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언어유예

사뮈엘 베케트 선집 출간기념회(1부)

[번역과 말] 베케트 번역가들(전승화, 임수현)과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

by 사유

사뮈엘 베케트의 선집 <이름 붙일 수 없는 자> (전승화 번역)와 <죽은-머리들> (임수현 번역)의 출간 기념회가 8월 26일 저녁, 서촌의 북소사이어티에서 진행되었다. 두 명의 번역가들과 함께 워크룸프레스 편집자의 진행으로 이어진 기념회는 <고도를 기다리며> 이외의 우리가 알지 못하는 베케트의 소설에 관한 이야기와 다소 난해할 수 있는 그의 세계에 대한 작은 힌트를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얻고자 한다.



두 번역가와의 만남은 독자들의 질문 중에서 주요 부분을 갈무리하여 답변을 해주고 더 나아가 심도 깊은 이야기를 나누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참여한 독자 중에는 책을 다 읽지 못한 사람도 있었고, 완독 이후에도 어려움을 토로하는 자들도 있었다. 뒤를 이어, 두 번역가들에게 베케트를 처음 접했을 때의 상황과 느낌은 어떠했으며, 무엇 때문에 연구를 하게 됐는지에 대한 질문이 따라왔다.




편집자 (이하, 편) : 어떻게 베케트를 전공하게 되었고 지금까지 연구를 하게 됐는가?


전승화(이하, 전) : 솔직하게 이야기하자면 나는 대학원이 무엇을 하는 곳인지 몰랐다. 단지 내가 안고 있는 인생의 문제를 풀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으로 왔을 뿐이다. 그런데 알고 보니 논문을 쓰는 곳이었다. 애매모호하게 무엇을 연구할지 페이퍼로 적어갔더니 구체적으로 작가를 정해서 계획을 세우라는 요청을 받았다. 방바닥에 누워서 어떤 작가를 정할까 고민하던 중에 눈 앞에 꽂힌 책이 들어왔다. 바로 김현 선생님이 번역한 <몰로이>였다. 궁금해서 훑어 봤는데 아, 뭔지 모르겠지만 내가 했던 질문들이 이 책에서도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개인적인 인생의 굴곡으로 죽음에 대하여 생각을 많이 했다. 이대로 더 살아도 되는가, 신은 무엇일까, 나는 왜 이렇게 힘들게 살아야 하는가. <몰로이>를 읽으면서 나와 비슷하게 맞아떨어지는 느낌을 받았고, 그래서 한번 연구를 해보면 좋겠다, 더 알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석사 논문으로 정했다. 너무 하고 싶어서라는 이유보다는 인생이 끔찍하게 답답한 와중에 무엇을 하는 곳인지도 모르는 곳으로 와서 대학을 마쳐야 했고, 그렇게 인생에 순응하다 보니 놀라운 책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임수연 (이하, 임) : 나는 실존적이고 철학적인 고민은 아니었다. 개인적인 이야기이지만 초등학교 때 <고도를 기다리며> 연극을 어머니 손에 이끌려 객석의 빈자리를 채워야 했다. 사실 그 나이에 내가 무엇을 알아겠는가. 하지만 지금도 그때의 서늘한 기운이 남아 있다. 어렸지만 '아, 고도는 안 오겠구나'라는 생각을 어렴풋하게 했었다. 이건 도대체 무엇일까라고 어린 나이에 생각했을 리는 없고... 그러나 내 안에는 무의식적으로 남아 있었던 것 같다.


불문과를 졸업할 무렵, 전공과 진로의 선택 앞에서 공부를 더 해보고 싶었다. 대학을 와서 베케트의 작품을 봤지만, 그 이후로 <고도를 기다리며>에 대해서 아무런 생각도 없었고, 특별한 끌림도 없었다. 정체불명의 작품이었고, 내 무의식에 남아 있었던 작가 베케트의 작품을 원문으로 읽으면서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구나를 알았다. 대학원에서는 베케트의 연극을 전공하였고, 아무래도 공부를 계속하려면 프랑스로 가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을 내려 유학을 떠났다. 그러나 당시 지도교수는 베케트는 이미 연구도 많이 됐고, 내가 감당하기 힘든 작가라는 제스처를 받아들여 일단은 다른 작가를 선택했다. 그런데 작가와의 인연도 정해져 있는 것 같다. 좀처럼 처음 선택한 작가는 진도가 느리고 공감을 하지 못하고 취향도 맞지 않았다. 결국 과감하게 진로를 바꾸기로 결심하던 때, 마침 다른 교수의 승인을 받아 베케트로 끝까지 박사 논문까지 마칠 수 있었다.


대부분은 연극으로 베케트를 입문했을 것이다. 그중에서 <고도를 기다리며>가 접하기 쉬운 작품이다. 하지만 공부를 할수록 연극만 가지고는 부족하다는 것을 알게 됐고, 이왕 늦은 김에 베케트의 전 작품을 일단 한번 읽어보자는 욕심을 갖게 됐다. 그러나 귀국한 이후로 베케트를 강단에서 강의할 일도 없었고, 학부에서는 한 작가에 대하여 깊게 들어가는 것은 한계가 있다. 한동안 이런저런 번역일에 매진하던 차에 워크룸프레스에서 선집을 낸다는 엄청난 계획을 들었고, 감사하게도 함께 참여하게 되었다. 첫 작품으로 단편집이 나왔다. 곧 질문을 받겠지만, 가독성 있게 번역하는 일이 쉽지가 않아 읽는 것에 어려움을 안겨 드린 것 같아 죄송스럽다.


편: 대다수가 다 읽지 못했다는 글이 많았다. 이번 번역한 작품에 대해서 간략한 개요와 어떻게 읽으면 좋은지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알려달라.


전: 이렇게 독자들이 베케트에 관심이 많다는 것에 깜짝 놀랐다. 특히나 트위터를 보고 독서의 깊이와 수준이 엄청난 것에 놀라웠다. 지금은 모르는 것은 모르는 대로 아는 것은 아는 대로 질문에 답변하고 싶다. 일단, 이 책 <이름 붙일 수 없는 자>가 안 읽히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이 책의 화자 역시 '나는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한 지 이미 한참 됐다'라고 서술하고 있다. 본인도 모르는데 우리가 어떻게 알겠는가. 모르겠다고 느꼈다면 제대로 읽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의 원제 '이노 마블'(L’Innommable) 대해 이야기하자면, 불어에는 형용사 앞에 영어의 정관사 'the'와 같은 'le'를 붙인다. 그것을 앞에 붙이게 되면 '~하는 것'이라는 명사화가 되어 번역의 여지가 굉장히 많아진다. 사물이 될 수도 있고, 사람을 가리킬 수도 있고, 상황이 될 수도 있다. 단 하나로만 규정될 수 없는 상황이 만들어진다. 불어의 독특한 특성이기도 하지만, 한국말로는 하나의 의미로 확정 지어 번역해야 하기 때문에 가장 어려운 작업 중의 하나다. 그래서 고민이 많았다. 이름 붙일 수 없는 '것'으로 할 것인가, 이름 붙일 수 없는 '자'라고 할 것인가. 엎치락뒤치락 고민을 많이 하다가 <이름을 붙일 수 없는 자>로 이미 인쇄가 들어갔다고 하여 그대로 놔두기로 한 것이다.


그렇다면 왜 처음부터 <이름 붙일 수 없는 자>로 했는가. 처음 베케트는 3부작으로 소설을 구상했다. 방금 말한 <몰로이>는 몰로이라는 사람이 엄마의 집을 찾아가는 여정을 그린 것이다. 물론, 몰로이와 상반된 사람, 모랑이라는 자가 점차 몰로이화 되는 이야기가 1부와 2부로 구성된 소설이다. 그다음의 <말론 죽다>라는 두 번째 책은 말론이라는 사람이 정신병원에서 죽임을 당하는 이야기이다. 1951년과 1952년, 1년의 간격으로 이 책들이 나온다. 그 사이에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를 쓴다. 소설 쓰기가 힘이 들어서 작가가 쉬어야겠다는 마음으로 쓴 희곡이다. 인생이 참 신기하다. 단, 5분 만에 쓴 음악이 대 히트를 기록하듯이 가벼운 마음으로 쓴 작품이 인생의 역작으로 대박을 치면서 그다음 나온 소설 <이름 붙일 수 없는 자>가 호평을 받게 된다. 만약, '고도'가 없었다면 과연 이 3부작이 호평을 받을 수 있었을지 의심스럽다. 심리적으로 이 작품이 좋으면 그다음 작품도 좋아 보인다. 그러나 베케트가 심혈을 기울였던 것은 소설이었고, 평생에 걸쳐 소설을 쓰고 싶어 했다. 그런데 이미 이때 에너지의 소진이 컸던 것 같다.


다시 돌아와서 <이름 붙일 수 없는 자>라고 한 이유에는 <몰로이>라는 소설 제목이 사람을 가리키는 대명사가 앞에 나왔고, <말론 죽다>의 제목에서도 진짜 말론이 죽은 이야기 혹은 말론이라는 '대명사'가 죽어버린 것일 수도 있다. 그리하여 더 이상 대명사는 존재하지 않는 것을 보여준다. 즉, 주체라고 생각한 것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3부작의 연결 고리를 생각하여 '더 이상 대명사는 없다'와 언어라는 것이 완전히 사라졌을 때, 이름 붙일 수 없는 것은 미래형의 상태가 된다. 그러나 지금은 현재 말을 하고 있기에 그 중간 상태의 이름 붙일 수 없는 자를 붙이면 좋지 않을까 싶었다. 또 하나는 놈자(者)가 굉장히 많은 의미를 포함하고 있더라. 사물일 수도 있고 사람일 수도 있고 공간을 가리키기도 하고, 연결시킬 수 있는 여지를 많이 발견할 수 있었다. 이노마블 또한 사람일 수도 있고, 공간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름 붙일 수 없는 자는 더 이상 내가 당신들이 생각하는 주체로 존재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베케트는 여기에 의문을 제기한다. 왜 의미는 하나로 규정되어야 하는가. 그리고 예컨대 번역과 원작이 있다면 원작은 중요하고 왜 번역은 중요하지 않은가. 글자를 봐도 형태적인 것과 의미적인 것이 있지만, 사람들은 의미만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 이후 인간의 이성이라는 것이 과연 쓸모가 있는가라는 의문이 제기된다. 그동안 행해진 전제들의 의미는 하나의 규정, 그리고 이것은 반드시 주체가 필요하고, 그 주체는 작가일 수 있다 라는 해석에 베케트는 반기를 든다. 문학은 그런 것이 아니다. 글자를 살려내야 한다. 그 안에 있는 글자 자체가 주체가 될 수 있어야 한다. 사람들은 비평가를 싫어한다. 무엇을 봐도 이것은 '어린 시절의 무엇이다'라고 해석하거나 '이 의미는 이것이다'라고 '~이다'를 붙여 버린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실존하는 것이다. 작가는 그냥 썼을 뿐이고, 이것이 '나'일 수는 없는 것이다. 작가는 주체의 자리를 뒤집어 보자라는 생각으로 <이름 붙일 수 없는 자>를 집어넣은 것이다.


한 가지 더 재미있는 부분은 외국인이 이 책의 제목을 보면 신학을 떠올릴 수도 있다. 전통적인 기독교에서는 거의 모든 신은 성스럽기 때문에 이름을 붙일 수가 없었다고 한다. 즉, 신이라는 말, 야훼라는 말을 함부로 입에 올릴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전 성경에서는 신에 해당하는 부분을 빈칸으로 두었다고 한다. 신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책을 읽으면 이노마블이 신인 것처럼 보이지만, 곧이어 벌레만도 못한 존재로 추락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신일 수도 있고 벌레일 수도 있고 사람일 수도 있고 글자일 수도 있다. 이 책은 그 모든 것을 포함한다. 물론 줄거리 비슷한 이야기가 이어지기도 한다. 벌레라는 이름을 가진 존재가 나오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것으로 이 책을 설명하거나 줄거리를 요약할 수 없는 것이 매력이다. 여러 가지 이름을 가진 인물이 나오고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는, 무슨 이야기인지 과거를 왔다 갔다 하는데 정확하게 설명할 수가 없는, 불구자가 나와서 통 안에 갇히는 내용인 것 같은, 작가는 책을 읽고 줄거리를 말해야 하는 것에 대한 반기를 들고 있다. 이 책에도 나오지만 인간이 과연 포유동물인가, 그 포유동물이라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진화론과 규정하는 것에 대하여 비틀고 비꼬는 부분들이 나온다. 이 책을 읽는 재미라면 약간씩 비틀려 있는 구절들을 읽을 때의 재미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신의 대리인들한테서 이제는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그것을 발리에서 받곤 했는데 그 발리는 그들 말에 의하면 나한테 억지로 생명을 욱여넣었던 곳이었을 거라는 거야. 그렇다면 격하게 그거야 말로 정말 멋진 선물이었다고 신께 외쳐야지. 그런데 있잖아 그들이 내가 한꺼번에 꿀꺽 삼키길 바랐던 존재들이 바로 나와 같은 종자들이야. 그들은 믿기 힘들 정도로 열과 성을 다해 그러기를 원했어. 다시 말해서 나는 원치 않았는데 신이 나에게 생명을 준 것에 대해서 아그래, 아 그럼 감사해야겠네


"그런데 웃긴 건 뭔지 알아? 나보고 신이 나에게 생명을 줬다고 한 자들이 나와 비슷한 종자들을 내가 죽이길 원해"라는 이 부분은 굉장히 비틀고 있으면서도 가려운 곳을 확 긁어주는 듯한 비꼬는 부분이 있어서 시원함을 느꼈다. 문득 졸면서 읽다가도 중간의 이렇게 시원하게 깨달음을 던져주는 부분들이 있다. 연구자의 입장에서 감정을 이입하여 책을 읽지 못하기에 이르러 분석하기 바쁘기 마련이다. 그러나 감정을 담아 읽어보니 가슴 찡하게 하는 부분도 있었고, 무릎을 탁 치는 부분도 있었고, 눈물 날 것 같은 구절들도 있더라. 아마도 베케트는 이런 것을 절대 원하지 않을 것이다. (웃음) 그는 거리를 두고 싶어 할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라면 자신의 감정대로 이해하고 싶어 하는 습성이 있다. 이것을 이용하고 있는 놀랍고도 똑똑한 텍스트이다. 또한, 수도사처럼 글자 하나하나를 다 계획하면서 썼다는 것을 번역하면서 뼈저리게 느낄 수 있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임: 분량에서도 그렇고 베케트라고 하면 소설 중에서는 단연코 <이름 붙일 수 없는 자>가 제일 중요한 책이다. 정식으로 단편을 번역하다 보니 장편을 안 하기를 정말 잘한 것 같다. 2-3개의 단편을 번역하는데도 굉장히 어려웠다. 베케트 단편들은 40년대의 <첫사랑>과 <추방당한 자>라는 3부작 이전의 짧은 단편들은 그나마 인물이 있고 줄거리가 있고 상황이 있어 인지가 가능하다. 그러나 여기 모은 단편들은 60,70년대의 단편들이고, 이노 마블 3부작 이후의 베케트가 쓴 것들이다. 베케트 문학의 핵심에 대하여 잘 들었듯이, 3부작을 쓰면서 작가로서 굉장히 소진된 것 같다. 그 이후로 이 정도 분량의 장편은 <꼬망쎄>를 제외하고는 나오지 않았던 것 같다. 기력이 남아 있을 때 단편을 써서 모은 것이고, 사실 본인이 모은 것도 아니다. 실패작이라고 제목을 붙였지만 진짜 실패작은 아니었을 것이다. 표현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여 붙인 제목인 것 같다.


이 단편들의 공통점은 찾기 어렵다. 오직 난해하다는 것이 공통점이다. 연극을 번역하다가 오랜만에 산문을 번역하다 보니 우리말로 정확하게 옮기기가 어려웠다. 베케트가 의미를 비우고, 하나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부정하는 입장에서 이런 글들이 나온 것이다. 굳이 방향성을 찾는다면 60,70년대의 단편들은 <이름 붙일 수 없는 자>에서 보여주는 치열한 주체에 대한 의문과 내가 누구이고 지금이 언제라는 질문들을 더 이상 할 수 없는 한계점에 이르러서, 이제는 불가능성에 대하여 글쓰기의 대상으로 삼아 담아낸 것 같다. 그는 문법 파괴자이며 문장 파괴자이고 이런 것을 어떻게 마무리할 것인가가 굉장한 숙제였다. 나 역시도 한계에 많이 부딪히고 편집자와 수없이 의논했다. 그럼에도 표현의 한계, 그 자체를 글쓰기의 대상으로 삼아 독자 친화적이지는 않지만, 자신의 글쓰기에 대해서 어떤 자보다 끝까지 치열하게 밀고 나간 작가라는 점에서 이견이 없었다.


단편 제목만 봐도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어느 작가나 상징적인 것을 제목으로 붙이게 마련이다. <죽은-머리들>은 죽은 머리들이 떨어진 것이 아니라 붙여져 있어서 하나의 단어처럼 사용된다. 머리가 죽었다고 설명하는 것이 애초의 죽은 머리들이라는 의미가 아닌가 싶다. <없는>이라는 말은 어떻게 옮겨야 할지 힘들었다. <실패작들>처럼 노골적으로 이건 실패작들이야 라고 내세우는 경우도 있다. <다시 끝내기 위하여>라는 작품은 글을 쓰기 위한 이유가 다시 끝내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하지만 끝을 낼 수가 없어서 베케트는 자신의 글쓰기에 끝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비록, 표현의 한계가 있고, 수단도 없고, 능력도 없지만 그럼에도 표현해야 하는 의무가 있는 그런 작가였다. 이 말은 베케트 스스로가 다른 화가에 대해 한 이야기를 인용한 것이다.


단편 제목이 갖는 의미를 보더라도 과도기에 놓인 작품들이다. 조금 더 후에 나올 꼬망쎄라든가 후기 3부작이라 칭해지는 작품들에 좀 더 집중하고, 마지막 작품들을 쓰기 위한 습작이라 할 수 있다. 완성이라든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완결을 염두에 둔 작품들은 아닌 것 같다. 예외라면 <소멸자>라는 작품은 제목에서부터 이노마블에 대해 고심한 것처럼, 나도 소멸자라는 제목이 일단 불어에는 없는 말이고, 처음에는 다른 제목을 붙였는데 아닌 것 같아서 소멸자로 바꿨다. 풀어서 붙일까 하다가 원제가 한 단어라서 한 단어로 제시하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 이 작품은 베케트 전체 작품 중에서도 중후기 작품이고 단편들의 집대성이 아닌가 싶다. 어떻게 보면 문학적 글쓰기라는 실험실 안에 여러 인간 군상을 모아놓고 네 부류의 인간을 나누는 인간 군상을 보는 것 같기도 하다. 베케트가 말한 것처럼 여러 인물들을 다 풀어놓고 그 인물들의 분류를 시도한 것이 아닐까 싶다. 결국 이 단편들은 일관성을 찾기 쉽지 않지만, 그래도 각자의 제목에서부터 베케트의 사고가 반영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편: 다음으로 <이름 붙일 수 없는 자>의 구두점에 대한 질문이다. 구두점 때문에 읽다가 초조해졌지만 하나의 덩어리라고 생각했더니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는 독자의 의견이 있었다.


전: 구두점에 대해서 해설에도 언급했지만, 읽다 보면 쉼표가 너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심지어 물음표, 느낌표, 마침표가 있어야 할 자리에도 있다. 쉼표가 다 먹어버린 것 같다. 그러면서 문장을 한 없이 늘리고 있어 어디에서 끊어야 할지 알 수 없어지고, 주어가 어디 있고 목적어가 어디 있는지 찾기 힘들다. 3-4 문장이 한 문장이다 보니 어디서 끊어야 할지 괴로웠다. 일종의 호흡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죽어가는 사람이 한 문장을 하기 위하여 숨을 쉬는 듯한 느낌을 주고 싶어 한 것 같다. 살려는 욕망이 강할수록 숨을 자주 쉬게 된다. 마치 죽어가고 있는 한 존재인 것이다.


또 하나는 쉼표가 많음으로써 자꾸 걸리는 것이다. 돌멩이에 걸리듯이 잘 안 읽히고 거칠어진다. 그것 역시 베케트가 원했던 부분인 것 같다. 유려하게 읽히지 않고 다시 앞으로 돌아가야 하는 상황을 일부러 만드는 것이다. 이것이 무슨 내용이었나 싶어 다시 돌아가는 것, 끊임없이 반복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베케트는 내용과 형식을 동일하게 사용한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그것을 이루기 위하여 도를 닦듯이 글을 쓴다. 여기 나와 있는 내용은 형식이고, 형식이 바로 내용이다. 죽어가는 자의 헉헉됨, 그리고 죽어가는 과정이 반복된다. 한참을 읽다 보니 잊어먹었다는 절망감. 형식을 그대로 내용과 합지 해서 글을 쓰고 있다. 끝남과 끝나지 않음에 대한.


베케트 문학의 특징은 상반된 것을 거울을 보듯이 배치하고 있다. 고문을 하는 자와 고문을 받는 자의 구도, 괴롭히는 자와 괴롭힘을 당하는 자, 멈추고 싶어 하는 것과 가고자 하는 것들이 있다. 빨리 죽고 싶어 하는 것과 그럼에도 살아야지 라는 것들의 혼합. 그런 내용을 형상화시킨 것이 쉼표와 마침표의 갈등과 경쟁 상태이다. 다시 말하여 물음표와 마침표, 느낌표 자체는 사실상 문장을 끊어버린다. 그것을 쉼표로 바꿈으로써 나는 멈추고 싶은데 질질 질 끌려갈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 버린다. <고도를 기다리며>에서도 나온다. "우리 이제 가자"라고 하면서 가만히 있는다. <마지막 게임>에서도 "나 이제 갈 거야", "그래 가버려" 하면서도 그대로 무대에 남아 있다. 그러나 이 책의 마지막 구절에는 마침표를 찍는다.


그 단어들이 어쩌면 내 이야기의 문턱까지, 내 이야기가 통하는 문 앞까지 나를 데려갔을 수도 있고, 에이 설마, 만일 문이 열리면, 내가 있을 거야, 침묵이 있겠지, 내가 있는 그곳에, 나는 모르겠다, 나는 그걸 영원히 모를 거야, 침묵 속에서는 누구도 알지 못해, 계속해야만 해, 나는 곧 계속할 거야.


"나는 계속할 거야"라고 했는데 문장에 마침표가 딱 찍혀 있다. 이 마침표가 묘한 경쟁 상태와 긴장 상태를 만든다. '계속하겠다'라고 하는데 마침표를 찍고 '그만 하겠다'라고 하는데 쉼표를 찍는, 밀고 당기기가 이 안에 있다. 마치 심장이 움직이기 위하여 수축과 확장을 반복하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문체 안에서 확 느낄 수 있도록, 무엇이 내용이고 형식인지 구분할 수 없는, 기본적으로 생각하는 긍정과 부정의 이분법, 가치라고 규정함으로써 생기는 폭력들, 이런 것들을 베케트는 넘어가고 싶었던 것 같다.


샤흘 흐 줄리엣이라는 <베케트와의 만남>이라는 책을 쓴 시인이자 작가를 프랑스에서 만난 적이 있다. 드디어 작가의 친구를 만난다는 기쁨에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베케트는 어떤 사람이었냐고 물었더니 바로 대답을 안 해주더라. 그 책 안에서도 베케트는 질문에 시종일관 침묵으로 일관했던 것처럼 이 선생님 또한 침묵을 지키시더라. (웃음) 이 분은 대신 오래 끌지 않고 이야기해 주었다. 베케트는 많이 괴로워하였다고. "그 당시 베케트는 너무나 힘들어했다"라고만 말해주었다. 내가 읽은 베케트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무엇이 그렇게 힘들었는가라고 묻자, 그 심연까지는 알 수 없지만 무척 힘들어했다 라고 그날의 인터뷰를 마무리 지었다.


그는 말하지 못함, 하지만 말할 수밖에 없음, 이런 또 다른 것을 인생에서도 그대로 살아낸 사람이다. 작가와 작품이 구별되지 않는 삶을 산 것이다. 글자와 내용이 구별되지 않고, 형식과 내용이 구별되지 않고, 인물과 글자가 구분되지 않는다. 공간과 인물이라 생각되는 것 또한 구별되지 않는다. 이런 구별되지 않음으로 인하여 주체는 무한대로 분열되고 우리가 가진 전제적 사고방식, '흑'아니면 '백'이라는 사고방식은 회색으로 바뀌게 된다. 구두점에서 여기까지 이르게 된 것이 베케트만의 방식인 것이다.


편: 임수현 선생님께 드리는 질문이다. 직접 산울림 소극장에서 연극도 연출도 하셨는데, 베케트의 희곡과 소설의 결이 어떻게 다른지 궁금하다.


임: 현장 연극에도 관여했고, 소설보다는 연극에 관심을 많았고 베케트에 대한 시작도 연극이었다. 지금까지 베케트의 작품을 읽어 보니 고도는 정말 친절하고 대중적이고 보편적인 작품이었다. 연극은 대화의 예술이고 배우의 예술이다. 고도처럼 대화체로 된 베케트의 글쓰기는 없는 것 같다. 내용에서도 보편성을 지니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베케트의 대표작은 <고도를 기다리며>이고 현대 연극의 고전처럼 자리 잡은 것 같다. 그럼에도 소설은 개인의 작업이고, 연극은 고려할 상황이 많다. 배우, 주어진 공간과 무대, 여러 디자이너와의 협업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작가 본인이 실제 연출도 했었고, 배우들과의 교류도 잦았다. 그래서 연극적 글쓰기에 한동안 매진하던 시기도 있었다.


전체적으로 베케트를 쭉 보면 소설과 희곡의 장르적 차이는 분명히 있지만 크게 보면 베케트의 입장에서 같은 세계인 것 같다. 후반으로 갈수록 연극이 서술적으로 변모하고 소설에서도 이야기보다는 이미지 중심으로 나간다. 여기 단편들을 보면 산문보다는 무대 지시문 같기도 하다. 인물에 대한 자세한 묘사나 공간에 대한 디테일한 묘사는 중립적인 작가의 시선이라기보다는 연출자나 관찰자의 시선으로 그려진 부분들이 많다. 특히 베케트의 단막극들이 소설이라고 봐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장르를 정해놓지 않고 있다. 어떤 경우에는 베케트가 공간적인 상상력에 취중 하여 글을 쓰면 연극적으로 갈 수도 있다. 언어에 집중하다 보면 산문이 되기도 한다. 또한, 그는 연극, 영화뿐만 아니라 TV 드라마, 라디오 드라마, 영화 등의 다양한 매체에 대해서도 관심이 컸다. 매체에 대한 두드러진 특징을 자신의 글쓰기에 대입하여 작품을 만들었던 것 같다. 베케트가 찍은 유일한 영화 <필름>에서 보면 카메라와 대상이 서로 쫓고 쫓기는, 알고 보니 카메라와 대상이 같은 사람이었다는 굉장히 베케트다운 마무리를 보여준다.


연극과 소설의 결이라고 한다면 초반에는 분명히 다른 부분이 있었다. 대화라든가 소설 속 인물들은 대부분 혼자인 경우가 많은데 연극의 인물은 최소한의 파트너가 존재한다. 그것조차도 연극에서는 갈수록 인물이 사라지고 인물의 이동성도 사라지고 나중에는 배우의 얼굴에만 집중하거나 그것도 부족하여 배우의 입만 조명으로 비추는 연극도 있다. 결국은 희곡 또한 소설과의 경계가 모호한 지점으로 가는 것이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극은 연극으로써 공연이 되고 소설은 소설로써 출판이 되지만 베케트의 많은 단편들과 장편들도 마찬가지로, 베케트가 좋아하는 배우들에 의해서 낭독의 형식으로 공연이 많이 됐다. 그런 것을 보면 본질적으로 두 장르 사이의 확연한 구별은 없는 것 같다. 있다 하더라도 후반으로 갈수록 자신만의 세계 안에 장르를 초월하는 글쓰기를 보여준 것 같다.




* 본 강연은 2016년 8월 26일 북소사이어티와 워크룸프레스가 마련한 독자와의 만남을 재구성한 것입니다.

* 2부는 베케트와 철학과의 이야기 및 번역에 대한 어려움과 즐거움, 독자와의 질의응답으로 이어집니다.

* 녹음 및 상황으로 인하여 완벽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수정할 내용이 있다면 언제든 문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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