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
옛날 옛적에 평범한 29세 회사원이 살고 있었다.
짧은 만남과 이별을 반복하던 여성은 잠시 연애를 포기하려고 했다.
한 번만 같이 가자. 나 혼자 여자라 불편한 자리라서 그래. 제발! 부탁해.
그래. 알았다. 알았어! 대신 잠깐 앉아 있다가 나와서 우리끼리 술 마시는 거야.
31세의 남성은 오랜 유학생활을 마무리하고, 한국에 막 들어온 백수였다.
어느 날 그들은 지인과의 술자리에서 자연스럽게 만났다.
“데낄라를 샷으로 마시면 더 맛있나?”
“이렇게 샷 한 입에 털어 넣고, 레몬에 소금 찍어먹으면 먹을 만해요.”
여성은 딱히 남성을 유혹하려던 의도는 아니었다.
술 마시면 남자에게 끼 부리는 안 좋은 버릇이 있긴 했지만.
첫 만남 이후 3번의 데이트. 로맨틱한 레스토랑을 가고, 가장 인기 있는 영화를 보기도 하고. 밤이면 술도 마셨다.
데이트 3번이면 사귀는 것이 일종의 암묵적인 룰 아닌가. 그들은 그렇게 일상을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어느덧 3년이라는 시간이 흘렀고, 둘의 마음은 갈수록 깊어졌다.
그 사이 백수였던 남성은 대기업 취업에 성공했고, 여성은 그의 미래를 믿고 지지했다.
“언제 우리 부모님 만나보지 않을래?”
“당연히.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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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어딘가에 살고 있는 흔한 부부의 결혼 전 연애스토리다.
동화 속 마무리처럼 ‘그들은 결혼해서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로 끝날 수 있다면 좋으련만.
결혼 후 펼쳐질 이야기는 지독히 현실적이고, 어렵기만 하다.
변함없이 사랑한다고 굳게 믿었는데, 그를 마주한 것만으로 행복함에 차오르던 순간을 아직도 기억하는데. 그런데도 문득, 이유 없이 외로운 밤이 찾아온다.
과거의 반짝이던 내가 팍팍한 현실에 퇴색되어 빛을 잃는 동안 그에 대한 마음까지 흐려진 건 아닌지 잘 모르겠다.
“그래도 너네 부부는 사이좋잖아. 우리는 허구한 날 싸우다, 이제 말도 안 해.”
“싸우지 않는 부부가 어딨어. 다 그렇게 사는 거지.”
“그때 내가 왜 걜 만났을 까? 이해가 안 돼. 딸만 아니었으면! 진짜 내가 딸 때문에 산다.”
기혼녀의 대화는 보통 신세한탄으로 시작해, 자기 연민 혹은 자기학대로 끝난다.
그러나 내 오랜 기억 속 그녀는 현 남편이자 구남자 친구를 위해 비싼 한약까지 달여 먹이던 새침한 사랑꾼이었다. 까마득히 잊었겠지만, 그녀에게도 찬란했던 순간은 분명 존재했다.
사랑을 그래프로 주기화 할 수 있다면 내 감정은 지금 어디쯤 도달해 있는 것일 까.
낭만적인 시절을 지나 난관을 함께 헤쳐나가며 더욱 단단해지다, 죽도록 미워하고 그저 권태롭게 흘러버리는 변화의 추세를 거스르는 삶 따윈 없는 걸까.
결혼 5년 차. 3살 난 딸 하나.
매년 나이를 먹고, 주름마저 자글자글 내려앉기 시작하는데 자아는 좀처럼 성장하지를 않는다.
가끔은 29세 회사원이었던 그녀와 지금의 내가 별 다를 바 없다 생각에 스스로를 한심하게 여기기도 한다.
그래서 오늘의 나는 다짐한다.
여전히 낭만 있는 삶을 꿈꾸지만, 지독히 현실적으로 셈하는 이율배반적인 뇌 구조를 탓하며 평생을 불만 속에서 살 순 없다.
이것이 보편적인 사랑이야기라면 그중에서도 양지를 골라내 머무르고 말겠다.
한참을 더듬어야 찾아지는 기억 속의 사랑이 아니라, 금방이라도 꺼내 볼 수 있는 사랑 속에 살고 싶다.
즐겁지만은 일상에 지친 나머지, 서운한 마음에 괜히 못되게 구는 것은 그만두기로 한다.
지난날부터 현재로 이어지는 우리의 사랑은 모두 살아있으니.
여전히 그는 작은 우산 속 넓은 한편을 기꺼이 내어줄 만한 사람이다.
결혼 이후 깨달은 사소한 마음들을 기록합니다. 미치도록 강렬히 원했던 시절을 지나 꿈처럼 스며들어 당연해진 사랑의 감정들을 굳이 언급하고 싶습니다. 세상에 당연한 것은 존재하지 않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