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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유민 Feb 23. 2020

<환상수첩>과 <무진기행> 속 우리

60년대 감수성과 2020년 현대의 우리, 그 사이엔 무엇이 공존할까

2019-2학기 국어국문학과 현대문학사 수업,

가장 좋아하는 천정환 선생님의 수업과제, 꽤 마음에 들었던 글

총장의 선진학기제 정책에 매우 반대하며 많은 기사들을 내고 있던 참이었다.

그리고 내게 연대는 오직 언론3사 보도국 사람들뿐 이었다.

학우들은 불평을 할 뿐, 나서서 도와주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심지어 공청회를 세번이나 개최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저 그들의 안위가 우선이었고, 그들이 챙겨야할 현실속 그들의 삶이 우선이었다.

행정고시생, 교직이수생, 군입대생, 많은 학우들의 불편을 알고서도 그렇게 그들은 살았다.

2학기, 나의 분노가 극에 치달았을때 읽었던 책이다.

김승옥의 소설 <환상수첩>과 <무진기행>을 읽고난 내 감상



60년대 감수성

     

    「환상수첩」과 「무진기행」이 쓰인 1960년대는 자유의 상한선을 보여준 4·19 혁명과 그것의 좌절을 의미하는 5.16 군사쿠데타가 연속적으로 발생한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4·19혁명은 8·15 광복이나 6.25 전쟁처럼 역사의 밖에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내부로부터 형성된 사건이었다. 역사적 상황에 수동적일 수밖에 없었던 세대가 자발적인 투쟁을 통해 자율성을 확보한 최초의 사건이었다. 그러나 혁명으로부터 열린 자유의 가능성은 쿠데타에 의해 폭력적으로 닫혀버렸고, 쿠데타 세력은 자본주의적 근대화를 감행했다. 그리고 이러한 혼란 가득한 현실은 윤리적 무정부 상태에서의 개인들을 만들어냈다. 이 두 소설을 집필한 작가는 1960년대 이 소설을 썼고, 그 속에서 ‘60년대 감수성’이 그대로 드러난다. 김승옥은 언젠가 “60년대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내가 써낸 소설들은 한낱 지독한 염세주의자의 기괴한 독백일 수밖에 없으며 60년대라는 조명을 받음으로써 비로소 소설들은 일상적인 모습을 동작하는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작가의 현실 인식과 자기인식은 이러한 60년대 상황 속에서 가능했던 것이고, 대부분 시대적 배경을 투과한 소설인 것이다. 김승옥 소설의 주 공간적 배경이 되는 곳은 1960, 70년대 서울이고 이 서울에서 펼쳐지는 위선적인 도회의 어법과 등장 인물 간의 관계는 공동체적 유대와 소통이 불가능해진 시대를 상징한다.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개인주의적인 도회의 삶을 그려내며, ‘감수성의 혁명’이라는 화려한 수식어로 ‘60년대 문학’이라는 포문을 열어젖혔으며 그것은 그 이전, 이른바 ‘전후 소설’이라는 것과는 상당히 다른 새로운 세계였다. 김승옥은 소년기에 6.25를 체험하고 청년기에 4.19를 겪은 세대의 감각을 보여주는 데 있어서 분명한 ‘자기 세계’를 가진 작가이다. 이 영향인지 김승옥 작품의 주체들에게는 ‘60년대 감수성’이라 명명되었던 실존주의적 감수성이 동시대적 감수성으로 표면화되었다. 1960년대 세대 담론의 자장 속에서 4.19의 주체들, 특히 대학생에 한정된 논의들은 전후 세대 이후의 새 세대의 주역으로 대두된 동시에, 세대의 자리에 부여된 상징적 질서와 규범에 대한 억압을 동시에 껴안고 있는 다중의 구조를 지니고 있었다. 「환상수첩」과 「무진기행」 모두 이를 잘 드러낸다.

     

「환상수첩」과 「무진기행」

     

    1962년 집필한 「환상수첩」 정우가 자살하기 전에 기록한 수기의 앞뒤에 그것을 논평하는 수영의 말이 실려있는 액자식 소설이다. 정우는 대학 생활을 향유하다가 하향하기로 결심한다. 고향으로 하향하기 전 정우는 선애와 사랑을 나눴지만 이내 영빈이라는 친구에게 그녀를 인계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선애는 자살했다. 서울을 더 이상 견뎌내기 어려웠던 정우는 고향으로 내려가는 기차에 오르며 지난 시절을 회상한다. 고향에 내려온 정우는 극과 극에 있는 형기와 수영을 만난다. 형기는 각시로 불릴 만큼 약한 남성이었지만 부모를 여의고 화상까지 입고 시각장애인이 되어 삶을 살아갔고, 수영은 투병 중이었지만 약을 사기 위해 춘화를 그리기까지 한다. 윤수는 시를 쓰는 친구로 그 중도에 있지만, 영빈과 비슷한 구석을 그에게서도 본다. 삶의 허무감이 심화되 던 중 남해여행을 윤수와 떠나게 된다. 우연히 곡마단의 공연 여행에 동참하게 되고 윤수는 단원이었던 미아와 결혼 약속을 하게 된다. 남해에서 돌아온 윤수와 ‘나’는 오랜만에 수영을 찾아가는데 그곳에서 수영의 여동생이 강간당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윤수는 깡패들을 찾아갔다가 어이없이 맞아 죽게 되고 윤수의 급작스러운 죽음 이후 정우도 자살하게 된다. 수영은 지향하는 삶의 가치가 그저 정우와 달랐다면서 소설은 끝난다.


    그 후로부터 2년 후 1964년에 집필한 「무진기행」은 아내의 권유로 도시에서 고향인 무진으로 떠난 윤희중의 2박 3일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무진에서 ‘나’인 윤희중은 젊은 날의 추억이 있는 무진으로 간다. 짙은 안개는 무진의 명물이었고, 과거에도 무언가 새 출발이 필요할 때면 무진으로 오긴 했으나, 왠지 찝찝했다. 무진에 온 날 밤, 중학 교사로 있는 후배 ‘박’과 그곳 세무과장이 된 중학 동창 ‘조’를 만나며 하인숙이라는 음악 선생을 소개받는다. 대학 졸업 음악회 때 ‘나비부인’의 아리아 ‘어떤 개인 날’을 불렀다는 그녀는 술자리에서 청승맞게 유행가를 부르고, 둘만이 함께 있을 때 무진에서 자신을 구원해 줄 것을 윤희중에게 얘기하고, 윤희중은 그녀에게서 과거의 자신을 찾는다. 하인숙과 정사를 갖고 난 뒤, 다음 날 아침 아내에게서 온 전보를 받는다. 하인숙에게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해, 메모로 남기려 했으나, 그것을 두세 번 읽은 후엔 찢고, 서울로 떠난다. 그리고는 부끄러운 감정이 드는 윤희중을 보여준다. 「환상수첩」이 격한 자기인식과 감정서술이었다면, 「무진기행」은 조금 더 잔잔하게 부끄러움의 서술을 보여준다.


    이 두 소설 모두 일상생활의 거부와 편입 사이에서 갈등하며 현실의 모순과 자기 성찰을 한다. 또한, 두 소설의 주인공 모두 산업화시대의 인간 소외를 경험하며 타자와 윤리의 문제에 대해 다루고 있다.

     

현실의 모순과 자기 성찰

     

    먼저 현실의 모순과 자기 성찰에 대한 김승옥의 두 소설 속 이야기를 살펴보려 한다. 서울에 상경한 지방 출신   남성의 서울 적응기가 이 소설들의 핵심이 된다. 현실의 모순은 상경해온 서울에서 지쳐 고향으로 내려가는 주인공들이 다시 고향에서도 안정감을 찾지 못하고 썩었다고 생각한 일상과 고향이 다를 바 없다고 느끼는 부분에서 찾을 수 있으며 그 속에서 주인공들은 자기 성찰을 하게 되는 것이다.

김승옥 작가의 살아온 이야기는 이와 매우 밀접하게 관련 있다. 청춘들의 서울 적응 고투기 이면에는 고향에서 기대받았던 학창시절이 함축되어 있다. 지방 출신의 김승옥 역시 50년대 후반부터 생겨난 일류 중고와 일류대의 바람 속에서 십 대를 보냈다. 게다가 일찌감치 아버지를 잃고 어렵게 생계를 꾸려나가는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촉망받는 장남이었던 김승옥은 일류대 진학을 열망하여야 했다. 더불어 자연히 서울대학교 진학과 이후의 삶에 대한 기대와 환상은 커질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서울대학교 입성에 성공한 후 보장된 미래가 있는 환상의 동산에 발을 들여놓은 셈이란 기대하고 있었으나 실제는 달랐다. 대학에 입학할 무렵 급격하게 가세가 기울고 한껏 기대를 안고 상경한 서울에서의 생활이 곤궁해지기 시작하자 김승옥은 가난을 뼈저리게 실감하게 되었다.


    이런 작가의 체험은 창작에 녹아들어 김승옥의 소설은 대학생이 되어 서울로 올라온 시골 출신 젊은이들의 고투기가 주종을 이루게 된다. 60년대적인 문제가 가장 첨예하게 중첩된 서울에서 이제 그들은 자기가 거처해 오던 고향과는 너무도 다른 질서를 체득해야 하는 현실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들에게 ‘서울대학’과 ‘세상’은 동일한 질감으로 다가왔다. 소설 속 등장인물은 이에 대해 부적응자의 양상을 띠었고 이는 작가의 경험과 동일시 된다.


「환상수첩」은 주인공 정우가 서울을 떠나는 것부터 시작된다. 청운의 꿈을 품고 상경했던 서울행에서 깨달은 것은 “환상과 현실과의 거리감”이었다.

     

“그해 가을도 깊었을 때, 나는 마침내 하향해 버리기로 결심했다. 더 견디어내기 어려운 서울이었다. 남쪽으로, 고향이 있는 남해안으로 가면 새로운 생존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로써였다. 서울에서 나는 너무나 욕된 생활 속을 좌충우돌하고 있었다. 그리고 슬프게 미쳐버렸다고나 할까, 환상과 현실과의 거리조차 잊어버려서 아무것도 구별해낼수가 없게 되었고 사람을 미워하는 법을 배우고 말았다. 아아, 그들을 죽이든지 그렇지 않으면 내가 떠나든지 해야 했다.”

     

    고향으로 떠난다고 해도 삶에 대한 고민이 근본적으로 해소되지 않은 채 그저 외면하러 떠나는 것이었다. 따라서 고향으로 낙향한다 해도 문제는 현재 진행형일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환상과 현실과의 거리는 여전히 유지된 채 고향에서도 정우를 괴롭힌다.

 

    순수 문학 청년이었던 윤수마저 정우가 구역질 내 하며 피해온 영빈의 또 다른 환영이며 “각시” 형기는 이제 고아에 실명한 비관론자가 되어버렸다. “폐병 환자” 수영은 윤수의 표현을 빌자면 “죽여버리고 싶”을 정도로 위악적으로 살아가고 있다. “조화된 고향”을 찾아 내려왔지만 이미 고향에서마저도 그 ‘조화’가 상실된 이상 아무런 위로가 되지 않는다. 자기 기준을 갖는다면 고통스러운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는 의무가 뒤따른다. 안정감을 찾아 떠나온 고향에서조차 도시의 일상세계 속 사람들과 비슷한 양상을 보이고, 그에게 어떠한 안정감을 주지 못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정우의 ‘자살’로 까지 귀결되며 어느 곳으로 가도 고통스러운 현실을 마주하는 이 모순적인 상황을 더 강조한다.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작가의 생각이 투영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현실의 모순성과 순환의 논리는 무진기행에서도 똑같이 재현된다.


    「무진기행」에서 ‘나’는 차선의 사랑으로 선택했던 아내와의 삶에서 잠시 떠나, 무진을 반강제적으로 가게 된다. 이러한 ‘귀향’은 처음에는 자신의 온전한 선택이 아니었지만, ‘귀향’을 떠나고 나서는 ‘나’에게는 잠깐의 행복감을 선사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현실의 삶에서 벗어나 진정한 삶을 찾아 나가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하인숙이라는 음악대학을 나온 여성이 그저 자신의 친구인 조 씨와의 술자리에서 가요를 부르고 있는 것을 보고 왜 그랬냐고 대화를 나누며 정을 나눈다. 왠지 그는 고향에 돌아와서 사랑하는 사람을 찾은 것 같았고, 아내가 있음에도 정사를 치른다. 그리고 새벽녘에 누웠을 때는 불안해한다.

     

“문득 한적이 그리울 때도 나는 무진을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럴 때의 무진은 내가 관념 속에서 그리고 있는 어느 아늑한 장소일 뿐이지 거기엔 사람들이 살고 있지 않았다. 무진이라고 하면 그것에의 연상은 아무래도 어둡던 나의 청년이었다.”

     

    그리고 처음 출발할 때부터 그는 이런 불안한 감정을 무진에서 느낄 거라고 암시하는 듯 말하고 있다. 이는 어디에도 그의 진정한 고향은 존재하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고향으로 되돌아가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여성과 정사를 나눠도, 아내가 있기에 이는 일차적으로 모순적이다. 또한, 현실의 상황을 염두하며 불안해하는 그의 모습은 현실과 이에서 도피한 고향, 그 어딜가도 고통스러운 현실을 마주하는 「환상수첩」 속 정우와 별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

     

“‘그리고 서울에서 준비가 도는 대로 소식 들리면 당신은 무진을 떠나서 제게 와주십시오. 우리는 아마 행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쓰고 나서 나는 그 편지를 읽어봤다. 또 한번 읽어봤다. 그리고 찢어버렸다. 덜컹거리며 달리는 버스 속에 앉아서 나는 어디쯤에선가 길가에 세워진 하얀 팻말을 보았다. 거기에는 선명한 검은 글씨로 ‘당신은 무진읍을 떠나고 있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라고 씌어 있었다. 나는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무진에 내려와 있음에도 아내의 전보를 받고 급히 서울로 다시 올라가야 했다.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하인숙을 위해 편지를 썼지만, 그는 자신의 상황과 행동에 부끄러움을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소설의 맨 마지막 구절은 위와 같이 끝났을지도 모른다.

 

    도피해온 고향은 진정한 고향으로서 존재하지 않았다. 고향을 찾는 일은 일상의 원리를 재확인하기 위한 절차였을 뿐이다. ‘쉼’이란 존재하지 않았으며 현실의 모순성을 체감할 뿐이었다. 이렇게 김승옥이 바라본 현실은 그 모순성을 체감하면서도 적응해야만 하는 억압 그 자체였다. 그리고 이런 현실의 원리는 그 어느 곳을 가도 똑같은 순환의 논리인 것이다. 그렇기에 이미 어느 곳에도 고향은 존재하지 않는다. 고향을 찾는 일은 이제 일상의 원리를 재확인하기 위한 절차일 뿐이다. 이런 논리는 「환상수첩」과 「무진기행」 모두를 강력하게 지배하고 있다. 지쳐 내려간 공간 속에서 현실의 모순을 깨달으며 자신을 성찰하게 되는 것이다.

     

타자와 윤리의식

     

    김승옥은 ‘생활’이 넘쳐나는 일상 속에서 ‘자기’의 문제를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짚어내고자 한다. 일상 속에서 고독할 수밖에 없는 개인의 모습을 보다 분명하게 드러냄으로써 폭넓은 시각으로 아울러 당대의 문제성을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그 밑바탕에는 타인과의 소통 의지, ‘사랑’을 매개로 한 공동체의 관계 모색에 대한 강렬한 열망이 흐르고 있다.

     

“어느 날, 나는 억지로 술을 잔뜩 마시고 그녀와 만나기로 한 장소에 가서 거의 부르짖듯이, “선애, 옛날로 돌아가줘. 추워서 덜덜 떨며 반장집에 찾아가던 그때의 용감한 선애로 돌아가줘. 난 아무 힘도 없는 놈이야. 내가 잘못했어.” 하고 주정 비슷하게 아예 자신 없는 권유를 했더니, “제가 뭐 어쨌어요?” 하며 그녀는 재미있다는 듯이 조용히 웃어 보였지만, 그러나 그녀는 그날 뼈에 사무친 얘기를 하는 것이었다.”

     

    「환상수첩」에서 선애가 임신할 뻔한 사건이 있었다. 정우는 위와 같이 사랑이 아니라 성욕이었다고 선애에게 얘기한다. 그 사건 이후 선애는 무기력해졌다. 어쩌면 죄책감을 느꼈을지도 모르는 정우는 그녀에게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가 달라고,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애원한다. 선애에게 성욕만 느꼈을 뿐이라고 말했지만, 정우는 사실 성욕이 아니라 사랑을 느꼈고 선애와의 인간적인 소통 의지가 있었다. 하지만 이 관계에서 정우는 부담을 느끼며 내려놓았고, 자신의 친구에게 선애를 인계했다. 결국, 선애는 자살했다. 그리고 지속해서 ‘사랑’을 매개로 한 소통을 하려 했던 정우는 자살하기 전까지 선애를 생각한다. ‘생활’이 넘쳐나는 일상 속에서 ‘자기’의 문제를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짚어내고자 했다.

     

“나는 다시 여자와 나란히 서서 걸었다. 나는 갑자기 이 여자와 친해진 것 같았다. 다리가 끝나는 바로 거기에서부터, 그 여자가 정말 무서워서 떠는 듯한 목소리로 내게 바래다주기를 청했던 바로 그때부터 나는 그 여자가 내 생애 속에 끼어든 것을 느꼈다. 내 모든 친구들처럼, 이제는 모른다고 할 수 없는 내가 그들을 훼손하기도 했지만 그러나 더욱 많이 그들이 나를 훼손시켰던 내 모든 친구들처럼.”

     

    「무진기행」에서 ‘나’는 무진으로 와서 ‘사랑’을 찾는다. 예전에 달아나버렸던 여자에 대한 것과 다른 사랑을 지금의 내 아내에게 하고 있고, 그 현실에서 벗어나 무진으로와서도 ‘사랑’을 찾는다. 하인숙이라는 여인과의 관계에서 ‘나’는 무진에서의 자기인식을 다시 하게 된다. ‘나’는 진정으로 무진에서 ‘사랑’을 매개로 한 공동체의 관계 모색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나는 <어떤 개인 날>의 그 이별을 생각하며 말했다. 흐린 날엔 사람들은 헤어지지 말기로 하자. 손을 내밀고 그 손을 잡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을 가까이 가까이 좀더 가까이 끌어당겨주기로 하자. 나는 그 여자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사랑한다’라는 그 국어의 어색함이 그렇게 말하고 싶은 나의 충동을 쫓아 버렸다.”

     

    위와 같이 얘기하며 무진에서 ‘나’는 하인숙을 진심으로 사랑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 상황 속에서 ‘나’는 다시 현실을 택하고 하인숙에게는 그 어떠한 ‘사랑한다’라는 직접적인 메시지는 전달할 수는 없었다. 그저 심한 부끄러움을 느끼며 떠날 뿐이었다. ‘사랑’을 매개로 한 공동체 속에서 관계를 맺으면서도, 결국은 일상 속에서 고독할 수 없는 개인의 모습을 강렬히 드러낸 부분이다.

 

    이러한 관계 맺기와 이해를 하며 타자와의 관계를 구축하려 하고 있으나, 두 소설에서 이는 모두 미흡하게 나타난다. 김승옥은 주체의 대상화에서 벗어나 타자에 대한 ‘의미’를 발견하는 책임의 ‘태도’로 나아가기 위해 동시대적 감정을 자신의 문학적 방법론으로서 전유하고 있다 볼 수 있다. 동시대적 감정이란 매개를 통해 타자에 대한 연민과 동정에 기반을 둔 관심을 촉발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타자를 향한 감정적 연대로부터 그 의미와 모색을 발견하려는 ‘소시민적인 태도’인 것이지 그것이 직접적인 ‘행동’과 ‘실천’이 되어 변화를 끌어내진 못했다.


    선애에게 감정적 연대를 보낸 「환상수첩」 속 정우는 그저 감정적인 공감인 ‘소시민적 태도’일 뿐 직접적인 ‘행동’과 ‘실천’이 되어 변화를 이끌진 못했다. 선애가 임신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겪고 이를 인지하고 공감해주고 있으나, 그에 대한 책임을 지고 선애에게 최선을 다하지는 못할망정 그 상황에서 도피해 버린다. 선애는 결국 죽었다. 선애가 죽은 이후에도 영빈이가 성희롱적인 발언을 할 때도 그는 그냥 웃을 뿐이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옷을 주워입고 아침밥도 먹지 않은 채 윤수가 와 있을 술집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형기가 거기에 있는 것이었다. 한 번도 데려오지 않았고, 그리고 할 수 있으면 술집에 형기에게는 알리고 싶지 않았었다”

     

    여성 혐오적인 사회의 분위기를 알고 있고 접대문화와 성매매 문화에 부끄러움을 느끼고 문제점 또한 인지하고 있다. 그래서 그가 애정을 갖고 있는 형기에게는 이런 사실들과 자신들의 행동을 보여주지 않으려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를 극복하려는 의지는 직접 드러나지 않는 것이다.

     

“유리창에 뿌옇게 서렸던 입김은 어느새 사라져버렸다. 나는 다시 입김을 내뿜어서 뿌옇게 만들었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거기에 ‘선애’라고 써보았다. ‘미안하다’라고도 써보았다. 미안하다니? 얼마나 무책임한 언어인가? 그렇다고 무엇이 책임 있는 말이고 무엇이 책임 없는 얘기인지도 구별할 수 없었다. 원수를 사랑하라. 그러면? 그렇다, 마땅히 사랑해야 할 사람을 사랑하는 데 등한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내 편과 원수를 구별할 수가 없었던 게 아닌가.”

     

    또한, 선애가 죽은 이후에도 선애를 향해 성적 농담을 일삼던 영빈이와 술을 마실 때는 어떤 행동도 보이지 못했다. 시간이 흐르고 자신이 하향할 때가 되었을 때 고향에 기차 안에서 미안하다고 생각하게 되었을 뿐인 것이다. 주체적인 행동은 보이지 않으면서도 계속해서 자기인식 할 때 선애와의 관계를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무진기행」에서도 이와 같은 현상은 비슷하게 나타난다.

     

“여선생은 거의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조금만 달싹거리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중략) 무엇이 저 아리아들로 길들여진 성대에서 유행가를 나오게 하고 있을까? (중략) 그 양식에는 머리를 풀어헤친 광녀의 냉소가 스며 있었고 무엇보다도 시체가 썩어가는 듯한 무진의 그 냄새가 스며 있었다. 그 여자의 노래가 끝나자 나는 의식적으로 바보 같은 웃음을 띠고 박수를 쳤고, 그리고 육감으로써랄까, 나는 후배인 박이 이 자리에서 떠나고 싶어하는 것을 알았다.”

     

    분명 ‘나’는 하인숙 혼자 여자인 술자리에서 성악을 전공한 그녀가 남성이 강요하는 노래를 부르는 것을 보고 공감하고, 감정적 연대를 속으로만 보낸다. 그는 이러한 여성에게 강제되는 분위기에 불편함을 느끼지만, ‘박’과 달리 그 자리를 떠나지조차 못한다. 그저 그냥 헛웃음을 띄면서 바라볼 뿐이다. 이를 극복하려는 행동은 보이지 않고 그저 감정적인 연대만 지속하는 것이다. 두 작품 모두에서 이러한 감정적 연대는 드러나나, 실천적인 행동 양식이 부재함에 있어서 이 작품들에서 연대의 한계가 드러난다.

     

그리고, 현재의 우리

     

    김승옥은 보통 60년대의 작가로 호명되지만 이러한 문제의식들은 결코 60년대에 박제될 수 없는 현재 진행형의 것들이다. 김승옥이 소설을 통해 보여주는 ‘진정한 삶’에 대한 갈망이 여전히 현재적일 수 밖에 없는 이유는 1960년대에 시작된 산업화의 위력에서 파생된 문제들이 현재까지도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가 존속하는 한 영원히 현재 진행형의 문제일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김승옥 문학의 의미는 60년대를 넘어서 현재를 사는 우리 안에 존속하는 문제적 화두로 볼 수 있다.


    산업화된 사회에서 김승옥이 서술했던 대학생들의 문제와 사람들의 문제점들은 지금 나, 그리고 내 주변 사람들에게도 지속된다. 사랑과 타인을 통한 공동체 속의 관계 맺기는 지속되고 있지만, 일상 속에서 현대인들은 회의를 느끼고, 현실의 모순을 찾는다. 김승옥의 소설은 타인과의 연대를 지향하면서도 그 속에서 회의를 느끼는 지금의 나와 우리, 그리고 대학생들의 삶을 뼈아프게 통찰한다. 서울로 올라와 등록금을 대출받고, 생활비를 벌며 악착같이 살아간다. 물론 일상 속에서의 모순을 느끼기도 한다. 학교의 학사제도 운영 중 성급한 학교의 학기제 선진화 발표가 이번 학기에 있었다. 갑자기 수업을 15주로 줄이고 여름방학 인턴을 확대하겠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부당하게 피해받는 복학생, 행시생, 교생실습 준비 학생들을 보며 함께 분노했다. 나에게 직접적으로 오는 피해는 아니었지만, 그들이 받는 피해에 공감했기 때문이다. 감정의 연대에서 조금 더 나아가 교내 방송국 기자로 활동하고 있는 나는 ‘오디오 방송’으로 총장의 정책과 학교 학사시스템의 문제점에 대해 파악하고 매일 방송했고, ‘영상뉴스’를 통해 생중계와 영상촬영을 막는 학교에 대해 문제점을 제기하기도 했다. 돌아온 건 같은 처지에 있는 학생들의 연대가 아닌, 담당 교수님의 걱정과 총장과의 간담회만이 마련될 뿐이었다.

 

     타인과의 연대를 기대했고, 그들에게 공감했지만, 다시 현실로 회귀할 뿐이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자본주의 사회 속 현실은 그냥 아주 큰 벽과 같은 것이었다. 공동체 속에서 친구들과 히히덕거리며 놀러 다니기도 하고 함께 학교생활을 즐기기도 한다. 하지만 부당한 일이 생겼을 때 타인과의 연대를 통해 현실을 조금이나마 바꾸고 싶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은 ‘자신의 안위’를 챙기기 바빴다. 소설 속 주인공들처럼 타인에게 공감하지만, 변화를 위해 ‘실천’하진 않았다. 그리고 결국 나는 일상 속에서 다시 회의를 느낄 뿐이었다. 타인과의 연대를 통해 현실을 조금이나마 바꾸고 싶었다. 하지만 진정한 연대는 우리 사회 속에서 찾을 수 없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은 이번 학기 내내 내 머릿속을 지배했다. 단지 아주 사소한 개인의 사례일 뿐이지만, 대학생들은 이와 같은 회의감을 비일비재하게 경험한다. 약 50년이 지난 지금에서도 김승옥이 50년 전에 지적했던 근본적인 문제점은 아직 해결되지 않은 것이다. 「환상수첩」 속 정우와, 「무진기행」 속 ‘나’는 2019년 현재 진행형으로 ‘우리’와 같은 사람들이 아닐까? 유려한 문체를 통해 감수성을 자극하면서도 등장인물들의 고뇌와 현실의 모순을 드러낸 이 소설들은 우리에게 아직도 바뀌지 않는 현실에 물음표를 던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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