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들의 저급한 삶에 개입한 아름다움
안톤 체호프의 작품에서 두드러지는 시간성은 일상적인 삶의 반복과 무의미함이다. 바냐 삼촌이 47세에야 ‘문득’ 삶에 대한 의문을 던지는 장면처럼, 체호프의 등장인물들은 일상에서 해결책을 찾지 못한 채 무기력하게 현재에 갇혀 있는 모습을 보인다. 그들은 자신을 얽매는 끈적한 시간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깨닫고, 결국 자신이 특별하지 않다는 현실을 마주한 끝에 좌절하게 된다. 그리고 대개 그들의 유일한 탈출구로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본다. 언제나 절망이, 인간의 삶을 이해하려는 진지한 노력의 결과(헤세)로써 나타났던 것처럼 말이다.
“바냐 외삼촌, 우리 살도록 해요. 길고도 긴 숱한 낮과 기나긴 밤들을 살아나가요. 운명이 우리에게 보내주는 시련을 참을성 있게 견디도록 해요. [...] 그러다가 우리의 시간이 오면 공손히 죽음을 받아들이고 내세에서 말하도록 해요. 우리가 얼마나 괴로웠고, 얼마나 울었는지, 그리고 얼마나 슬펐는지 말이에요.”
안톤 체호프,「바냐 아저씨」 중
소냐의 마지막 대사에서도 고통스럽고 회한이 가득한 현실에서 유일한 버팀목은 죽음뿐이라는 체념의 어조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체호프는 내세의 평안을 위해 자발적 죽음을 선택하라고 말하지 않고 오히려 “그냥 살아라.”는 메시지를 던진다. 그는 자신의 다양한 작품에서 죽음이 오히려 존재의 해방이나 자유와 등가가 되어 버리는 것이 인간 실존의 비극이라고 생각했다.
체호프의 아내가 그에게 삶의 의미를 물었을 때, 그는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삶이 뭐냐고 묻는 거요? 그건 당근이 뭐냐고 묻는 것과 같소. 당근은 그냥 당근일 뿐, 그 이상은 모르오." 이 대답에서 알 수 있듯, 체호프는 삶에 대해 특정한 교훈이나 명확한 메시지를 전달하지 않는다. 삶은 그 자체로 복잡하고, 단일한 의미로 정의될 수 없기 때문이다. 체호프의 작품은 이원적인 리듬을 통해 삶을 조망한다. 그 속에는 체념과 자조가 깔려 있으면서도, 지속성이 주는 희망의 가능성이 동시에 존재한다. 비록 어떤 희망이 있을지 확신할 수 없지만, 삶은 그 자체로 풍요롭고, 있는 그대로 긍정할 만한 가치를 지닌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관점은 삶이 비록 회한과 실망으로 가득 차더라도, 그 자체로 지속하는 것에 어떤 의미가 있다고 믿게 만든다.
"난 마흔일곱이야. 예순까지 산다면 아직도 13년이나 남았어. 어떻게 그 긴 세월을 살아갈지, 무엇을 하며 그 시간을 채울지 가르쳐줘." 바냐는 고통스러운 현실을 드러내는 동시에, 삶을 지속할 수 있는 가능성을 묻는다. 이에 트로피모프는, "우리는 우리의 과거를 속죄하고, 고통과 끊임없는 노동을 통해 청산해야 한다."고 답한다. 이 대사는 과거의 실수를 바로잡을 기회를 암시하면서도 그 길이 고통스러울 수 있음을 상기시킨다. 삶은 과거의 반상, 현재의 상황, 미래의 희망에 의해 끊임없이 재해석된다. 아마도 이것이 체호프가 말하고자 했던 삶의 지속성을 지켜야 할 이유일 것이다. 「바냐 아저씨」를 읽으면서, 나는 한 문인의 말이 떠오른다. "삶에 희망이 있다는 것은 단지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는 뜻이 아니라, 우리가 보낸 시간이 헛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막심 고리키는 「바냐 아저씨」를 두고 "인간의 저급한 삶에 개입한 아름다움"이라고 말했다. 바냐 아저씨는 10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그 의미를 잃지 않으며, 오히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더 진실되고 장엄하게 빛난다. 평생 나와 동행할 수 있는 무언가를 마음속에 품고 살아간다면 길고도 긴 숱한 낮과 기나긴 밤들을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체호프의 작품에는 그런 아름다움이 담겨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