층간 소음 갈등이 심각한 주거 문화
Nov객관 23. 2021
관리실 인터폰으로 '이웃에서 소란하다는 민원이 들어왔는데 확인 좀 부탁드립니다.'라는 연락이 왔다. 아뿔싸! 순간 마음이 철렁했다. 8살 5살 아이들과 함께 지낸다는 생각을 잠시 잊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 연말 해외에 사는 손주들이 방학을 맞아 집에 와 있었다. 한 달 동안이었지만 10일 동안은 자가 격리를 했다. 한창 뛰어 놀 시기에 방 안에 갇혀 지내는 일은 아이들에게 고역이다. 답답한 생활을 견디기가 어려워 안달이 났다. 더구나 스웨덴에서는 층간 소음 때문에 아이들 활동에 제약을 받아본 적이 전혀 없다.
스웨덴 주거 문화는 좀 다르다. 집을 지을 때 방온 설비가 방바닥에 설치하지 않고 실내에 따로 달려 있다. 층간 진동이나 소음을 차단하는 기능이 우리와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위층에서 뛰어도 밑에 층으로 소음이 전달되지 않는다. 아이들이 조금 뛰어도 그 소음이나 진동이 고스란히 전송되는 우리와 비교된다. 스톡홀름에서는 아이들이 기타를 치거나 피아노를 치어도 소음 걱정은 안 한다. 온 가족이 음향기기를 틀어놓고 마음껏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고 논다. 그런 아이들에게 '뒤꿈치를 들고 걸어 다녀야 한다'는 경고 따위는 귀에 익숙하게 들리지 않는다.
속사정이 어떻든 아이들이 뛰놀다 피해를 입힌 것은 잘못한 행위다. '아래층이 시끄럽다고 하니 조용히 놀아야 한다'는 가벼운 단속으로 그친 것을 후회했다. 아이들에게 정숙 보행을 확실히 일러줬어야 했다. 행여 아래층 사람들이 시끄러워하지 않을까 하면서 방심하고 있었던 찰나에. 3일이 지나서 두 번째 인터폰이 걸려왔을 땐 초긴장 상태가 됐다. 당혹스러운 심정에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느낌이었다. 노는데 정신이 팔려 아이의 행동을 보고도 방기한 죄에 양심이 찔려서다. 아이들 통제가 불가능하다는 말은 핑계다. 소란을 끼친 것에 대해 미안하기도 했지만, 손주들이 마음껏 놀지 못하게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평소 조용하던 위층에서 별안간 소란스럽다면 '모처럼 손주들이 놀러 왔는지 그런가'하면서 이해해 줄 수도 있지 않을까. 야속한 마음이 든 것이 속사정이었다. 하지만 두 번째 인터폰 소리가 경고음으로 들리는 순간 괜한 욕심을 부렸었구나 하고 깨우쳤다. 누군가에게 피해를 입힌 자신에 대한 실망과 미안함에 부끄러워 몸 둘 바를 몰랐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거나 미움을 사는 행위를 가장 싫어하던 나였기에 화가 나서 참기 힘든 정도였다. 그때 느낀 감정은 잊을 수가 없다. 지난 일을 사유하면서 글을 쓰게 된 계기로 삼은 까닭도 그 충격이 너무 컸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공동 주택 생활은 제약이 많다. 자유로운 주거 생활을 원한다면 공동 주거 문화에 적응하기가 매우 힘들다. 어쩔 수 없이 공동체 주거 문화를 선택했다면 주거 문화에 적응하기 위해서라도 자신의 마음가짐을 고쳐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집집마다 사적 공간에 자유로운 삶을 추구한다는 생각은 애초부터 포기하는 것이 현명하다는 생각이다. 벽으로 막혀 있는 답답한 틀 속에 갇혀 제약을 받고 사는 생활을 하면서 그런 환상을 갖는 자체가 환상이 아닐까 한다. 층층의 철망으로 만들어진 닭장 속에 갇혀 지내는 닭이 자신의 앞마당에서 유유자적 자유롭게 뛰어놀던 병아리 시절을 상상하면 속만 상한다.
그럼에도 공동 주택 수요는 지속적으로 늘고 있는 현실이다. 철근 콘크리트로 쌓은 구조물에 칸막이를 해놓고 고립을 자초한 이들이 모여 사는 곳을 선호하고 있다. 이웃끼리 서로 관심과 온정을 나누며 살던 삶이 눈치와 경계로 살아가는 메마른 주거 문화로 바뀐 것이나 다름없다. 어느 아파트 몇 평에 사는 것이 품격인 양 말하는 아파트 광고 문구가 주거 문화를 송두리째 바꿔 놓은 것이나 다름없다. 거대 건설 자본의 아파트 광고 문구에 현혹되어 화려한 빌딩 숲에 모여 사는 핑크빛 환상을 모두가 꿈꾸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들 때가 있다.
아파트 실효성이나 가성비를 대충 따져봐도 납득하기가 어렵다. 수도권이 아닌 아파트라 하더라도 평균 분양가는 2천만 원이 웃돈다. 터무니없이 비싼 분양가에 거품이 추가된 실거래는 천정부지로 치솟아 있다. 땅으로 환산해보면 대지에 대한 소유권은 미미한 수준이다. 개인 평균 2평 남짓한 비좁은 공간에서 사는 격이다. 면적에 비해 인구 밀도가 높은 국토라는 기존의 명분은 설득력이 없다. 택지 개발로 이익을 챙긴 사람은 따로 있음이 모두가 아는 비밀로 밝혀졌다. 평생 모은 돈을 주고도 사지 못할 가격으로 부풀려 이익을 챙긴 기득권 세력이 주범이 아닐까 한다.
위층에 사는 젊은 부부는 만나면 정월 초하루다. 시도 때도 모르고 짓궂게 노는 아이에 대한 미안함이 인사치레를 하는 표정에 남아있다. 손주들 또래 아이를 키우는 부모가 죄인 아닌 죄인처럼 행동하는 모습이 안쓰럽다. '아이가 뛰는 걸 이해합니다.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는 말을 건네도 그의 행동에는 변함이 없다. 그들에게도 속사정이 있었다. 전 입주자와 몇 번이나 싸웠다고 한다. 결국 아래층 사람이 견디다 못해 우리에게 팔고 이사를 떠난 것이다. 그런 그들에게 아파트 생활은 엄청난 트라우마를 갖게 된다. 층간 소음 문제를 사소한 이웃 간 시비 문제로 덮고 넘어 사안이 아닌 까닭이다.
층간 소음 분쟁이 해마다 늘고 있다. 국가소음정보센터는 21년 한 해 4만 6천 건 이상 층간 분쟁 사건이 접수된 것으로 발표했다. 통계로 접수되지 않은 여타 사건까지 포함한다면 훨씬 많은 사건이 발생되고 있다. 사건의 심각성은 위험하고 끔찍한 일로 번질 수 있다는 데 있다. 층간 소음으로 인한 사소한 시비와 갈등이 앙심이나 보복 행위로 이어져 흉악 범죄로 번지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소음 갈등으로 시작된 논쟁이 가정을 파괴하고 삶을 파멸시킨 사례가 적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층간 소음에 따른 주거 불안과 두려움 해소를 위한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까닭이다.
자신이 선택에 주거 환경에 적응하려면 자신의 이기적 욕구부터 양보할 수 있어야 한다. 서로에 대한 이해와 타협 없이는 함께 사는 것이 어렵다는 전제하에 시작돼야 한다. 층간 소음에 의한 갈등을 해소하는 최선의 길이 아닌가 싶다. 불안과 경계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고 편안한 주거 환경으로 바꾸기 위해 아량과 배려가 절실한 것이 아닐까 한다. 방음 매트를 깔아 아이들의 소음 발생 원인을 줄이려고 배려한다거나, 시끄럽게 구는 아이가 소중한 우리 가족이라고 여기는 넓은 아량을 베풀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 그럴 때 층간 불편이 줄고 쌓인 갈등을 풀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아량이나 배려는 너그러운 마음 내지 보살피고 도와주려는 마음 가짐이다. 살기 좋은 공동 주택에 필요한 절대 가치다. 올바른 공동 주택에 주거 문화 정착을 위해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미덕이고 삶의 지혜라는 생각이 든다. 다른 사람의 어떤 결함이나 잘못도 허용할 수 있을 만한 성품을 지닌 사람이라면 그보다 현명하고 행복한 사람도 없다. 인성으로서 아량이나 배려심을 휴대폰에 비유한다면, 휴대폰을 떨어 뜨리거나 물에 빠뜨리거나 분실을 했어도 무사함이 보장되는 휴대폰에 비유할 수 있지 않을까. 언젠가는 최고 효능을 갖춘 그런 휴대폰이 탄생될 수 있지 않을까.
불안한 주거 문화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실종된 아량과 배려심 때문에 이웃 간 삶이 버겁고 차갑게 느껴지는 것이 아닐까. 타인에 대한 냉소적인 태도와 무관심, 불편을 참지 못하는 현실이 느껴지는 것이 아닐까 한다. 평소 냉정하고 이성적 판단력을 지닌 멀쩡한 사람도 자제력을 잃고 흥분하게 되거나, 익명의 온라인 미디어에 숨어 막말이나 욕설을 퍼붓는 사람의 심리에는 원인이 있다. 자신의 상상이나 억측만 주장하며 생떼를 부리는 사람이나, 자신을 통하지 못하고 흥분하거나 행패를 부리는 정신 이상자가 보이는 행동도 똑같은 원인이 작용된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 만의 사유 공간을 보호받고 싶은 욕구가 있다. 누구한테도 침해당하고 싶지 않은 배타적 공간을 유지하고 싶은 본능을 갖고 있다. 하지만 현실 생활에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엘리베이터 안이나 대중교통을 탔을 때, 밀폐되고 밀집된 공간에서 처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흔하다. 닭장 속에 갇혀 살던 병아리가 겪는 스트레스를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자신의 의식 또는 무의식에 의해 참아낸 본능적 욕구는 언젠가 어떤 방식으로든 해소시키기 마련이다. 자신도 모르게 분노로 표출되거나 성품으로 나타나게 된다.
사회 현상으로 나타난 예가 궁중 심리다. 평소에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람일지라도 혈연이나 지연, 학연에 치우쳐 행동하는 원인이 궁중 심리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일체감이나 친밀감에 휩싸여 폭넓은 사고력을 잃고 대중적 무리에 기대는 심리라 할 수 있다. 기회가 생기면 난동을 부리거나 비이성적 감정 행위로 폭발하는 사람이나 공동체 삶을 파괴하는 흉악 범죄의 일탈도 여기에서 비롯된다. 질병의 원인을 알아야 쉽게 병도 고칠 수 있다. 우리 모두가 고슴도치 딜레마를 안고 산다는 사실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무리를 지어 더불어 사는 삶을 선호하는 듯하지만 사적 공간 침입에 대해 알레르기를 갖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누구나 심리적 방어기제가 내면에서 작동하고 있다. 자신이 받는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 스스로 자신을 속이거나 회피하려는 심리를 갖고 있다. 혈기나 용기를 갖고 객기를 부리는 행동을 하거나 공격적이고 비판적인 행위를 즐기는 사람은 그만큼 자신의 심리적 열등의식이 강함을 뜻하는 것이다. 자신의 심리적 불안을 우월감으로 잘못 해석하여 삐딱하고 까칠한 성격이 형성된 것이다. 방어기제가 잘못 사용되면 삶을 망가 뜨리게 되지만, 아량과 배려처럼 승화된다면 성숙한 인격체로 곱게 성장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