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그저 티셔츠를 찾고 싶었을 뿐인데...
현관문 앞에서 본 수완의 원룸은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다. 달라졌다면 깔끔하게 정리된 것 정도. 여자의 흔적만 오려낸 것처럼 말끔했다. 여자는 신발을 벗으려다가 처음 보는 물건에 흠칫했다. 검은색 구두. 여자와 만날 때 한 번도 신은 적 없는 구두였다. 수완은 나이키 운동화 아니면 슬리퍼가 다였다. 여자는 구두 한 짝을 들어 바닥을 살폈다. 285 사이즈. 여전히 비현실적인 숫자였다. 무엇보다 구두가 있다는 건 집안 어딘가에 정장이 있다는 뜻이었다. 여자가 아는 수완은 피켓 티셔츠와 반바지를 즐겨 입었다. 그게 가장 편하고 무난하다고.
구두를 내려놓은 여자는 수완의 원룸에 발을 들였다. 싱크대 옆을 지나치려던 여자는 못 보던 물건에 발이 멈췄다. 밥솥. 라면만 끓여 먹던 수완이 밥을 지어먹다니. 여자는 밥솥 뚜껑을 열어젖혔다. 반 정도 눌어붙은 흰쌀밥을 보자 허기가 몰려왔다. 여자는 뚜껑을 닫고 수완의 침대가로 다가갔다. 혹시 또 모르는 뭔가가 나타날까 두려운 마음으로 그 주변을 살폈다. 이번엔 냄새. 담배 냄새가 나지 않았다. 여자는 킁킁 거리며 침대 주변을 서성였다. 창가로 다가간 여자는 또다시 놀랐다. 화분. 동그란 화분이 하나도 아니고 세 개나 나란히 놓여 있었다. 여자는 화분 안을 손가락 끝으로 눌러봤다. 마른 흙. 여자는 컵에 물을 담아와 천천히 부었다. 금세 젖어드는 흙을 바라보며 여자는 묘해졌다. 흡사 다른 사람 집에 온 것 같아서.
한바탕 비가 쏟아질 것처럼 회색 하늘이 울울했다. 여자는 창밖을 올려다보며 이마를 훔쳤다. 원룸은 습기로 가득했다. 조금만 움직여도 후덥지근했다. 에어컨을 틀까 싶어 리모컨을 찾았다. 그보다 하루 종일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았다는 것이 떠올랐다. 여자는 이마를 문지르며 냉장고 쪽으로 다가갔다. 냉장고 문을 열려고 손을 뻗은 여자는 순간 동작을 멈췄다. 익숙한 수완의 얼굴과 모르는 낯선 여자의 얼굴이 함께 붙어 있었다. 두 사람이 서 있는 장소는 여자도 익히 아는 곳이었다. 그곳은 여자와 수완이 자주 갔던 공원의 일부였다.
둘은 오래된 주공 아파트 단지 내의 놀이터에서 데이트를 즐겼다. 나무의 초록 잎은 무성했고 잔디는 선연했다. 주변을 감싼 노을빛이 차츰차츰 길어질 무렵, 대낮 더위도 사위어갔다. 여자의 머리카락이 목덜미에서 땀으로 엉겨 붙어 있었다. 수완은 벤치를 가리키며 여자에게 머리를 묶어주겠다고 했다. 수완은 머리카락을 한 손으로 모아 꼭 쥐고 다른 손에 머리끈을 쥔 채 애를 썼다. 머리끈으로 머리를 묶을라치면 번번이 끈이 튕겨나갔다. 보기보다 어렵다고 수완이 재차 말하자 여자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웃지 말라고 투덜댔지만 수안 또한 비실댔다. 목덜미 위로 수완의 숨결이 느껴지자 여자는 목을 움츠렸다. 힘들면 그만하라 했지만 수완은 손길을 거두지 않았다. 어설프게나마 묶는 데 성공한 수완은 여자의 어깨를 돌렸다. 땀을 흘리는 수완의 얼굴 위로 오렌지 빛이 그어졌다. 여자는 고개를 숙였다. 빨간 티셔츠 위로 연두색 사과 단면이 아른거렸다. 느슨하게 묶인 머리끈이 풀어질세라 여자는 수완의 손을 꽉 잡고 일어섰다.
여자는 냉장고 앞에 서서 멍하니 사진을 들여다봤다. 수완은 다른 여자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사진 속 여자는 키가 컸고 단정한 오피스룩이었다. 물론 수완도 그에 어울리는 복장을 하고 있었다. 문득 여자는 깨달았다. 한 번 잃어버린 건 다시는 찾을 수 없다는 것을.
그걸 깨닫는 순간 더는 그 집에 있을 수가 없었어요.
도망치듯 집을 나섰다고 말한 여자의 눈은 슬퍼 보였다. 그러나 나야말로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티셔츠는요? 티셔츠는 어떻게 됐어요?
여자는 잠시 가만히 있다가 입을 열었다.
밖으로 나오자 그제야 티셔츠 생각이 났는데….
그런데요?
다시 들어가려고 비밀번호를 눌렀는데….
나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문이 열리지 않았어요.
열리지 않았다고요? 처음엔 들어갔다면서요.
여자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다음엔 아무리 해도 열리지 않았어요.
우리는 허탈하게 서로를 바라봤다. 여자의 눈에서 희미한 미소가 스쳤다.
이제 정말 끝인가 봐요.
여자의 목소리는 더없이 쓸쓸했다.
전 그저 티셔츠를 찾고 싶었을 뿐인데… 그거 아세요? 물건에도 인연이라는 게 있어서 잊지만 않으면 다시 찾을 수 있데요. 정말 많이 좋아했는데 이젠 그만 잊으려고요.
여자는 빈틈없이 걸려 있는 옷들에게 눈길을 던졌다. 어딘가에 있지 않을까 라는 미련을 품고 있는 것 같았지만 여자는 입술을 깨물며 마음을 다잡는 것 같았다. 여자는 평소처럼 한 바퀴를 천천히 빙 돌아보고는 인사도 없이 나가버렸다.
그리고 나는 다시 홀로 남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