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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개인단상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아파트

#개인단상01 : 안녕, 둔촌 주공 아파트 오픈 하우스를 다녀와서

by 사유

<안녕, 둔촌 주공 아파트>가 재 인쇄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재개발되기 전, 철거를 눈 앞에 두고 있는 둔촌 주공 아파트에서 실제 태어나 자라 왔던 필자는 그동안의 기억과 추억을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서 <안녕, 둔촌 주공 아파트>를 만들기 시작했고, 현재 3호까지 발행된 상황이다. 책의 형태로 그 기록을 남기고 만들어온 이야기를 듣기 위해 호기심 반의 마음으로 지난 오픈 하우스를 다녀왔다. 불금의 늦은 밤까지 이어졌던 필자의 이야기와 곧 함께 참여하게 될 새로운 필자들의 이야기가 이어졌던 시간 속에서 다소 스스로도 잊고 살았던 기억들과 생각들이 떠나지 않아 곰곰이 나의 이야기를 돌이켜 생각해 보았다.


나의 고향은 어디인가?


최근 종영한 '응답하라 1988'를 기대 없이 봤던 나는 생각지도 못한 인상에 크게 당황했다. 서울에서 태어나 30년 넘게 살고 있던 나에게 "너의 고향이 어디인가"를 스스로에게 물었봤던 것이다. 그 대답은 드라마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내가 태어나고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고향은 바로 '골목길'이었다. 좁고 작은 골목길을 사이로, 마주 보고 서 있는 2층짜리 단층 주택을 오고 가며 동네 친구들을 사귀고, 언니 오빠들과 고무줄놀이, 돈가스 놀이, 여우야 여우야 뭐하니부터 우리 집에 왜 왔니 왜 왔니 왜 왔니를 우렁차게 외쳤던 그곳이야말로 나의 유년기 전부를 바쳤으며,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게 남아 있는 고향 아닌 고향이었던 것이다. 심지어 나에게도 고향이 있었다는 사실에 크게 놀랐던 것은 어찌 보면 서글프기도 하다. 그곳을 고향으로 생각해 본 적도 없었고, 고향이라고 인정하고 싶지도 않았고, 그래서 어른이 된 지금까지도 그때의 기억을 정답게 늘어놓아 본 적도 없었다. 왜냐하면, 서울은 특히, 골목길은 고향이라고 부를 수 없는 비루한 곳이라는 정서가 있었고, 물어봐 준 사람들조차도 서울보다는 부모님의 고향을 다시 물어보는 경우가 많았다. 나는 짐짓 다 안다는 식으로 어디서 태어났냐고 물어보면, 되려 부모님 고향을 먼저 대답해줬던 것이다.


그렇다면 나에게 아파트란?


초등학교 2학년이 되어 처음으로 아파트로 이사를 갔다. 고향이 골목길이었다면, 아파트란 곳은 나의 사춘기를 온전히 보냈던 공간이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등하교하며 놀고먹고 자고 공부했던 곳. 그 뒤로 아파트가 아닌 곳으로 이사를 가고 나서는 보이지 않는 계급을 만들어낸 장소로 나에게는 넌덜머리가 나는 주거 형태가 되고 말았다. "어디 살아?"라는 단순한 질문에도 움츠려 들게 만드는 곳. 아파트가 아닌 곳에서 살면 어쩐지 서울에서는 살기 어려울 것 같은 느낌. 어느새 서울은 아파트가 아니면 살기 불편한 곳이 되어버렸고, 결혼을 시작으로 노년까지 한 마음 한 뜻으로 아파트를 원하고 갈망하는 풍조가 어색하다. 층수는 높아지고 그야말로 개성 없는 시멘트 건물, 멀리서 바라보면 왜 아파트를 닭장이라 부르는지 알 수 있다. 사람들을 같은 층에 밀어 넣고 같은 삶과 비슷한 인생을 강요하는 것 같아 반감마저 생긴다. 나는 앞으로 아파트가 아닌 곳에서 살고 싶다는 비장한 각오 아닌 희망을 품게 된다.


아파트에도 초록은 살아 있다


그러나 <안녕, 둔촌 주공 아파트>의 오픈하우스를 다녀오고, 뒤통수를 맞은 듯 강렬한 의견에 다시 한번 놀라고 말았다. "우리한테는 아파트가 고향이다. 여기서 태어났고, 자랐으며, 아파트가 회색 콘크리트 건물만은 아니다. 이 곳에도 나무가 있고, 놀이터도 있고, 아름다운 풍경과 계절이 스쳐 지나가는 곳이다. 그렇기 때문에 허물어 없어지기 전에 기록으로 남기고 책으로 만들어 보존하고 싶었다."


누군가에게는 아파트가 고향이라는 것, 생각지도 못한 사실에 비슷한 나이 임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세대가 나타난 것처럼 놀라웠다. 왜 아파트를 부정적인 곳이라고만 생각하는가. 그 공간 안에도 아름다운 삶의 한 단편 단편들이 수놓아 있다는 것을 평소에는 인식하지 못하고 살고 있던 것은 아닌가. 고향을 부정하는 일은 개인에게 있어서도 뿌리를 인정하지 않는 것만큼 슬픈 일도 없다. 오픈하우스를 통해 책이 만들어지는 과정도 궁금했지만, 책을 만들게 된 계기가 나에게는 더욱 큰 사건처럼 놀라웠다. 잊고 살았던 고향에 대한 기억과 동시에 아파트가 나에게 갖는 일차원적인 질문이 아닌 이차원적, 삼차원적, 다차원적인 가치가 어디에 있는지를 물어봐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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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번 물어본다. 나에게 아파트란?


지금도 아파트는 선호하는 주거 형태는 아니다. 하지만, 둔촌주공아파트처럼 오래된 아파트가 허물어 사라진다는 사실은 꽤 마음이 쓰리다. 최근 가족을 따라 이사 간 곳과 멀지 않은 곳에 고덕주공아파트가 재개발에 앞서 건물을 부수고 나무가 베어지고 있는 상황을 실시간으로 목격하고 있다. 5층 아파트 곳곳에는 그보다 훨씬 높게 자란 아름드리나무들이 심어 있었다. 작년 가을에는 마치 숲처럼 웅장하고 장엄한 나무들을 넋을 놓고 쳐다보기 바빴고, 볼 수록 행복했다. 매일을 하루처럼 날씨가 좋을 때는 걷고 또 걸으면서 이렇게 서울에도 나무들이 많구나, 행복감에 젖어 바라보며 감탄했다. 아파트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아파트 주변의 가로수길과 그 단지 내의 숲처럼 울창한 나무들은 좋아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에서 자란 나에게 시골의 흙먼지 자욱한 흙 길과 산의 나무를 연상하기보다는 아파트 사이사이 잘 정돈된 길을 가로수 따라 걷고, 그 사이로 드문드문 보이는 아파트 네모난 풍경들이 늘 익숙해져 있었다.


조만간 <안녕, 둔촌주공아파트> 4호부터 새로운 콜라보레이션 작업과 함께 만나볼 수 있다고 한다. 곧 벚꽃 피는 봄이 더욱 짙어지면 연락 한통 올 것이다. "우리 아파트 벚꽃 보러 놀러 오지 않을래?"



아파트 벚꽃.jpg 지역주민이 직접 촬영한 둔춘주공아파트와 벚꽃


여의도도 어린이 대공원도 지방 어느 소도시도 아닌 아파트 단지에 팝콘처럼 새 하얗게 만개할 벚꽃 놀이하기 최적의 장소는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 단지이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아파트. 재개발이라는 이름 아래 사라져버릴 그 아파트의 기억은 소중한 추억으로 남겨질 것이다.





*이미지 출처: 안녕, 둔촌주공아파트 공식 페이스북 (https://www.facebook.com/hibyeDCA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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