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흰 (2016)

자신을 버린 적 있는 사람을 무람없이 다시 사랑할 수 없는 것처럼

by IM
Love Letter (1996)

'그리하여 우리는 조류를 거스르는 배처럼 끊임없이 과거로 떠밀려 가면서도 앞으로 계속 나아가는 것이다.'

이 위대한 문인(文人)의 기만이 때로는 얄궂어 보인다. 나는 스스로가 바다 깊숙한 곳에 비끄러맨 부표처럼, 던져지고 밀려다니다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는 존재로 느껴질 적이 더 많다. 살아가노라 하면 이 땅의 거대한 타의(他意) — 죽음, 운명이라는 불가항력의 폭력, 지상의 모든 사랑하고 괴로운 관계 — 속에서 나아가기는커녕 스스로를 방어하는 싸움뿐이 없다. 기적을 간절히 바라는 마음에도, 자연의 법칙은 결코 인간에게 온화하지 않다. 자신을 버린 적 있는 사람을 무람없이 다시 사랑할 수 없는 것처럼, 삶을 다시 사랑하는 일은 그때마다 길고 복잡한 과정을 필요로 한다.


한강 작가의 자전적 소설이라고 전해지는 『흰』의 서문은 이렇다. 환부에 바를 흰 연고, 거기 덮을 흰 거즈 같은 무엇인가가 필요해서 이 책을 꼭 완성하고 싶다고 말이다. 당신에게 건네도 괜찮을지 자문하게 되는 이 삶을 기어코 함께 살아가자고 말하는 이유는 뭘까. 왜 그는 이토록 폭력적인 세상을 우리에게 건네려고 할까. 흰 것을 생각하면 망가진 도시의 운명을 떠올리게 된다. 한차례 죽었거나 파괴되었던 그 도시. 그을린 잔해들 위에 끈적지게 복원한 어떤 기둥. 늙은 석벽들의 아랫부분이 살아남아, 그 위에 덧쌓은 선명한 새것과 연결된 이상한 무늬를 가진 그 아름다운 도시. 흰 것들은 삶을 끊임없이 재해석한다. 그래서 작가의 '죽지 마'라는 애절한 외침 속에서는 체호프적 비애도, 자조도 없다. 이는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는 생각의 끝에서, 단지 삶을 지속하는 것만으로 치유과 재생이 가능하다는 묵직한 생명의 말이다. 방금 내린 눈은 금세 땅에 닿아 녹아버리지만, 밤새 내린 눈은 고요하게 쌓여 세상의 상처를 덮어버린다. 그것은 살짝만 밟아도 그을렸던 땅의 흔적을 되살려낼 수 있는 연약함일 수 있지만, 나는 아름다움과 살풍겸함 사이에서 절반쯤 얼어있는 그 늪가를 묵묵히 걸어가는 것이 삶이라는 것을 받아들인다.


눈이 온 세상은 조용하다. 눈의 입자 사이에 존재하는 틈새들의 복잡한 구조가 흡입제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강의 작품은 소슬하게 내린 눈과 같다. 세상의 모든 소음을 흡수할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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