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을 민폐라 부를 자격은 누구에게 있는가
[로드킬]
‘길 위의 죽음’을 이렇게 단 세 글자로 말해버린다.
하지만 그 길은, 누가 만든 것인가?
자연은 길을 만들지 않는다.
인간은 자신이 이동하기 쉽도록 땅을 가르고,
나무를 베고, 생명의 흐름을 끊는다.
그리고는 그 길에 등장한 생명을 ‘민폐’라 부른다.
고라니는 단지 살고 싶었을 뿐이다.
강가를 건너고, 숲에서 숲으로 이동하며
자신의 생명을 이어가고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그 중간에
‘인간이 만든 길’이 있었다.
우리는 편리를 위해 세운 도로 위에서
수천 마리의 고라니가 죽어가는 광경을 보며
그저 “또 로드킬이네”라고 말한다.
이 얼마나 기이한 무감각인가.
고라니는 아무 잘못이 없다.
그들은 생존했고,
우리는 침범했다.
인간은 모든 것을 자기중심으로 분류한다.
"사람에게 이로우면 ‘작물’이라 부르고, 해롭다면 ‘잡초’라 부른다.
기쁨을 주면 ‘반려’가 되고, 불편을 주면 ‘유해’가 된다.
기준은 존재가 아니라, 인간의 잣대다."
심지어 같은 종 안에서도
쓸모에 따라 등급을 나누고,
사람의 기준에 따라 ‘살 자격’조차 판단한다.
고라니는 그런 판단의 피해자다.
한국에서는 농작물에 해를 준다고 ‘유해동물’로 불리고,
연간 수만 마리가 도로 위에서 죽어나간다.
하지만 중국에서는 멸종위기종으로 지정되어 보호받는다.
같은 생명인데, 경계선 하나를 넘으면 운명이 달라진다.
인간은 말한다. “우리는 이 지구의 주인이다.” 마치 지구가 인간의 소유물인 양.
그러나 철학은 오래전부터 경고해 왔다.
“우리는 자연의 일부이지, 주인이 아니다.”
하이데거는 기술이 자연의 본질을 가리고 은폐한다고 말했다.
우리는 ‘도로’를 만들며 자연의 흐름을 끊고,
생명에게 ‘길’이 아니라 ‘덫’을 놓았다.
그리고는 그 생명을 '불편'이라 부른다.
생명은 위계가 없다.
고라니의 슬픔은, 인간의 슬픔과 다르지 않다.
다만, 말을 할 수 없을 뿐이다.
인간도 자기보다 강한 존재에게 위협받는다면 고통스럽고 슬플 것이다.
억울하고, 무력하고, 살아갈 자리를 빼앗겼다고 느낄 것이다.
그런데 왜,
인간과 같은 생명체에게
그 똑같은 고통을 아무렇지도 않게 주는가?
생명은 기능이 아니라 존재 자체로 존중받아야 한다.
우리가 고라니에게 준 고통은
우리 문명의 거울이다.
‘길’이 아니라,
‘경계’를 만든 문명의 민낯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묻자.
이 도로 위의 죽음은
정말 고라니의 잘못인가,
아니면 우리가 외면한 생명의 무게인가?
고라니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침묵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는 여기에 있었고, 너희가 잊은 세계에 속해 있었다.”
민폐는 그들이 아니라,
우리가 망각한 생명의 질서이자
깨뜨린 공존의 약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