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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레스임 Sep 12. 2023

석 씨 부인 간병기(石氏夫人看病記)

생활 밀착형 수기 - 간병 체험기



한가위가 가까워 달이 차오르니 좋은 날이 오는구려. 당신도 그렇게 예전의 좋은 모습으로 다시 내게 오시구려. 애끓는 나의 심정을 알아주오. 범부범녀로 만나 아이를 낳고 이날이 되도록 아무것도 해준 것 없는 못난 서방의 하소연이오. 문득 당신이 병석에 누우니 하릴없는 어둠이 내 어깨를 감싸 쥐고, 말없이 내려앉더이다.  그 많은 세월을 밖으로만 떠돌던 내가 사무치게 원망스럽소.  생일 한 번 변변히 챙겨주지 못한 회한이 밀려와 당신 곁에서 밤새 뒤척였소.  石 씨와 林 씨가 만나 주춧돌에 나무기둥을 세우듯, 당신이 나를 지탱하느라 그 지경이 된 줄도 모르는 나를 원망하시오. 그렇게 당신을 만나 남자로 일생을 허물없이 살아올 수 있었소. 내 정성이 당신께 닿아 가뭇없이 병고가 사라지면 당신이 좋아하는 빙수 한 그릇에 웃는 날이 왔으면 하오. 천지신명이시여, 이 사람을 나보다 사랑하나이다. 부디 외면 마시고 병마를 이기게 하소서.



 딸아이가 삼 년 여의 직장생활을 자존감을 갖고 근무를 하는 거 같았다. 여름휴가는 자기가 책임질 테니 제주도를 가자고 했다. 마침 태풍이 올라와 비행기 편이 어려워 나는 다음에 가자고 타일렀다. 조금 실망한 눈치 더니 가는 항공편이 있다며 출발하자고 해서 아내와 공항으로 갔다.


아내는 어린아이처럼 좋아했다. 철부지 딸아이가 어느덧 다 커서 부모에게 여행이란 선물까지 주니, 나 또한 비행기처럼 두둥실 떠가는 기분이었다. 특급호텔에서 4박 5일은 제주 성산읍 '빛의 벙커' 관람처럼 환상적이었다.


여행을 다녀오고 컨디션이 많이 안 좋아 보였다. 감기몸살로 생각했지만 상태가 심해 보였다. 병원에 가보자고 했지만 한사코 거부했다.


결혼 전 항공사 수입관리부에 근무하던 아내는 여행의 잔상을 병원으로 대체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결혼 전, 회사에서 나오는 직원용 마일리지로 외국여행께나 했던 아내가, 결혼 후, 변변한 여행 한번 없었으니 괜한 주눅이 들었다.


아내가 그렇게 많이 아픈 줄 몰랐다.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살자 해놓고 너무 무심했다. 한동안 식사를 거의 안 하는 눈치였다. 외식이라도 시켜주면 뜨는 둥 마는 둥 하였다. 그때 알아차려야 하는데 나는 그냥 입맛이 별로 없다고 생각했다.


집안 청소나 설거지도 미루는 것 같았다. 눈살을 찌푸릴 만큼 이것저것 다 미루는 것 같아, 잔소리 바가지만 했다. 휴일 초저녁, 잠시 잠을 자는 것 같더니 거실 소파에 웅크리고 떨고 있었다. 너무 사시나무 떨듯 하여 어안이 벙벙했다.


침구의 두꺼운 이불을 덮어주어도 마찬가지였다. 손과 발을 동동거리며 아직 채 가지 않은 여름 잔볕의 9월 초 날씨에 벌벌 떨고 있었다. 큰일이다 싶었으나 병원은 한사코 거부한다. 화장실을 가더니, 나오다 나뒹굴어 버린다.


119를 불렀다. 남녀 소방관 둘이 들어와 아내를 싣는다. 전과 다르게 119 차량의 장비나 시설이 예사롭지 않았다. 혈당수치가 500이 넘는다고 했다. 부은 손(부종)의 외상여부를 물어 다친 곳은 없다고 했다.


집 근처 대학병원으로 가는 동안, 점멸신호등처럼 앞으로의 여정이 간헐적으로 깜빡였다. 누구에게나 삶은 반짝이는 유리구슬처럼 깨지기 쉬운 속성을 가지고 있었다.


불과 며칠 전 여행으로 즐겁던 일상이 깨져버렸다. 간과 신장에 당뇨로 인한 농양이 생겼다고 한다. 입원을 하고 수속을 밟으니 간병을 해야 했다. 딸아이에게는 염려 말라고 하곤 장기재직휴가를 냈다. 간병인도 생각해 봤지만 아내는 내가 지켜야겠다는 생각이 컸다.


아내의 간병이 시작되었다. 내가 한 번은 급성위궤양으로 또 한 번은 심장 판막증을 앓는 동안 아내는 꼬박 병실을 지켰다. 이번엔 내가 아내를 지켜야 한다. 다행히 간농양은 시술을 통한 고름의 통로를 여는 구멍하나를 낼 뿐이었다. 딸애는 나보고 집이 가까우니 가서 좀 쉬라고 한다.


병실 침대옆의 보호자 석이 그러대로 쉬고 잘 수 있었다. 첫날 응급실 의자에서 꼬박 밤을 셀 때보다 훨씬 여건이 좋았다. 아이에게 네 엄마 옆이 더 편하니 걱정 말라는 말을 하고 안심시켰다. 딸아이는 내가 제 엄마 옆에 붙어 있으니 안심하고 직장을 오고 갔다. 그나마 내가 할 수 있는 아비의 역할에 눈물겨웠다.


수술 후, 병실로 돌아온 아내는 우측 옆구리에 간의 농양배출 주머니를 차고, 왼팔뚝엔 잔뜩 복잡한 약물과 연결된 링거줄을 차고 돌아왔다. 의사는 내게 다행히 패혈증 전단계에서 늦지 않게 와 시술이 잘됐다고 했다.


안도의 한숨을 쉬려 했으나, 오른쪽 손이 문제란다. 다시 봐도 심하게 부풀어 올랐다. 입원기간 동안 약물치료를 해보고 차도가 없으면 수술을 한다고 했다. 수액을 며칠 동안 맞고 있으니 발이 부은 듯 보였다. 좀 주물러주면 눈이 감기기에 대중없이 주무른다. 아내가 병상에 누워있으니, 나는 여전히 나이 든 풋것에 지나지 않았다. 새벽달도 차오르다 졸기 시작했다.


벌써 입원 일주일이 지나고 있었다. 오른손의 수술을 위해 7층의 처치실로 올라가 부분마취를 하고 다시 또 기다린다. 단순한 당뇨 부종이 아니라고 했다. 세균침투에 의한 부종이 약물이 듣질 않으니 결국 수술까지 와 버렸다. 농양제거는 시술이었는데 이번엔 수술이었다. 녹색의 수술복으로 갈아입히, 3층의 수술실로 내려가니 일전의 시술실과는 다르게 분위기에 압도되었다.


병실로 돌아와 기다리는 동안 이 글을 쓴다. 무언가 하지 않으면 쓸데없는 생각이 세균처럼 퍼지는 것 같다.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면 무엇이 먹고프냐고 수술실로 들어가기 전에 아내에게 물었다. 의외로 빙수가 먹고 싶다고 했다. 문득 나도 시원한 빙수생각이 간절해진다. 옥죄는 가슴을 풀어줄 시원한 얼음을 갈아 넣고, 단팥을 듬뿍 올린 빙수를 아내는 좋아했다.


아득한 시절 아내를 처음 보던 날, 그날은 군대 후배 결혼식이 있었다. 신부의 고교동창인 아내는 유난히 새초롬하고 가녀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내의 조금 찡그린 얼굴을 보며 좌중을 웃긴답시고, 아내에게 처음 건넨 말이 지금 생각해도 우습다.


"변비 있으세요?"

관심은 엉뚱한 말로 튀어나왔다. 후배 친구들과 신부 친구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웃어제꼈다. 아내만 불쾌한 표정으로 나를 쏘아봤다. 돌아가는 전철 안에서 어떤 식으로든 달래어 별도의 시간을 만드는 생각만 하는데 그녀만 시청역에서 내렸다.

때는 왔다. 잽싸게 나도 내렸다. 목적지와는 상관이 없었다. 따라붙어 사죄부터 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아까는 엉뚱한 말을 했네요."


"괜찮아요! 가던 길 가보세요!"


"가던 길 전철에서 내려버렸네요! 차나 한잔 하시죠?"

아내는 우뚝 멈춰 나를 빤히 쳐다봤다.


"워낙 입담이 좋으셔서 넋 놓고 쳐다는 봤었어요!"


신촌역에서 내려 레스토랑으로 같이 들어갔다. 아내는 와본 것 같았다. 메뉴판을 두리번거리며 보는데 아내는 빙수를 먹겠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아내와 처음 먹은 음식이 빙수였다. 그렇게 아내와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아내가 수술실에서 아직 올라오질 않는다. 괜한 불안감에 창밖을 본다. 울창한 여름의 녹음이 조금씩 바래지고 있었다. 하긴 추석이 코앞이니 그럴 때도 되었다. 누구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있나 보다.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듯 아내와 나도 어느덧 초로에 들어섰다. 감정도 오래 쓰면 녹이 슨다는데 나는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아내의 이곳저곳을 혈액순환을 위해 눌러주다 보면 눈물만 흐른다. 나이만 먹었지 제중심 하나 못 잡는 내가  어이없다.


근래에 몇 해를 지내보니 여름에 너무 더우면 겨울에 맹추위가 극성을 떨곤 했다. 아마 올 겨울도 많이도 추울 모양새다. 강화선산의 묘소도 하루쯤 돌봐야 하는데 시간이 날지 모르겠다.


손부위의 수술이라고 내가 너무 간단히 생각했던 거 같다. 오전 11시에 시작한 수술이 오후 2시를 넘기고 있다. 수간호사가 병실로 찾아와 자초지종을 말한다. 절개를 한 부위의 미세혈관 접합과 신경수술까지 하느라 1시간 더 늦어진다고 했다. 무슨 일이든 기대는 결과와 상이한 것 같다. 그 손으로 어렵게 숟가락이라도 잡았었는데 아무래도 힘들 것이다. 가슴은 더 두근거린다.


세 시간 반 만에 아내가 올라왔다. 의외로 표정이 밝다. 긴 한숨과 함께 상태를 물어봤다. 별거 아니라는 대답과 점심받아 놓은 거 내놓으란다. 오래 걸려 반납함에 걸어 놨는데, 후딱 도로 찾아왔다. 배가 고프다는 건 살아 있다는 증표다. 좀 식긴 했지만 맛있게 먹는 아내가 정겨웠다.

역시 먹어야 산다.





PS - 아직 입원 중으로 간병을 하는 입장으로 써본 글입니다. 더 두고봐야 하지만 간절히 예전의 생활로 돌아가려는 중입니다. 관심있게 봐주시는 독자님과 작가님들께 늘 감사드립니다. 건강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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