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화. "감정의 중력"

단 한 번도 원하지 않았던 정체성

by 루치올라

힘들고,

지치고,

분노했던 무거운 마음도,

마음을 다루는 심리적 공간에서는

그 순간만큼은 ‘괜찮아졌다’고 느낀다.

가볍고, 다시 살아갈 수 있을 것 같고,

바로 내일은 좀 더 나아질 것 같은 예감.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기묘할 만큼 정밀하게

우리는 다시 익숙한 감정의 자리로 되돌아간다.

그건 마치 중력처럼 정확하고, 관성처럼 끈질기다.


사람은 감정에 ‘젖는다’고 말하지만, 실은 감정에 ‘끌려간다’.

의지가 아니라, 습관이 데려간다.

오랜 시간 반복된 감정은 내면에 중력을 만든다.

그리고 그 익숙함은 끝내 정체성이 된다.


슬픔이 너무 오래 머물면,

사람은 그 슬픔이 자신이라 믿기 시작한다.

‘이 고통이 사라지면 나는 누가 되는가?’라는 이상한 두려움이

우리를 스스로 상처의 감옥에 가둔다.


쇼펜하우어는 말했다.

인간은 자유롭지 않다.

단지 자신의 본성에 따라 움직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본성’이란,

사실 반복된 감정의 잔상일지도 모른다.

감정은 강해서가 아니라, 익숙해서.

습관이 되어버려서

그래서 더 무서운 것이다.


차에 기름만 넣는다고 달리지 않는다.

방향도, 정비도, 운전도 필요하다.

감정도 그렇다.

한 번 토해냈다고 해서, 한 번 울었다고 해서

다시는 끌려가지 않는 게 아니다.

감정은 중력이다.

끌어당기고, 묶고, 되돌린다.

관리하지 않으면, 우리는 다시 그 자리로 떨어진다.


그렇기에 중요한 건 감정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 감정을 의식의 중심에서 바라보는 힘,

곧, 나를 묶고 있던 줄을 자각하는 힘이다.

그 순간, 감정은 더 이상 ‘나’가 아니다.

그저 ‘내 안을 지나가는 존재’가 된다.


[Ataraxia, 아타락시아]

외부의 소란에도 무너지지 않는,

정신적 평온과 흔들림 없는 내면의 상태.


아타락시아는 멀리 있지 않았다.

세상 어딘가 있는 신기루도 아니었고,

타인이 만들어주는 것도, 도피처도 아니었다.

아타락시아는 자각하고 지각하는 그 순간

바로 느껴질 것이다.

멀지 않았던 거리를

그렇게 오래 찾아 헤매었었다.

아타락시아는

이미 내 마음 안에 있었다.

평온은 그렇게, 안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내면의 평온을 가진 사람은 세상의 소란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다.”

– 세네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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