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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유 Dec 01. 2016

사뮈엘 베케트 선집 출간기념회(2부)

[번역과 말] 베케트 번역가들(전승화, 임수현)과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




편집자 (이하, 편): 철학과 관련된 질문이다. 베케트를 검색하면 철학자의 이름도 함께 나온다. 철학자들이 그의 소설에서 무엇을 발견했는지, 베케트가 철학에서 어떻게 논의가 되고 있는지에 대하여 알고 싶다.  


전승화 (이하, 전): 나 또한 철학은 잘 모르지만 아는 한도에서 말하자면, 베케트는 우등생이었다. 공부를 잘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다 보니 좋은 대학을 나오고 프랑스로 교환 교수 비슷하게 떠난다. 그 정도로 지적 욕구에 열려 있는 사람이었다. 굉장히 많은 공부를 한다. 책도 많이 읽고 철학 관련하여 공부도 하고 그 사람이 처음 쓰게 된 시가 경연에서 상을 탄 것도 데카르트를 비꼰 시였다. 이미 나온 철학자를 비꼰 시로 상을 받은 것이다. 그만큼 자기 작품에서 고대 철학자를 많이 언급한다. 다만, 그들의 내용을 가지고 글을 쓴 게 아니라 이름만을 언급했을 뿐이다. 이것이 무슨 연관이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대명사는 떠다니는 섬과 같아서 내용과 맥락이 같지 않은 경우가 많다. 당시에는 놀랍고 획기적인 일들을 많이 한 것이다.


그리고 베케트의 또 다른 최대 장점은 패러디다. 베케트의 작품을 보면 거의 많은 부분이 패러디되어 있다. 이것이 패러디라는 것을 알려면 독자도 박학다식해야 한다. 문학과 철학의 패러디가 있고, 기존의 관용어들을 패러디한다. 예컨대 속담 하나를 가지고 약간씩 변형해서 자기 식대로 쓴다. 베케트의 작품에서 철학은 그렇게 다뤄지고 있다. 하이데거, 파스칼, 이런 사람들이 많이 언급되어 있고, 연구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많이 인용되고 있다. 그가 중점적으로 거론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주체의 사라짐에 있다. 그리고 내용이 산발적이고, 중간에서부터 시작되고, 기승전결이 없는 부분은 들뢰즈가 굉장히 좋아한다. 그래서 철학자들이 그의 문학을 끌어서 사용하는 것 같다.


그의 작품 속 인물들은 대부분 거지이다. 좋게 말하면 방랑자들이다. 집이 없고 떠돌아다닌다. 그럼에도 <첫사랑>이라는 단편을 보면 마지막의 동전을 구걸하는 리얼한 묘사가 나온다. 동전을 구걸하고 누가 획 던지는 것 같은데, 감사합니다 라고 말하는 지질한 부분이 자세히 묘사되어 나온다. 중간중간 사회 변혁적인 용어들, 정치적인 용어들도 가끔 집어넣는다. "나는 정치범은 되지 못할 거야"라는 식의 이야기들은, 푸코의 <감시와 처벌>을 보면 사람들을 나눈다. 깨끗한 사람, 더러운 사람이라고 크게 나눈다면, 베케트는 더러운 사람, 주변인, 소외자들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글을 시작한다. 그 당시 유행했던 부분에 있어서 시사할 수 있는 여지를 많이 주고 있다. 어떤 소위 포스트모더니즘 같은 부분이 이 안에 있지만 최근의 철학자 바디우는 모던한 부분을 찾아내기 시작했다.


문학이라는 것은 굉장한 소스인 것 같다. 그래서 프로이트 같은 정신분석학자가 문학을 통해서 자신의 이론을 정립한 것과 마찬가지로 문학을 통해서 문학을 이용하려고는 하지 않는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철학가들은 문학을 이용하려 하지 않지만, 문학 안에서 철학을 사유할 수 있는 부분들을 끌어내려고 노력했었던 것 같다. 겔링스, 비코라든가 여러 철학자들이 베케트와 연결된 부분들이 많다. 또 하나는 헤라클리트라고 하여 흐르는 물에 발을 담갔을 경우, 똑같은 물에 담글 수 없다는 내용도 나오고, 그리스 철학자, 현대 철학가를 아우르는 소스들이 베케트의 소설 속에 많이 담겨 있다.


임수현 (이하, 임): 나는 알랭 바디우가 쓴 <베케트에 대하여>를 서용순 선생님과 함께 번역하였다. 거기에서 베케트의 작품을 바디우가 인용한 부분을 번역하였는데 내가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번에 나온 번역과 조금 다르다. 이번에 나온 번역은 계속 다시 읽다 보니 여기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혹시 만약 비교하다가 왜 다른가라는 의문이 생겼다면 나의 각성 쪽으로 고려해주면 좋겠다. (웃음) 


베케트와 철학자들은 고대 철학자부터 현대의 들뢰즈까지 많은 철학자들이 그의 문학에 관심을 갖고 철학적인 테마를 끄집어냈다. 인물들의 마이너리티 한 속성이라든지, 정형화된 주체가 아닌 분열되고 거의 소멸 직전에 이르는 주체들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래서 영미에서는 베케트를 포스트모더니즘적으로 해석해 왔다. 이미 주체가 분열됐고 해체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입장은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경계에 서 있는 작가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분명히 주체의 분열이라는 부분은 3부작에서부터 재기하고 있고,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빈자리를 어떻게든 메우려고 하는 그런 의식과 무의식적인 노력들이 끝없이 마지막 글쓰기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래서 주체에 대한 희망이라고 하면 과할 수 있겠지만 그런 탐색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작가인 것 같다. 3부작에서 결국 1인칭 '나'를 더 이상 쓸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면, 그 이후의 후기 3부작에서는 그 빈자리를 '나' 스스로가, 분열된 자아들이 다 모여서 어떤 형상을, 나라고 이름 붙일 수 없더라도, 어떤 형체나 이미지로 만들어 내려는 그런 노력을 포기하지 않았던 것 같다. 


푸코가 그 유명한 '주체란 무엇인가'라는 세미나에서 제일 처음 화두로 던진 것도 베케트의 인용이다. "누가 말하든 그것이 무엇이 중요한가"라는 문장을 던지면서 현대의 저자란 개념은 더 이상 사용될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베케트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끝이 아니라 그다음의 치열한 작업을 계속 이어갔다. 영미에서는 포스트모더니즘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지만 어떤 경계에 있다고 본다. 


베케트의 유명 전기 작가가 붙인 제목이 <마지막 모더니스트>이다. 긍정적인 의미와 부정적인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제임스 조이스나 마르셸 프루스트, 카프카로 이어지는 모더니즘의 거대한 서양 문학사의 흐름의 마지막 불꽃을 태운 사람이 바로 이 베케트가 아닌가 싶다. 그래서 현대 철학자들이 베케트에 대해서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는 것 같다.     


편: 그 밖의 번역에 대한 질문이 많았다. 첫 번째 질문은 프랑스와 영어 사이에서 베케트가 작가이자 번역가로서 특이할만한 점은 무엇인가. 그리고 베케트가 프랑스어로 먼저 쓰기도 하고 영어로 먼저 쓰기도 하면서 다른 언어로 번역을 한 과정에 대해서 듣고 싶다.  


전: 일단은 1936년 자신의 영문 시를 불어로 번역하면서 자기 스스로 번역을 하기 시작한다. 1937년 말에 프랑스로 정착하면서 프랑스 대중에게 자신을 알리기 위하여 초기 영어 소설 <머피>를 친구의 도움으로 프랑스어로 번역하기 시작한다. 5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불어로 집필하기 시작했고, 그 후 패트릭 바울즈와 함께 영어로 번역하기 시작했다. 집필과 번역은 60년대부터 영어와 프랑스어를 오가면서 시작한다. 어떤 의도로 베케트가 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어쩌면 자신의 작품을 스스로 번역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다만 그를 연구하는 입장에서 과연 그 의도가 무엇이었을까 살펴보자면,  베케트는 프랑스어로 작품을 쓰면 꼭 그 안에 영어식 표현을 집어넣고, 영어로 작품을 하면 프랑스식 표현을 집어넣었다. 이미 작품 안에 영어와 프랑스어가 뒤섞여 있기 때문에 언어를 바꾼다고 하여 큰 변화가 있는 것은 아니다. 카오스는 계속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그의 번역본은 번역본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자기가 먼저 썼던 작품의 내용을 그대로 옮기는 것이 아니라 창작을 하기 때문에 내용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삭제된 부분도 있고 첨가하기도 하고, 더 재미있는 것은 프랑스어 작품의 제목과 반대되는 제목으로 영어 소설에 붙이기도 한다. 반대의 상황이 되는, 다소의 의도성이 드러나는 행위이다. 프랑스 소설이 '기다'라면 영어는 '아니다'라는 식이다. 앞에는 갈 거다, 뒤에는 안 갈 거다라는 식이다. 지금 말하고 있는 '나'이어야 했는데 마지막에는 '내가 아니야'라는 식으로, 언어 자체가 작품이 되는 것이다.


베케트에게 번역이란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 번역이라는 것은 원래 작품이 있고 그것을 글자 그대로 옮겨서 전달하는 식 이외에는 큰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솔직히 말하여 역자에 대한 중요성은 없다. 중요한 것은 작품이고, 작가가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베케트에게 있어 둘 사이의 차이가 없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계속적인 반복이라는 테마 아래, 인생과 인류라는 것 또한 무한 반복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가 원작을 쓰고 번역을 할 때, 번역은 그림자가 아니라 다시 쓰기일 뿐이다. 즉, 창작과 모사의 경계가 사라지는 것이다.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덜 중요한가의 경계가 없어지는 것이다. 그건 그대로 있는 것이다. 베케트의 작품을 보면 출판상의 오류인지 작가의 의도인지 의심이 가는 부분들이 많다. 일부러 잘못된 부분들을 막 집어넣거나, 출판 상 잘못된 부분도 작품이 되어 이것 역시 조금씩 달라지면서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같다고도 혹은 다르다고도 말하기가 어렵다. 이런 경계 위에 있도록, 퍼포먼스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부분들이 그의 작품 안에서 발견되고 있다. 그의 글을 읽으면 이상한 부분들을 발견할 수 있다. 가령 '이것은 살려둘 것'이라는 부분을 작품 안에 집어넣는 것이다. 독자들은 물론 이것이 작품이 끝난 것인지, 작품이 되기 이전의 것인지 아무도 알 수가 없다. 출판사의 실수로 잘못 집어넣었는지 독자는 알 방법이 없다. 단지 실존적으로 우리 앞에 완벽하지 않은 상태로 존재하는 것이다.


과연 우리에게 새로운 것이 무엇이 있는가. 단지 아주 조금씩, 약간씩 변화되는 것일 뿐이다. 우리는 그 변화를 눈치챌 수는 없지만, '왜곡시키다'라는 말을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는 프로메테우스 신화를 끌어들여 창작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프로메테우스가 한 많은 일들 중에서 진흙으로 인간을 만들었다는 버전이 있다. 그런데 베케트는 그것을 '진흙을 변형시켰다', '왜곡시켰다'라고 표현한다. 창작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과 소비하는 것에 대하여 어떤 것이 가치가 있는가, 가치가 없는가에 대한 질문 자체를 출판을 통해서 제기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여지를 열어두고 있다.


편: 그다음은 개인적일 수도 있는 질문이다. 번역의 고통이 큰가 아니면 재미가 더 큰가. 번역의 어떤 점이 어려웠고, 어떤 점을 살리고 싶었는가.


임: 번역의 고통이 무엇이고 쾌감이 무엇인가에 관한 이 질문을 보고 나도 생각해봤다. 번역가로서 고통스러웠는지 아니면 즐거웠는지를 말이다. 결론은 나에게 기쁨을 주는 작품도 있었고, 어떤 작품은 혹독한 작품도 있었다. 베케트가 후자의 경우다. 연극 번역을 주로 많이 했기에 공연으로 올라간 작품들도 꽤 있었다. 그러나 연극 번역은 다르다. 배우들이 관객들에게 전달해야 하는 대사들이므로 배우들이 잘 소화할 수 있는 구어체 어미에 신경을 많이 써야 했다. 어색하지 않게 읽을 수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배우처럼 직접 읽어보기도 한다. 번역된 대본으로 공연되어 관객들에게 전달이 잘 되는 것을 보면 성취감을 느낀다. 그러나 전통 문학의 경우, 난해함의 극을 달리는 텍스트를 번역할 때는 진도가 정말 안 나가더라. 어떤 연극 텍스트는 일주일에 한 편씩 번역도 가능 하지만, 이 작품은 시간이 오래 걸렸다. 동시에 교정도 끝없이 봐야 했다.


그리고 문화적인 코드라든가, 불어를 번역할 때마다 인칭 대명사 번역이 힘들었다. 우리말은 주어가 생략되고 인칭 대명사를 굳이 잘 안 쓰지만 베케트가 주어의 문제를 제기하더라도 주어 자체의 대명사가 있다. 어떤 식으로 뉘앙스를 살려서 할 것인가 고민이 많았다. 문어체와 구어체 사이에서 어떤 길로 갈 것인가가 제일 큰 고민이었다. 연극 텍스트는 고민 없이 구어체로 번역하지만, 전 선생님은 <이름 붙일 수 없는 자>의 번역을 어렵고 무거운 텍스트에서 구어체에 가깝고 친근하게 풀어내셨더라. 만약 내가 썼다면 훨씬 더 드라이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 단편집은 굉장히 드라이하게 느껴질 것이다. 


내가 아는 한글 어휘를 다 동원하여 적절한 우리말 표현을 찾아야 하는데, 다행히도 베케트가 이중언어 사용자라서 영어 텍스트를 참조할 수 있었다. 영어 텍스트는 아무래도 모국어라서 조금 더 설명적이고, 조금 더 친절하다. 불어로 쓸 때는 아무리 부인이 프랑스 사람이고, 살았더라도 본인의 모국어만큼의 감각은 아니다. 불어판에는 생략과 압축의 특징들이 있다면, 영어판에는 서술적인 면들도 있다. 그래서 두 가지를 비교하면서 원칙적으로 불어로 먼저 쓰인 작품은 불어로 번역하고, 영어로 먼저 쓰인 것은 영어식으로 번역하였다. 베케트는 자기 작품의 이상적인 역자로 전권을 가지고 번역하겠지만, 나는 우리말로 전달해야 하는 역자 입장에서 역자후기에도 썼듯이 굉장히 어려웠음을 고백한다. 다음의 베케트 선집 작품들은 이번 성과물을 바탕으로 조금 더 나은 번역이 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전: 베케트는 본인이 단어를 만들기 때문에 어떻게 번역해야 할지 모르겠다. 신조어를 한국어로 번역하기가 쉽지 않다. 관용어를 본인의 입맛에 맞게 바꿔버린다. 그래서 원래는 전혀 다른 의미인데 바꿔버리니까 의미가 이중이 된다. 나는 이중을 표현할 수가 없다. 그래서 풀어줄 수밖에 없는 경우가 가장 어려웠다. 한 문장인데 그것이 이중의 의미가 겹겹이 쌓이는 경우가 많아서 한국말로 표현하기가 쉽지 않았다. 더 재미있는 것은 어순인데, 끝나는 어순이 '장미'로 끝난다면 그다음 시작되는 말도 '장미'로 시작되는 말장난이 있다. 이것을 한국어로 옮기기가 쉽지 않아 생략한 부분들도 있었다. 말장난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부분들이다. 


불어에는 재미있는 표현이 있다. '옹'이라는 표현이 있다. '옹'이 무엇이냐면 프랑스어에는 성(姓)이 있다. 성수를 다 포함하는 표현이 있는데 그것이 '옹'이다. 우리도 되고 나도 되고 너도 되고 그녀/그가 된다. 그 '옹'이 너무 많아서 이것이 너인지 나인지 우리인지 알아내는 것이 너무 힘이 들었다. 엄청나게 구어들이 많이 있다. 요새 젊은 친구들이 하는 말 중에 줄임말도 많고 구어가 많은데 이것이 다 여기에 담겨 있다. 불어를 아무리 많이 하고 프랑스 문학을 하고 있지만 구어는 너무 어렵다. 문법에 맞는 문장이 훨씬 편하다. 그래서 프랑스 친구를 초빙했지만 그 친구도 모른다는 결론이 나왔다. 베케트의 글은 프랑스인조차도 어려운 텍스트이다. 어쩌면 내가 제일 많이 알 수도 있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웃음)  아마도 틀리게 해석한 부분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온전히 뉘앙스를 충분히 알 수 있는 사람이 원어민을 포함해서 얼마나 있을지는 의문이다.


가장 놀라운 점은 베케트 하면 다 알 거라고 생각했는데 프랑스에서도 모르는 사람들이 많았다. 사무엘 베케트라는 존재는 굉장히 클래식하고, 고전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여러분들이 이 작가의 작품에 관심을 갖고 읽는다는 것이 대단하며, 분명 교감할 수 있는 지점이 충분히 있고,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이 작가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를지언정 말이다. 가령, 모랑이 몰로이가 되어가는 과정이 있다. 모랑은 몰로이가 절대 누구인지 모른다. 나인 것 같은데 정체를 모르다가 결국은 몰로이가 된다. 마찬가지로 애매하고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작품이 우리 삶의 어떤 부분에 있어서 분명한 영향을 주고 있다고 생가한다. 


그래서 프랑스어 공부를 좋아한다면 원서 읽기를 추천한다. 베케트가 촘촘히 만들어 놓은 성채와도 같은 문장 구조를 접하게 될 것이다. "이게 뭐야. 엉터리야" 하지만 자세히 보면 다 계획해서 짜인 실수 덩어리임을 깨닫는다. 그 실수를 철저하게 계획하여 만들고 있어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다.


편: 좋아하는 대목과 문장을 알려달라.


임: 어떻게 보면 어느 문장 하나를 고르기가 어렵다. 문장을 고른다기보다는 내가 관심 있어 한 부분은 주체가 '나'라는 1인칭이 그 안에서 이분화되고, 한마디로 말하면 내가 나인지 아니면 너인지, 그런 혼란스러운 인식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런 쪽으로 논문 또한 집중했고, 이번 작품에도 그런 구절들을 발견해서 굳이 말한다면 이런 것이다. 사실 이 문장을 꼼꼼히 읽으면 알 수 있지만, 두 작품에 걸쳐 나온다. <다른 실패작들 2>와 <멀리 새 한 마리>라는 단편에 거의 같은 문장이 나온다.


"나는 태어나기 전에 단념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그래도 그것은 태어나야 했으며 그건 그였고, 나는 그 안에 있었다. 내가 목소리를 가진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내가 생각을 가진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그리고 나는 말을 하고 생각을 하니 내가 불가능을 행하는 거다."


이런 류의 문장을 굉장히 인상적으로 읽었다. 내가 베케트를 바라보는 시각도 크게 보면 이 문장 안에 들어가 있다.


전:


"그들은 횡설수설을 그것도 뒈져버린 개새끼들 같은 그가 횡설수설하고 있는 이야기들만큼이나 내가 전혀 이해하지 못했던 그 횡설수설을, 흡수력이 전무한 나의 상태, 쉽게 잊을 수 있는 나의 능력, 그들이 이런 내 면모들을 너무 얕잡아봤어. 소중한 이해 불능과 결국에는 내 덕분에 내가 나일 수 있을 거야. 곧 머지않아 그들이 무조건 쑤셔 놓은 지식들은 단 하나도 남김없이 다 사라져 버릴 테니까."


"그건 내가 아니야 내가 바로 그자라고. 사실 안될게 뭐야. 그 일을 말해도 되잖아. 나는 그 일을 말해야만 했어. 다른 일과 마찬가지로 그 일을. 내가 아니라니까 내가 아니라고 나는 못하겠어. 그 일이 그렇게 생겼던 거니까. 그 일이 이렇게 생기니까. 그건 내가 아니야. 그 일이 그에 대해 말해줄 수 있다면 그 일이 그한테 일어날 수 있다면 나는 그 일을 정말 부인하겠지. 그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편: 마지막으로 베케트와 같이 읽으면 좋은 책을 추천해달라.


전: 자콥 반 도마엘이라는 감독을 아시나요? 그가 찍은 <미스터 노바디>라는 영화를 추천한다. <이름 붙일 수 없는 자>와 비슷한 부분의 영상들을 볼 수 있다. 석사논문을 쓰면서 <매트릭스>를 보고, "와, 베케트다"라고 감탄한 적이 있다. 영화라는 것이 굉장히 다양한 차원을 보여준다. 베케트의 문학적인 구조를 이해할 수 있는 요소를 던져주고 있다. 예컨대 <큐브>라는 호러물도 있는데 굉장히 베케트적이라고 생각하며 봤었다. 1편만 봤는데, 베케트도 굉장히 잔인한 부분들이 많이 있다. <존 말코비치 되기>라는 영화도 베케트가 어떤 작가인지 상당히 많이 느낄 수 있는 영화 중 하나이다. 흥분하면서 본 기억이 난다. 


책은 이인성 작가의 <낯선 시간 속으로>라는 책이 같은 주체에 대한 문제와 비슷한 문체를 갖고 있다. 최근의 한유주라는 젊은 작가가 문체와 동일한 주제를 제기해주는 것을 봤다. 영화가 조금 더 접근하기 쉬울 것 같다. 그리고 또 하나는 성경이다. 그는 어머니에 대한 애정이 깊은 작가인데 정신적으로 심각하게 힘들어했어다. 이 베케트가 하나님을 믿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성경을 곁에 두고 많이 인용하고 있다. 베케트의 구조 자체가 성경의 구조와 비슷하다. 이쪽 내용과 저쪽 내용이 다르고 회오리처럼 읽어야 가능한 구조인데 베케트도 구심점을 통해서 데칼코마니처럼 이렇게 돌아가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많은 경우 거울 효과 같은 느낌을 많이 받는다. 그런 것들을 염두에 두고 베케트와의 연관 관계를 탐구하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임: 나열하자면 너무나 많다. 베케트의 문학적 출발점은 베케트의 멘토이면서 스승이기도 한 친구이자 한세대 앞선 선배이기도 한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과 프루스트의 소설도 역시 베케트의 어떤 문학적 출발점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 같다. 모더니즘의 대가라고 할 수 있는 작가들의 작품이다. 이인성 작가님의 소설은 나 역시도 생각했다. 베케트 전공자라면 이런 식의 글쓰기는 베케트적이다라고 간파할 것이다. 그리고 <베케트에 대하여>는 베케트에 대한 철학적 접근이라서 어렵지만 그의 사상적 흐름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Q&A


Q1: 선택에 대하여 관심이 많은데 중의적 의미가 있을 때 어떤 식으로 선택하셨는지 궁금하다. 두 가지 의미 중에서 한쪽을 선택하기 위하여 어떻게 고민을 하셨는지, 어떤 문맥에서 의미를 찾는지 궁금하다. 그리고 선집 구성의 기준이 있는지 궁금하다. 


전: 예컨대 하나의 예를 들어 보겠다. '비엔'이라는 단어가 있다. '비엔'이 가질 수 있는 이 단어가 부사일 수도, 형용사 혹은 명사일 수도 있다. '비엔'이 가지고 있는 단어 뜻은 '유용하다', '쓸모 있다'와 '행복'이라는 것, '재산', '이득' 등등이 있다. 그런데 베케트는 그것을 중의적으로 말장난을 친다. "나는 네가 비앤 했으면 좋겠다"라고, 그 의미를 어떻게 정해서 쓸 것인가 상의를 많이 했다. 결국은 이것은 원어로 남기고 주석을 달아줬으면 좋겠다고 제안하였다. 왜냐하면 인물이 계속해서 어떤 '비엔'이냐고 물어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앉은뱅이'라는 말은 두 단어로 연결된 단어이다. '앉은뱅이'라는 말은 어떤 방석을 놓고 두 손으로 움직였던 모양을 가리켰던 모양이다. 그래서 방석이라는 뜻도 해당되고, 또 하나는 엉덩이라는 단어가 합쳐져서 앉은뱅이가 탄생된 것이다. 그런데 베케트는 이 합성어를 따로 떼어서 하나씩 이야기를 하고 있다. 어쩔 수 없이 앉은뱅이는 앉은뱅이대로  놓아두고, 거기에 나와 있는 사발 그리고 엉덩이 부분을 그대로 번역해 주면서 각주를 달 수밖에 없었다. 중의적 의미는 대부분 각주가 달릴 수밖에 없었고, 작품 안에서는 평면적으로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 만들어진 의미보다는 최대한 합성어를 구성하는 각각의 단어를 그대로 번역에 반영한 경우가 많다. 


편: 베케트 선집의 기준은 지금은 꽤 애매모호해져서, 지금은 절제할 수 없는 상황에서 계속 추진하고 있다. 원래는 선집이 아니라 '제안들'이라는 총서를 4년 전에 기획할 때, <꼬망쎄>라는 작품이 있었다. 아직 번역은 안 됐지만. '제안들'에 포함을 시키고 싶어서 그것을 무턱대고 계약을 했다. 그런데 보다 보니까 국내에는 특히,  베케트의 소설 번역이 제대로 안 되어 있더라. 내가 봤을 때는 그의 소설이 중요하다고 느껴졌고, 나 스스로가 궁금하여 전승화 선생님과 번역 계약을 하면서 이야기를 많이 나누다가 '안 되겠다. 선집으로 꾸려야겠다'라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지금보다도 리스트가 적었다. 당시에는 후기작 위주로, 멋있는 타이틀을 중심으로 골랐다. <꼬망쎄>를 기준으로 보다가 점점 베케트에 빠져들게 됐고, 결국 영화권까지 손을 대게 되었다. 지금은 덩치가 많이 커져서 4권 정도 계약을 더 하게 됐고, 계속해서 늘려가는 상황이다. 처음에는 소설 선집으로 시작했지만, 그의 시, 평론을 포함해서, 후기 극작품들은 넘어가기 아까운 작품들이 꽤 있었다. 다 못하더라도 2-3권은 내고 싶었고, 주요 작품들은 이 두 분이 해주셔야 하는 상황이라서 순차적으로 번역을 해야 하기 때문에 상당한 시간이 예상된다.  


Q2: 공간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텍스트가 어려워서 공간을 머리 속에 그리려고 노력하면서 읽었다. 임 선생님은 어린 시절 본 그의 연극이 시각적으로 어떠했는지, 혹은 그 연극에 관한 기억들이 있다면 공유해달라. 최근에 본 베케트 연극이 있다면 어떤 느낌이었는지 궁금하다.


임: 어렸을 때 본 연극은 개인적인 에피소드이고 그렇게 중요한 것 같지 않다. 남아 있는 부분도 별로 없고 서늘한 기억뿐이다.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나. 오지도 않는 고도를 사람들은 왜 기다리고 있는가'라는 단편적인 기억들 뿐이다. 


지금 말씀하신 대로, 이 단편집들은 공간적인 상상력을 굉장히 많이 요구한다. 특히 <죽은 상상력>이라든가 <소멸자>는 어디 논문을 하나 냈을 정도이다. 나도 바로 그 고민을 했기 때문에 원통 속의 공간을 그림으로 표현하여 첨부한 적도 있다. 공간이 상상되지 않고서는 이 작품들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나도 사실 죽은 공감이 밀폐적이고 수학적이라서 정확성에 대한 편집증적인 것이 있다. 어떤 한치의 오류가 있어서도 안 되고 몇 미터의 공간의 어떤 포즈로 있어야 하는 것처럼. 그것 자체가 기하학적인 이미지이고 베케트의 단편 중에는 닫힌 곳에 있는 주체의 상황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도저히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인데 머리는 죽었고, 상상력도 죽었고, 그렇지만 말은 해야 하고, 숨이라도 쉬어야 하고, 안 그러면 소멸하니까. 베케트는 거기에다가 아주 작은 빛처럼, 완전한 어둠, 완전한 부동성, 완전한 침묵은 없는 것 같다. 상황은 주어지지만 거기서 뭔가 쿵이라는 소리도 나고 희미한 빛이라도 나고, 가만히 있는 것 같지만 미동하고 있고 , 주체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것 같다. 이것은 베케트와의 상황과도 관련이 있을 것 같다. 앞에서 베케트의 고통에 대해서 이야기가 나왔지만 말년으로 갈수록 미동성이 줄어들고, 많이 힘들어했다. 제한된 공간에서 바라본 세상은 거의 소멸되어 가는 빛이고 그 직전의 어떤 소리들... 이런 것을 보여주고자 한 것 같다.


다른 연극의 아쉬운 점은 베케트의 연극이 <고도를 기다리며>에만 주로 한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편집장님께 단막극을 낼 계획이라고 하여 반가웠다. 실은 연극도 계약하라고 부탁드렸다. 그의 후기 단막극들이야말로 정수라고 생각한다. 공간적으로 밀폐된 닫힌 공간이고, 그렇지 않더라도 인물이 거의 움직이지 않으며, 무대가 주는 이미지가 있기 때문이다. 빛과 소리가 어우러져서 베케트만의 진액(정수)을 볼 수 있는 것이 후기 단막극이라고 생각한다.






* 본 강연은 2016년 8월 26일 북소사이어티와 워크룸프레스가 마련한 독자와의 만남을 재구성한 것입니다.  

* 녹음 및 상황으로 인하여 완벽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수정할 내용이 있다면 언제든 문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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