감하셨다. 평생을 자식과 가정을 지탱하시는 것도 모자라 못난 사위 녀석인 나까지 세워주시곤, 두어 달의 병고 끝에 돌아가셨다. 하릴없이 장례를 치르고 대전의 현충원에 장모님과 합사해 드렸다.


돌이켜보면 나는 아버님께 또 다른 아린 손가락이었다. 딸내미인 아내가 못내 가여워 우리 곁을 지켜주신 또 다른 아버지란 생각이 떠나지 않는다. 나 또한 혈육은 딸아이 하나뿐이니, 당신의 애틋함이 가슴에 와닿는다.


이번 주말에 아버님의 묘비를 둘러봐야겠다. 아내가 좋아하는 노란색 해바라기 조화를 꽂아 두었는데, 색이 바랬을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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