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회하지 않는 삶이 어려운 까닭
후회 없는 인생을 살 수 있을까? 정답이 있는 삶도 아니고 인생에 정해진 원칙도 없으니 그럴 수 없다는 생각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후회 없는 삶을 끊임없이 추구하려고 한다. 어떻게 살아야 후회 없이 사는 것인지를 놓고 끝없이 고민을 하고 산다. 한 번뿐인 인생이라는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인간 본연의 모습이 아닌가 한다. 자신의 삶이 일회용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어떻게든 자신의 인생이 헛되지 않게 살려는 욕망을 갖게 된다.
인생은 선택이라 말하지만 과연 그렇기만 한 것일까. 실제 살면서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될까. 별로 없는 것 같다. 흔히 말하는 상식이나 보편적 가치도 사회가 미리 정해 놓은 것이지, 개인이 마음대로 선택한 것은 아니다. 자신의 사고나 경험에 의해 인생이 달라진다는 말 자체에 어폐가 있다. 사회 구성원으로 살아가는 인생은 개인보다 시대와 사회 등 외부 환경에 주로 지배를 받는다. 개인의 선택에 의한 삶이라기보다는 자신이 처해진 공동체 운명에 따라 삶이 달라진다는 말이 적절하지 않을까 한다.
실제 우리가 사는 모습은 어떠한가. 자신이 좋아하고 원하는 삶을 살고 있다고 볼 수 없다. 남 눈치를 살펴 남들이 바라는 것을 나도 따라 하는 경향이 강하다. 다른 사람의 삶을 흉내 내며 사는 것이나 다름없다.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는 인생을 산다고 하지만 실은 현실 삶에서 낙오자가 되지 않으려고 애쓰는 삶이다. 공동체 삶에서 외톨이가 되지 않고 공생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삶이다. 무리를 지어 살아가야 하는 운명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나 만이 원하는 별도의 행복한 삶으로 착각하고 살고 있지 않나 싶다. 원래부터 기대할 수 없는 꿈을 찾으려 헤매는 격이다. 우리가 인생을 후회하게 되는 또 하나의 원인이 아닐까 한다.
링 위에 있는 선수는 링 밖 관중이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다. 때리고 얻어맞느라 정신없이 싸워야 하는데 관중이 눈에 들어올 리 없다. 현실을 사는 모습이 권투 선수나 다름없다. 터널을 통과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앞만 보고 달리는 경주마처럼 살고 있는 모습이다. 라운드 종료를 알리는 '땡' 소리가 울릴 때까지 싸우는 선수나 터널을 빠져나가면 또 다른 세계가 펼쳐질 것이라고 믿고 자동차를 모는 사람은 모습이 비슷하다. 치열한 경쟁 속에 사느라 좌우를 살피거나 앞뒤를 돌아볼 겨를이 없는 모습이다.
지금까지 내 삶이 그런 것 같다. 현직에서 은퇴할 때까지 삶이 딱 그런 느낌이 든다. 링을 벗어난 선수나 수많은 터널들을 지나 달려온 사람이 나 자신처럼 느껴진다. 나와 가족의 생존을 지켜야 한다는 일념 하나로 온갖 희로애락을 함께 겪으면서 살아온 삶이 내 인생의 전부라 할 수 있다. 열심히 공부하고 일하면 언젠가 잘 살게 될 거라는 막연한 꿈만 믿고 미친 듯이 달려온 것이다. 터널 속에 갇혀 있는 순간에 조금만 달리면 터널 끝이 보일 거라는 단순 기대에 목매어 핸들을 쥐고 페달만 열심히 밟았던 것이다.
터널을 빠져나와 그 기대나 꿈은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았다. 치열하게 달리는 경주마였기에 차안대로 가려진 관중 속의 삶을 잊었던 탓이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내가 원하는 방향만을 보고 달려온 것이다. 나이가 들어 생계의 짐을 내려놓고 보니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무심코 지나치던 지난날이 새삼스럽게 느껴지는 듯했다. 얻어맞아 아팠던 상처에서 통증이 느껴지기도 하고 아쉬운 후회와 연민의 정이 느껴지기도 했다. 돈과 일에 미처 살았던 지난 삶에 허탈한 기분이 들고 회한의 감정을 갖는 원인이 아닐까 싶다.
즉, 오늘이 선물임을 모르고 살아온 탓이다. 내 삶을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 '오늘'이다. 내 인생에서 가장 젊고 소중한 기회를 주는 오늘이다. 인생 최고의 값진 선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선물을 양보하는데 익숙하다. 해야 할 일을 하거나 돈을 버는 일에 오늘을 양보하면서 살기 일쑤다. 최고로 소중한 선물이 주는 값진 의미조차 깨닫지 못하고 사는 것이다. 오늘 선물을 오늘이 아닌 세월이 지난 후 풀어보는 때늦은 후회로 사는 것이다. 과거에는 미처 느끼거나 깨닫기 어려웠던 경험을 후회를 통해 되새기게 되는 근본 원인이 여기에 있지 않을까.
어린 시절 부모님과 살았던 시절을 돌아보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무지몽매하고 가난하게 살다가 떠난 부모님을 생각하면 애잔한 마음뿐이다. 고달픈 인생을 살다가는 것도 부족해서 투병만 하다가 생을 마감한 모습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진다. 그 당시엔 자식 된 노리를 다한다고 했지만 돌이켜보면 죄를 지은 기분이다. 제사를 모실 때 희한의 눈물로 맞이하는 것으로 괴로움을 씻어내고 있다. 서글프고 불쌍하게 생각되는 부모님 삶을 그나마 달래는 것이 속이 후련해지는 기분이 들고 괴로운 마음이 가라앉는 느낌이다.
부모님 세대들 뿐만 아니라 베이비 붐 세대들 삶도 크게 다를 바 없다. 60년대 한국은 절대 빈곤 사회였다. 전기불도 없이 어두운 등잔 밑에서 암울한 시절을 겪어야 했다. 어두운 터널에서 빠져나올 힘조차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거리에 깡통을 들고 다니는 아이들 모습을 영화가 아닌 현실에서 보고 자란 시절이다. 오죽하면 배고픈 고충을 덜기 위한 더부살이가 유행하던 시절이었겠는가. 식구 수를 줄이기 위해 어린 자식을 남의 집 머슴이나 식모로 보내야 했던 처절한 삶을 겪으며 살아야 했다.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비참했던 시절이다.
엄동설한에 2시간 넘게 걸어서 국민학교를 오갔다. 자전거조차 모르고 원시 문명 속에 살았기 때문에 어지간한 불편과 고통은 당연지사로 받아들이며 살았다. 굶주리지 않으려고 닥치는 대로 일을 했고, 제 집에 찾아온 동냥에게 미안한 마음이라도 보태 주었기에 생존할 수 있었다. 힘들고 어려운 시절을 경험했던 사람들이기에 강한 생활력과 온정미를 기본기로 갖춘 것도 사실이다. 생활력이 없으면 생존이 어렵고 상부상조하는 마음이 없었으면 삶을 지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끝을 알 수 없는 암울한 터널 속에서 순진무구하게 살았던 60년대 농경문화는 7~80년대 산업화 사회를 지나 90년대 이후 지식 정보화 사회를 거치면서 급변하기 시작했다. 잘 살아보자는 슬로건으로 무장했던 한국은 생존의 기회가 늘어나 70년대 가장 참혹했던 나라가 50년이 지난 지금 세계 최고 수준의 선진국으로 바뀌었다. 불과 50년 만에 이룩한 엄청난 변화다. 강산이 6번 바뀌는 동안 한 인간으로서 삶을 회상해보면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얼핏 보면 수백 년 세월이 흐른 것 같은 착각마저 든다.
꿈속조차 상상할 수 없는 모습이 현실이 된 것이다. 입에 풀칠하던 시절이 영양이 넘쳐 비만을 걱정하여 다이어트가 유행하는 사회가 됐다. 열악한 의식주 대신 모든 면에서 안락하고 풍요로운 문화생활을 즐기는 전혀 딴 판이됐다. 어둡기만 했던 지난날을 돌아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들 수밖에 없다. 터널 속에 숨겨져 있던 수많은 이들의 수고와 노력에 미안함이라도 느껴야 그나마 마음이 편해진다. 손 안에서 모든 세계가 펼쳐지고 있는 현실에 살면서 지난 시절은 불쌍한 삶이 아닐 수 없다. 상대적 박탈감으로 지난날의 상처가 더 아픈 고통처럼 느껴진다.
세상은 전화하기 마련이다. 지금까지 역사가 말하고 있듯이 개선되어 가고 있다. 좋아지고 나아지는 방향으로 점점 고치고 바뀌어 가고 있다. 터널 안조차 화려한 조명으로 환하게 변해있진 않는가. 사력을 다해 달리지 않고 죽도록 일을 하지 않아도 생존이 보장되는 사회로 변해가고 있음을 뜻한다. 그럼에도 일부는 이러한 현실을 인정하려 들지 않고 기존의 사고방식에 젖어 고집하려 한다. 기존에 자신이 살아온 방식대로 삶을 살아야 한다고 우기는 이들이다. 다 함께 잘 사는 사회가 아니라 자신의 이기적 욕심만 채우려는 사람들이다.
아직도 케케묵은 오래된 사고가 삶을 지배하고 있다. 건강한 사회에서 인간다운 모습으로 삶을 방해하는 장애물들이 적지 않다. 일제가 심어놓은 신민화 의식이나 독재 정권이 뿌려 놓은 상명하복의 군사 문화, 비민주적이고 권위주의 사고와 태도 등이 대표적인 예다. 친일과 독재 시절의 가해자 내지 기득권을 쥔 세력들은 지금도 정치와 경제 권력의 헤게모니를 차지한 채 자신들의 프레임으로 사회를 가두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 거대 자본 세력이 수구 언론과 정치 검찰의 권력을 남용하여 헤게모니를 장악하려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고 있는 모습이다.
터널 속을 훤히 밝히려다 희생된 독립투사나 민주화 희생자들이 많다. 모순과 결함을 안고 살아야 하는 당시 한국 사회의 부조리한 현실을 개선하려고 애를 쓰다 희생된 유공자들이다. 반면에 그들의 반대편에서 그들을 조롱하고 비웃으며 자신들의 이익을 챙긴 부끄러운 자들도 있다. 자신의 잘못을 사죄나 반성은커녕 역사에 부끄러운 줄 스스로 깨달았으면 좋겠다. 불의와 싸우다 억울하게 세상을 등진 이들에게 최소한의 도리가 아닌가 해서다. 한국 사회가 60여 년 동안 세계 선진 수준으로 발전하고 성장했지만 과거사 청산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아쉬운 까닭이다.
과거의 지식이나 경험의 대부분은 세월이 지나면 쓸모없는 것이 되고 만다. 미래를 살아가는 바탕이 아니라 방해물이나 걸림돌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다. 과거에 대한 후회와 반성이 필요한 까닭이 아닌가 싶다. 지난 삶에서 배워야 할 것은, 이미 시대에 뒤떨어지고 무용지물이 되어 버린 것들에 매달려 미래에 장애가 되지 말라는 가르침이 아닐까 한다. 기억으로 남아 있는 아픈 상처를 더 이상 겪지 않도록 오늘을 살라는 교훈을 주는 것이 아닐까.
호스피스 전문가들이 죽음을 앞둔 환자를 조사한 결과, 자신의 삶을 열정적으로 살지 못한 것이 가장 후회된다고 한다. 세상을 떠난 이들의 답변 속에 삶의 해법이 들어 있는 것은 아닐까. 생존하는 사람들이 본받아야 할 삶의 지혜라 생각한다. 자신이 원하는 삶을 마음껏 사는 사람만큼 의미 있는 삶은 없다. 현실 삶을 반추해보면 그렇게 살기란 쉽지 않지만 사랑하는 주변 사람을 돌아보며 마음을 나누고 사는 것만으로 행복한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닐까.